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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소설 4탄. 1차 나무늘보 해방전쟁

엠제이(27.113) 2015.07.16 21:36:23
조회 212 추천 3 댓글 3


나무늘보가 누운 채로 먹이를 먹는다. 당근을 먹는다. 만, 먹는다. 놈은 당근이 아닌 다른 채소를 멀리 치우고, 당근만 골라먹는다. 여기서 우린 나무늘보에게 언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근과 당근이 아닌 것. 최소한 두개의 단어는 그의 머릿속에 있다. 이것 말고 저것만 먹어야지. 라는 생각은 곧 선택의 문제에 대한 실행이고 단어가 없이는 선택의 경우의 수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2015년 5월 27일 페퍼 코발트 박사는 위와 같은 생각으로 나무늘보와 대화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기계의 이름은 나무늘보 머신으로 발명자가 나무늘보만큼 작명에 게을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이름이다.

  나무늘보 머신은 두개의 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추출기와 입력기, 추출기는 생각을 하는 나무늘보의 뇌파를 읽어서 나무늘보 특유의 단어를 찾는 장치였고 입력기는 뇌파신호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찾아낸 단어를 입력하는 기계였다.

  페퍼 코발트 박사가 가장 먼저 찾아낸 단어는 역시 당근이었다. 추출의 과정이 가장 간단했기 때문이다. 나무늘보는 채소들 사이에서 당근을 골라 먹을 때 오직 두 가지의 생각만 하는 걸로 드러났다.


  당근이네. (먹는다)

  당근이 아니네. (먹지 않는다)  


  페퍼 코발트 박사는 아주 쉽게 두 상황에서 중복되는 뇌파, 당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서 다른 박사들이라면 더 많은 단어를 찾아냈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계속되는 연구로 찢어지게 가난했고, 그에겐 더 이상의 연구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발견한 한 단어만으로 인간의 생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만한 새로운 특허개발을 시도했다. 그건 바로 나무늘보의 세뇌였다. 이것은 동물을 이용한 산업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도전이었다. 느리고 게으른 나무늘보를 이용해 뭘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용하더라도 세뇌라는 거창한 방법을 이용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혁신적인 발명이 나온 것은 아니더라도 혁신적인 또라이는 나왔다는 생각에 골방에 박혀있던 세계 과학자와 연구자, 기술 개발자들은 그의 연구에 주목했다. 흥미를 가졌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의 연구 세미나 자리가 꽉 찼다는 것은 닥터 페퍼 코발트에게 있어선 놀랍고도 기쁜, 그의 목을 뻣뻣하게 세워주는 일이었다.

  그는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추출기와 입력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원리와 내용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지켜보던 과학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원리는 잘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세뇌를 하고 어떻게 현대 산업에 이용하겠다는 거요. 느려터진 나무늘보로. 먹고 싸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동물 아니오? 연구자의 말에 작은 웃음이 터지고 과학자들은 꼴통박사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집중했다, 재밌는 개그쇼라도 보듯.

  박사는 대답대신 한 마리의 나무늘보를 데려왔다. 그리고 상자를 들고 왔다. 당근이 든 상자였다. 나무늘보는 박사의 품에 안겨오면서도 당근을 먹고 있었다.

  박사는 이어서 당근을 빼앗더니 그 자리에 쓰레기를 뒀다. 그리고 입력기를 통해 당근이란 단어를 연속으로 쐈다.

  화면을 통해 나무늘보의 생각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당근이 아니다.

  당근이다

  당근이 아니다.

  당근이다

  당근이 아닐.. 텐데?

  당근이다

  당근인가.

  당근이다.


  나무늘보는 잠시 망설이다 쓰레기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씹어 먹었다.

  좌중은 경악했다. 나무늘보에게 쓰레기를 먹게 하다니. 이건 개나 고양이에게 강제로 쓰레기를 먹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무늘보가 음식물을 좀 가려서 그렇지 음식에 대한 소화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동물이 나무늘보였다. 소위 말하는 쇠라도 소화해내는 동물이 나무늘보였다. 하루에 먹는 양은 자그마치 2톤. 그런 나무늘보의 식사를 쓰레기로 바꿀 수 있다면? 나무늘보가 단 100마리만 있어도 200톤의 쓰레기를 자연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비법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 새로운 기술의 발견으로 인해 인간이 나무늘보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문화는 자신과 전혀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 크게 발전한다. 지능 또한 마찬가지다. 다 똑같은 것 사이에서 다름을 인식할 때 비로소 큰 발전을 이룬다.

  모든 일의 발단은 훈련된 나무늘보와 훈련되지 않은 나무늘보의 만남이었다. 나무늘보들은 평소처럼 바닥에 누운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배고프다. 당근 먹고 싶다.

  나도

  나도 먹고 싶다.


  문제는 이들의 식사로 일괄적으로 쓰레기가 나왔을 때 시작됬다. 이미 훈련된 나무늘보들은 당연하다는 듯 쓰레기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본 훈련되지 않은 나무늘보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그거, 당근 아니다.

  이미 세뇌될 만큼 세뇌당한 나무늘보들은 당연한 사실에 왜 딴지를 거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맞다.    

  아니다.


  맞다와 아니다, 이 두 개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다름을 이해했고, 그것은 다툼과 화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식량을 줬기에 고마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인간들이, 사실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서울대공원에 거주하던 일족의 젊은 나무늘보 다룽과 야매가 8마리의 나무늘보와 함께 봉기를 일으키는데 그것이 제 1차 나무늘보 해방전쟁의 시작이었다. 2016년 4월 27일의 일이었다.

  그들은 방심한 사육사가 우리를 열어놓고 화장실에 간 사이 일제히 우리를 탈출했다. 그 모습을 본 관람객들은 그들의 몸에 묻은 진흙이 자신의 손에 묻을까봐 두려워했으며, 또한 나무늘보 정도야 어떻게 냅둬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자는 느려터진 나무늘보가 무얼 할 수 있겠냐고, 사람에게 무슨 위협이 될 수 있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환경에 맞춰 진화해왔으며, 변화에 적응 못한 동물들은 멸종되기 마련이다. 나무늘보가 느리고 게으른 주제에도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나무에 매달릴 때 몸을 고정할 때 쓰는 발톱으로, 나무를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동물이다. 그들은 분당 일 미터의 속도로 이동하는데 놀랍게도 이것은 죽은 나무늘보보다 분당 일 미터나 빠른 속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연의 가장 뛰어난 은신기술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종일 나무 위에서 사는데 오직 일주일에 한 번만 지상에 내려온다. 배설을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하기 때문이다. 적에게 위험할 수 있는 순간을 일주일 중 하루로 한정시킨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몸에선 천연적인 은폐물질인 녹조가 자란다. 그들은 마치 암살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며, 그들을 본 사람은 그들이 움직였는지 안 움직였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포식자 중 하나다.

  "어이구, 이런 말썽꾸러기들. 우리로 다시 들어가자."

  세상이 그들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흘러갔더라면 말이다. 이땐 세상이 아직 그렇지가 않아서, 1차 해방전쟁은 열 시간 만에 끝났다. 나무늘보의 탈출 소식을 들은 사육사들이 뭐, 나무늘보들이 탈출했다고? 한숨만 더 자고 가도 되겠어, 라고 생각하지만 않았다면 더 짧은 시간에 끝났을 것이다.

  그 다음날 사육사들이 공원장에게 꾸지람을 듣는 바람에, 우리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되는 일은 그 이후로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반란분자 다룽과 야매는 죽을 때까지 우리에 갇혀 지냈으며, 반란의 기회는 결코 여러 번 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뭐, 동물원 우리에서의 삶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먹다보면 먹을 만한 것이 쓰레기였고, 지낼 만한 생활은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을 희미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나무늘보의 역사에 이 사건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정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에 남는다. 다룽과 야매를 위시한 여덟 마리의 나무늘보는 그 날 동물원으로부터 615미터를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고, 이는 훗날 나무늘보 마라톤의 거리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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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엽편은 아니고, 써둔 단편 초반부. 생각보다 엽편 별로 안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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