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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의 파편

김코쿤(182.229) 2015.05.02 01:59:21
조회 294 추천 0 댓글 4

2011년 철학갤러리 베스트에서 퍼옴.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글, 나아가서 언어의 목적은 신문기사나 제품설명서처럼 '정보전달하기', 선거
후보의 연설문처럼 '설득하기', 시나 수필에서처럼 '정서 표현하기'의 세 가지로 나뉜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서 논쟁을 할 때나 인터넷에서 키배할 때, TV에 토론패널로 참가해서 토론할 때
자기가 '정보전달'을 하고 있거나 '설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모든 말싸움
은 '정서 표현하기'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상당하다

 충분히 표현된 정서는 우리가 토론에 사용하는 어휘에 파편처럼 박혀서 그 파편으로 하여금 시비是非
를 주장하지만, 결국 그 파편은 호오好惡의 파편이다 사람들이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게 해
주기 보다는 그 주장이 좋아하는 종류의 주장인지 싫어하는 주장인지를 판단하게 도와줄 뿐이다

 쉽게 말해서 누군가 토론 중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한국인 특유의 냄비근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혹은 "그 말은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것입니다"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하자

 이때 '냄비근성'이라는 말에는 호오의 파편이 박혀있다 다르게 말하면 냄비근성은 '당연히 나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에도 호오의 파편이 박혀있다 호오의 파
편은 하나의 비유인데 사람들이 어떤 것을 당연히 나쁜 것이나 당연히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말할 때 그
생각이 말하는 말에 박혀나오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지지'라는 말을 통해 살펴보면 훨씬 간단하다 아이가 모래밭에 뒹굴던 장난감을 입에 물려고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지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억양과 태도 등의 뉘앙스에
이미 '지지'란 나쁜 것이라는 정보가 묻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굉장히 시적이기도 하다 '돌담에 속
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후략)'같은 김영랑 시인의 시에 담긴 호오의 파편을 보면 그
저 lux라는 조도 단위로 표현될만한 태양빛과 H2O라는 화학기호로 설명할 수도 있는 샘물에 대한 태도
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시로 만들만 하다'라는 정보를 그것을 시로 만드는 행위만
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냄비근성'이라는 말이 '안 좋은 말'이라는 정보가 이미 그것을 안 좋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
는 것으로 추측되는 상황 자체에서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정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는 원빈이 좋더라',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은 매력적이야'와 같은 것들을 '정보'
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다시말해 그 상황에서 우리가 전달받은 것은 정보가 아니라 정서이다 나는 씹이
여자의 성기를 뜻한다는 것을 알기도 전부터 씹이라는 말이 안 좋은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오가는 말과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과 지시하는 것들만 살피고 분석하면 토론의 맥락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지'라는 말에는 입에
문 것을 빼면서 엉덩이를 때리는 행동이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햇발'이라는 말에 그것이 적힌
곳이 시집안의 어딘가라는 정보가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시즘, 언어폭력, 우유부단, 무능력, 물질만능주의, 제 기능을 못하다, 제 위치에 있지 않다, -에 불과
하다, 의미 없다, 맹신, 주먹구구식, 구시대의, 일본의 잔재, 생각이 어려 보인다, 쓸모 없다, 성급한 일
반화의 오류, 통념, 틀렸다, 목적전치, 비윤리적이다, 생각이 얕다, -가 간과되어 있다, 논리가 없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무식하다 등의 말이 토론 중에 쓰이는 것을 무수히 보았다 이런 말들을 '보
는' 것만으로도 그 말이 뜻하는 의미보다 먼저 그것이 뭔가 '나쁜 것'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왜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인간이라는 종의 우월함을 보여준다는 그 '이성'이라는 것이 발휘되는 토론
이라는 행위가 어쩌다가 정보가 아닌 정서로 도배된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글
자체가 '호오의 파편'과 '정서표현'이라는 말에 호오의 파편을 박는 글이라는 것부터 알고나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뭐랄까, 이 글을 통해서 하나의 기나긴 정서표현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이 글을 통해 알려주고 싶은 하나의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싸움의
어휘들이 학술적으로 그것이 '나쁜 것'임이 입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언어폭력'과 같은
말을 보면 '폭력'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타인을 상처줄 가능성이 있는 말들을 짧게 매도하기 위해, 오로
지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용어, 즉 매도용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말싸움은 사실 그 말싸움에서
논리적으로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어휘를 가져와서 그 어휘에 호오의 파편을 박는 정서표현의 싸
움인 것이다 이 논리 바깥의 영역에서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당신이 싫어하
는 것을 두 세글자 이내로 표현하고, 그것은 '당연히' 나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겨라 만약 당신이 햄버
거를 싫어한다면 햄버거를 욕하지 말고 삼각김밥을 욕하라 '삼각김밥은 햄버거 같아서 싫어!'라는 식으
로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햄버거를 싫어한다는 것은 감추어진다 사람들은 당연히 햄버거는
안 좋은 것이며, 당신은 삼각김밥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햄버거가 싫다는 정서는 당신이 삼각김밥을 싫어하는 이유로 햄버거를 언급하는 그 '발언'이
라는 행동에서 전달된다 사실 우리가 원래 생각하고 있던 토론의 전면은 삼각김밥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 동전의 이면을 보면 거기엔 햄버거의 세계가 있다 만약 당신이 단순히 어떤 토론에서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면 정보전달의 세계(삼각김밥의 세계)가 아니라 정서표현의 세계(햄버거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정보전달의 세계에서는 토론에서 이기기 위한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정서표현의 세계에
서는 그 세계의 지배자들이 조용히, 그리고 은근히 당연히 햄버거는 나쁘다는 듯한, 그것은 입증된 사
실이라는 듯한 시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의 호오의 파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호오의 파편이 이 세계를 잠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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