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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의 창녕국 = 안동

ㅇㅇ(218.234) 2021.07.01 17: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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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력대전고)

 

단군조선(단군조선)

 

단군의 휘(휘)는 왕검(왕검)이니, 《구사(구사)》 단군기(단군기)에, “신인(신인)이 태백산(태백산) 지금의 영변(녕변) 묘향산(묘향산) 단목(단목) 아래에 내려오시니,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때는 당요(당요) 무진년이었다. 상(상) 나라 무정(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아사달산) 지금의 문화(문화) 구월산(구월산). 본 이름은 궐산(궐산)이니, 궁궐 터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발음이 늦추어져 구월산으로 잘못 불려졌다. 일설에는, ‘아사(아사)’란 방언(방언)으로 구(구)이고, 달(달)은 방언으로 월(월)이니 ‘아사달’이란 9월의 방언이라고도 한다. 으로 들어가 신(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삼한고기(삼한고기)》

🌕 원년(원년)에 백성에게 머리를 땋고 관(관) 쓰는 법을 가르쳤다. 군신ㆍ남녀ㆍ음식ㆍ주거의 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동사(동사)》에는, “단군이 팽우(팽우)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려 백성이 살 터전을 정해 주었다.” 하였고, 《본기통람(본기통람)》에는, “우수주(우수주) 지금의 춘천(춘천) 에 팽우의 비(비)가 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한서(한서)》 식화지(식화지)에, “팽우가 예맥 조선(예맥조선)을 뚫었다.” 하였으니, 팽우는 바로 중국 사람이지 단군의 신하가 아니다.

🌕 강화현(강화현) 서쪽 마리산(마리산) 꼭대기에 참성단(참성단)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낸 단(단)이다.” 한다. 전등산(전등산)에는 삼랑성(삼랑성)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았다.”고 한다. 《고려지리지(고려지리지)》

🌕 이것이 ‘전조선(전조선)’이니, 처음으로 국호(국호)를 가지게 되었다. 《여지승람(여지승람)》

🌕 조선의 음(음)은 조선(조선)이니, 강에서 온 이름이다. 또 “선(선)은 밝다는 말이니,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먼저 밝아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고 한다. 《산해경(산해경)》에는, ‘조선은 열양(렬양)에 있다.’고 하였는데, 주(주)에 “열(렬)은 물 이름이다.” 하였고, 양웅(양웅)의 《방언(방언)》에, “조선 열수(렬수)의 사이”라는 말이 있다. 장화(장화)가 말하기를, “조선에는 천수(천수)ㆍ열수(렬수)ㆍ선수(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하여 열수(렬수)가 된다.” 하였으니, 아마 낙랑 조선(악랑조선)이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하다.

🌕 아들 부루(부루)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동부여왕)이 되었다. 우(우) 임금이 제후(제후)를 도산(도산)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조회)하게 하였다. 《삼한고기(삼한고기)》 하(하) 나라 우 임금 18년 갑술의 일이다.


일설에는, “부루가 기자(기자)를 피하여 부여에 나라를 세우고 북부여(북부여)라고 일컫다가, 뒤에 가섭원(가엽원)으로 옮겨 동부여(동부여)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삼성사)가 있는데, 환인(환인)ㆍ환군(환군)ㆍ단군 세 분을 제사 지낸다.


《구사》에, “단군이 태백산 단목(단목) 아래에 내려왔다.”고 하였는데, 이제 살펴보건대, 《삼국유사(삼국유사)》에 《고기(고기)》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 제석(환인제석)의 서자(서자) 환웅(환웅)이 있어, 천부인(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신시)’라 일컬었으니, 이를 환웅천왕(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풍백(풍백)ㆍ우사(우사)ㆍ운사(운사)를 거느리고 세상에 머물면서 다스려 화(화)하게 하였는데, 그때 곰[웅] 한 마리가 있어서 항상 신웅(신웅)께 기도하여 사람이 되고 싶어하니, 신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었다. 곰이 먹은 지 37일 만에 여자가 되어 늘 단수(단수) 아래에서 주문을 외우며 임신하기를 비니, 신웅이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 당요 경인년에 평양(평양)에 도읍하고 1천 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주) 나라 무왕(무왕)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당장경(당장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산에 숨어 신(신)이 되었는데, 수(수)가 1천 9백 8세이다.” 하였다. 이로써 말한다면,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온 분은 단군이 아니다. 다만 그 설이 괴이하고 허황하고 비루하고 과장되어 애당초 거리의 아이들조차 속이기 부족한데,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이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요(당요) 이후의 역년(력년)의 수는 중국의 사서(사서)와 《소옹(소옹)의 《황극경세서(황극경세서)》를 상고해서 알 수 있으니, 당요 경인년에서 무왕(무왕) 기묘년까지가 겨우 1천 2백 20년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나라 다스린 것이 1천 5백 년이고, 수가 1천 9백 8세”라는 것은 그 거짓됨이 심하지 않은가.

🌕 단군의 묘는 강동현(강동현)에서 서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위가 4백 10척이다. 일설에는 현 북쪽 도료산(도료산)에 있다 한다.


《고기(고기)》에, “단군은 요와 같은 날 즉위하여 우(우)ㆍ하(하)를 지나 상(상) 나라 무정(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 48세이다.” 하였는데, 당시의 문적(문적)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 진위(진위)를 고찰할 수가 없으므로 이제까지 《고기(고기)》를 그대로 따라서 기술해 왔다. 서거정(서거정)이 말하기를, “요 임금 때는 인류의 문화가 밝았고, 하ㆍ상에 이르러 세상이 점차 경쇠해져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이 4, 0년에 불과하고 사람의 수도 상수(상수)가 1백 년인데, 어찌 단군만 유독 천백 년을 수하여 한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겠는가. 그 설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부루)를 보내어 도산(도산)에서 우 임금께 조회했다.’ 하나 그 설이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나라를 장구하게 향유하고 부루가 도산에 가서 조회하였다면, 비록 우리나라 문적이 갖춰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중국의 문서에 어찌 한 마디도 언급이 없겠는가. 단군이 혼자 누린 것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서로 전해 가면서 나라를 향유한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이 의심할 것 없다.” 하였다. 《필원잡기(필원잡기)》 🌕 《역대아람(력대아람)》에 “무정 8년은 마땅히 갑자년이 되어야지 을미년이 아니며, 수도 마땅히 1천 17년이 되야지 1천 48년이 아니다. 을미와 1천 48년을 가지고 비교하여 참작해 상고해 보면 마땅히 39년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홍무(홍무) 병자년(1396)에 길창군(길창군) 권근(권근)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명 나라 태조(태조)가 단군을 제목으로 시(시)를 짓기를 명하니, 권근이 짓기를,

“듣건대 태고적에 / 문설홍황일

단군이 나무 곁에 내려 오셨네 / 단군강수변

대 물리길 몇 대인가 / 전세하지기

햇수는 천 년을 지났다오 / 력년증과천

하였는데, 대개 전한 세대와 햇수의 장구함을 말한 것이다.

🌕 혹 말하기를, “해부루(해부루)의 어머니는 비서갑(비서갑) 하백(하백)의 딸이다.” 한다. 《풍암집화(풍암집화)》


《유사(유사)》에, “단군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더 괴이하다. 그 후에 해모수(해모수)가 또 하백의 딸과 사통(사통)하여 주몽(주몽)을 낳았다 하였는데, 설령 하백의 딸이 과연 신귀(신귀)이고 사람이 아닐지라도, 또 어떻게 앞서 단군에게 시집간 터에 뒤에 해모수와 사통했겠는가. 《풍암집화》

단군의 증손 동부여왕(동부여왕) 대소(대소)가 고구려의 대무왕(대무왕)에게 살해당했는데, 대무왕은 곧 한(한) 나라 광무제(광무제) 때에 해당되는 만큼, 단군의 아들 해부루로부터 대소까지는 3세에 불과하고 무정(무정)으로부터 광무까지는 꼭 1천 3백 39년이 되니, 이럴 리는 없는 듯하다. 《역대아람(력대아람)》

🌕 단군씨의 후손에 해부루라고 하는 이가 있어 곤연(곤연)에 기도하여 금와(금와)를 얻었는데, 얼굴이 금개구리와 흡사했으므로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금와가 우발수(우발수)의 여자에게 반하였는데, 햇빛이 몸에 비치니 감응되어 주몽(주몽)을 낳았다. 주몽의 작은 아들이 온조(온조)인데, 주몽과 온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으니, 모두 단군씨에서 나왔다. 《미수기언(미수기언)》

🌕 평양에 숭령전(숭령전)이 있는데, 단군을 제사지낸다. 사향전(사향전)의 제사(제사) 조에 상세하다.

🌕 단군의 영토를 상고할 수는 없지만 기자가 단군을 대신하였을 때 그 지역의 반이 요동 땅이니, 단군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북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대개 단씨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겨 가고 옛 강토는 그대로 기자의 영토로 들어간 것이다. 안정복의 《강목(강목)》


기자조선(기자조선)

 


기자의 휘는 서여(서여)이니, 은(은) 나라 태사(태사)로 주(주)의 숙부다. 처음에 기(기)에 봉했었다. 정현(정현)은, “기(기)는 경기(경기) 안에 있다.” 하였다.


유주(류주)의 기자비(기자비)에, “기자의 이름은 수(수)이다.” 하였고, 《사기평림(사기평림)》에서 복건(복건)이 말하기를, “기자는 주의 서형(서형)이다.”고 했다. 함허자(함허자)도 기자를 주의 서형이며 미자(미자)의 아우라고 했는데, 필시 복건의 말로써 증거를 삼았을 것이나 사실과 어긋남이 심하다. 풍암집화

🌕 서백(서백)이 죽고 아들 발(발)이 즉위하니, 이가 무왕(무왕)이다. 이미 상(상)을 이기고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나서 기자에게 도(도)를 물으니, 기자가 이에 홍범(홍범)을 진술하였다. 원년 기묘에 기자가 주(주) 나라가 자기를 석방한 것을 참지 못하여 조선으로 달아나니, 무왕이 듣고 인하여 조선에 봉(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상서(상서)》 홍범 주(주)와 《통감외기(통감외기)》를 합록(합록)하였다.


조선은 안동국(안동국)의 동쪽에 있으니, 옛날 숙신씨(숙신씨)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로 삼고 은(은)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중국의 번방(번방)이 되었다. 명 나라 영락 연간(영악년간)에 도사(도사) 함허자(함허자)가 편찬한 《천운소통(천운소통)》

옛 책에 흔히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마치 주에서 명령을 내려 기자가 봉함을 받은 것 같은 면이 있는데, 《구사(구사)》가 그 오류를 이었으니, 실로 기자의 자정(자정)하는 의리에 어긋난다. 홍범전(홍범전)에, “인하여 봉했다.” 하였고, 정강성(정강성)이 말하기를, “주 나라가 자기를 석방한 것을 참지 못한 것은 구차히 살아난 것을 혐의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기자의 뜻을 얻은 것이다. 이른바 ‘인하여 봉했다’는 것은, 예컨대, 항우(항우)가 진여(진여)가 남피(남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봉했다는 것과 같은 유이다. 《풍암집화》

🌕 기자가 중국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가니, 시(시)ㆍ서(서)ㆍ예(례)ㆍ악(악)ㆍ의(의)ㆍ무(무)ㆍ음양(음양)ㆍ복서(복서)의 무리와 백공 기예(백공기예)가 모두 따라갔으므로 “반만(반만)의 은인(은인)이 요수(료수)를 건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천운소통(천운소통)》


신익성(신익성)의 《경세보편(경세보편)》에, “무자년에 기자가 중국인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하였는데, 무자년은 곧 주 나라 성왕(성왕) 3년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피해 들어온 것은 반드시 무왕이 상(상)을 쳐부순 초기에 있었겠지, 조선으로 들어오기를 어찌 은(은)이 망한 뒤 10년이나 기다렸겠는가. 《천운소통》

🌕 기자가 그 백성에게 예의(례의)ㆍ밭농사ㆍ누에치기ㆍ베짜는 일을 가르치고 백성을 위해 금팔조(금팔조)를 두었으니,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음으로 갚고,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하며, 도적질한 자는 그 집에 들어가 종이 되고, 스스로 죄를 속(속)하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전)을 내야 한다. 비록 종살이를 면하고 평민이 되어도 풍속이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서 혼인할 데가 없다. 《한서(한서)》

🌕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통역해서 알아들었다. 시ㆍ서를 가르쳐서 중국의 예악(례악) 제도를 알게 하니, 부자ㆍ군신의 도(도)가 비로소 행하게 되고 오상(오상)의 예(례)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백공 기예를 가르치니 의ㆍ무ㆍ음양ㆍ복서의 술수가 비로소 있게 되었으며, 예의ㆍ밭농사ㆍ누에치기를 가르치고, 금팔조를 제정하여 교화하니 1년이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살인한 자는 목숨으로 갚고,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적질한 자는 남자는 사내종, 여자는 계집종으로 만드니, 3년이 안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어 신의(신의)를 숭상하고 유도(유도)에 독실하여 중국의 풍습을 양성하니, 성인의 교화[성화]라 이를 수 있었다. 전쟁을 숭상하지 말라고 가르쳐 이르기를, “하루에 생긴 난(란)이 10년이 지나도록 평정되지 않아서 생민(생민)이 도탄에 빠져 그 생업에 편안하게 종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덕(덕)으로써 억세고 사나운 것을 굴복시키니, 이웃 나라들이 모두 그 의(의)를 사모하여 서로 친하게 되어 중국의 번방(번방)이 되었다. 때문에 대대로 중국과 친하고 믿는 사이가 되어 봉작(봉작)을 받고 조공(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예의의 도(도)가 이지러짐이 없고, 의관(의관)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각대)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시서례악)의 나라요, 인의(인의)의 나라다.”라고 하는데, 기자한테 비롯된 것이다. 《천운소통》


함허자(함허자)의 논(론)은 《한서(한서)》와 대략 같은데, 우리나라 풍속에 대해 깊이 알았다. 역대의 모든 사서(사서) 및 《국조 혼일지(국조혼일지)》가 논한 것은 잘못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필원잡기》

🌕 기자가 우리나라에 봉해진 초기에 팔조(팔조)의 교화를 베풀려고 했으나 풍토가 달라서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자를 얻은 뒤에야 행할 수가 있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왕수긍(왕수긍)을 천거하니, 명하여 사사(사사 고대의 법관)로 삼았다.

🌕 평양의 내성(내성)과 외성(외성)을 세상에서 전하기를, 기자 때 쌓은 것이라고 하나, 아득히 먼 세대이니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기자궁(기자궁)의 옛터가 정양문(정양문) 밖에 있으며 기자정(기자정)이 있다. 《여지승람》

🌕 정전(정전)이 외성 안에 있는데, 유적이 완연하다. 전제(전제) 조에 상세하다.

🌕 《악지(악지)》에, “기자가 8조의 가르침을 베풀어 예속(례속)을 일으키니, 조야(조야)가 무사하고 인민이 기뻐하여 대동강(대동강)을 황하(황하)에 견주어 노래를 지어 칭송하고 축하하였다.” 하였다. 《여지승람》에는 영명령(영명령)을 숭산(숭산)에 견주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자가 조선의 풍속이 억세고 사나운 것을 보고, 버드나무의 본성이 부드럽다는 이유로 백성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평양을 일명 ‘유경(류경)’이라고 한다.”고 한다. 《순오지(순오지)》

🌕 공자가 문왕(문왕)과 기자를 역상(역상 《주역(주역)》의 괘(괘)와 효(효)를 해석한 것)에 아울러 열거하고, 또 삼인(삼인)이라고 일컬었으니, 기자의 덕은 말로 찬양할 수 없다. 생각건대, 옛날 우(우) 임금이 수토(수토)를 평치(평치)할 때, 하늘이 홍범(홍범)을 내려 이륜(이륜)이 베풀어졌다 하나, 그 설이 일찍이 한 번도 우서(우서)와 하서(하서)에 보이지 않았는데, 천여 년이 지나 기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났으니, 지난날 기자가 무왕을 위해 진술하지 않았다면 낙서(락서) 천인(천인)의 학(학)을 뒷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기자는 무왕의 스승이다. 무왕이 다른 나라에 봉하지 않고 우리 조선에 봉하여 조선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친히 교화를 받아 군자는 대도(대도)의 요체를 들어 알게 되고, 소인은 지극한 다스림의 덕을 입어서 그 감화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지 않는 데에 이르렀다. 이 어찌 하늘이 동방(동방)을 후하게 여겨 어진 이를 주어 이 백성을 은혜롭게 함이 아니며, 사람의 힘으로 능히 미치지 못할 바가 아니겠는가. 변계량(변계량)이 지은 기자묘비(기자묘비)

🌕 주 나라 성왕(성왕) 33년 무오에 기자가 돌아가시니 재위 40년이고, 수(수)는 93세였다.

🌕 기자의 묘는 평양부 북쪽 토산(토산) 위에 있다.


《사기(사기)》 미자 세가 주(미자세가주)의 색은(색은 《사기》의 주석서)에서 두예(두예)가 말하기를, “양국(량국) 몽현(몽현)에 기자묘가 있다.”고 했고,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대명일통지)》에, “몽현에 기자묘가 없다.”고 했으며, 산동 포정사 고적(산동포정사고적) 조에는, “평양성 밖에 기자묘가 있다.”고 했으니, 두예의 설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잘못 전해 들은 것인 듯하다. 《풍암집화》

🌕 《환우기(환우기)》에, “기자묘가 몽현에 있다.”고 했고, 《수경(수경)》 주에는, “기자묘가 박성(박성)에 있다.”고 했는데, 이른바 몽현과 박성은 곧 북박(북박)이다. 《청통지(청통지)》에는, “귀덕부(귀덕부) 상구현(상구현)에 있다.”고 하였다.

🌕 이것이 후조선이니, 41대를 전하여 기준(기준)에까지 이르렀다. 《여지승람》


《한서(한서)》에 이르기를, “현도(현토)ㆍ낙랑(악랑)은 무제(무제) 때에 설치되었으니, 모두 조선ㆍ예맥(예맥)ㆍ고구려(고구려)의 오랑캐이다. 은(은)이 쇠망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했고, 《당서(당서)》 온언박(온언박)에는, “요동(료동)은 본래 기자국(기자국)이다.” 했으며, 《요금사(료금사)》에는, “요동ㆍ광녕(광녕)은 모두 기자의 봉지(봉지)이다.” 했다. 《속문헌통고(속문헌통고)》에는, “함평로(함평로)가, 기자의 봉지다.” 했고, 《당서(당서)》에서 배구(배구)가 말하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고죽국)인데, 주 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 되었다.”고 하였다.

🌕 숭인전(숭인전) 제사(제사) 조에 상세하다.


기자의 후손 조선후(조선후) 때에 주 나라가 쇠퇴하자 연후(연후)가 참람되게 임금이라 일컫고 조선 땅을 침략하려고 하였다. 조선후도 스스로 임금이라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막아 공격함으로써 주 나라 왕실을 받들려고 하니, 그 대부(대부) 예(례)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으로 가서 연후를 달래니, 연 나라가 이에 공격하지 않았다. 《위서(위서)》

🌕 뒤에 자손이 차츰 교만하고 포학스러워졌다. 연 나라가 이에 장수 진개(진개)를 보내어 서쪽 변방을 쳐서 땅 2천여 리를 빼앗고 반한(반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졌다. 《위서(위서)》


연(연) 나라가 동호(동호)를 쳐부수고 땅 1천 리를 넓혀서 장성(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조양)에서 양평(양평)까지 이르렀으며, 상곡(상곡)ㆍ어양(어양)ㆍ우북평(우북평)ㆍ요동(료동) 등의 군(군)을 설치하였다. 《강목(강목)》

《일통지(일통지)》의 요동 명환조(료동명환조)에 또한 기자가 실려 있고, 《성경지(성경지)》에는 심양 봉천부(심양봉천부)와 의주(의주) 광녕(광녕)의 지경을 모두 조선의 경계라 하였다. 요동의 태반이 기자의 영토이고, 기자가 또 평양과 환도읍(환도읍)에 도읍하였다 하여, 서울을 많이 정하였으니, 오운(오운)의 이른바, “요하(료하) 이동과 한수(한수) 이북이 모두 기씨의 땅이다.”고 한 것이 옳다. 후손에 이르러 연 나라 말기에 서쪽 지경 1천여 리를 잃고 만심한(만심한)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곧 《한지(한지)》에서 말한 요동군 동부 속현 심한(료동군동부속현심한)이다. 이에 요동 땅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괄지지(괄지지)》에, “조선ㆍ고구려ㆍ예ㆍ맥ㆍ동옥저 등 다섯 나라의 땅이 동서가 1천 3백 리요, 남북이 2천 리이니, 동쪽으로는 대해(대해)까지가 4백 리요, 서쪽으로는 영주(영주) 경계까지가 9백 20리며, 남쪽으로는 신라까지가 6백 리요, 북쪽으로는 말갈(말갈)에 이르기까지 1천 4백 리다.” 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또한 방증(방증)이 될 만하다. 안정복(안정복)이 지은 《강목(강목)》

🌕 진(진)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몽염(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 왕 비(부)가 즉위하여 진이 습격할까 두려워서 대략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아들 준(준)이 즉위한 지 20여 년에 진승(진승)ㆍ항우(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연(연)ㆍ제(제)ㆍ조(조)의 백성이 근심 걱정으로 괴로워하다가 속속 준에게로 투항해 왔다. 준이 이에 이들을 서쪽 지경에 두어 살게 하였다. 한(한)이 노관(로관)을 연왕(연왕)으로 삼음에 삼을 당시 조선과 연(연)은 격수(격수)를 경계로 하고 살았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흉노)로 도망가니, 연 나라 사람 위만(위만)이 망명하여 호복(호복) 차림으로 동쪽으로 격수를 건너 준에게 나아가 항복하고, 준을 유세하여 조선의 변방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준이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박사)에 제수하고 백 리 땅을 봉하여 서쪽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에서 망명해 오는 사람들을 꾀여 그 무리가 차츰 많아졌다. 이에 속임수로 사람을 보내 준에게 말하기를, “한 나라 군사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호위하겠다.” 하고, 마침내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워 패하여 그 좌우 신하와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로 해서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산(금마산)에 자리잡고 스스로 마한왕(마한왕)이라 일컬었다. 그의 친속(친속)으로 본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인하여 한씨(한씨)로 성(성)을 가칭(가칭)했다. 《위서》 《동문광고(동문광고)》

🌕 준이 남쪽으로 달아나 여러 대를 전한 뒤에 온조(온조)에게 멸망당했다. 아래 마한(마한) 조에 상세하다.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이 주 나라 무왕 기묘년이고, 뒤에 왕 준에 이르러 한 나라 고조(고조) 병오년(195)에 위만이 침입하므로 바다로 해서 남쪽으로 갔으니, 평양에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준이 도읍을 금마군으로 옮기니, 이것이 마한인데, 사군(사군)ㆍ이부(이부) 때를 지나 백제 온조왕(온조왕) 26년(8) 무진에 망했으니, 또한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금부식)의 《삼국사(삼국사)》에는 단지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하여 취했다.”고 썼을 뿐이고 기씨세계(기씨세계)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필원잡기》 🌕 《동문광고(동문광고)》에는 “평양에 도읍한 지 9백 29년을 지나 무강왕(무강왕) 때에 이르러 기준이 남쪽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명 나라 사신 허국(허국)이 평양에 도착하여, “기자가 주 무왕 몇 년에 봉함을 받아 이곳에 왔는가?”고 물었는데, 원접사(원접사)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종사관(종사관) 기대승(기대승)은 옛 사실을 잘 고찰한다고 자처하는 터이라, 《사기(사기)》와 《양한서(량한서)》 《여지승람》 《동국통감》 등 서적을 가져다가 한참동안 참고해도 마침내 봉함을 받은 해를 알지 못하였다. 대개 《통감외기(통감외기)》에만, “무왕 원년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하였다. 《패관잡기》

🌕 《사기》에 이미,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하고, 또, “기자가 주 나라에 조회하러 은 나라의 옛터를 지나다가 감개하여 맥수(맥수)의 노래를 지었다.”고 했으니, 이상하다. 무왕이 이미 신하로 삼지 않았는데 기자가 스스로 신하가 되기를 달갑게 여겨 조회하러 갔겠는가. 성현을 욕되게 함이 심하다. 《풍암집화》


《좌전(좌전)》 희공(희공) 15년 조에, “진 목공(진목공)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당숙(당숙)을 봉할 때에 기자가 말하기를, 「그 후손이 반드시 크게 되리라」하였다.’고 하였다.” 했으니, 기자가 주 나라에 조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조정의 정사를 미리 알 수 있으며, 바깥 변방에서 비록 말을 했다 하더라도 중국 사람이 또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성호사설(성호사설)》

🌕 함허자(함허자)가 말하기를, “기자의 후손이 주 나라의 패망에서 후한(후한)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을 지나 공손강(공손강)에게 왕위를 빼앗겨 기자의 계통이 끊어졌다.”고 하나, 이제 상고하건대, 공손강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필원잡기》


기자의 후손이 공손강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통전(통전)》에, “조선이 1천여 년을 지나 한 나라 고조(고조) 때 멸망했으며, 무제(무제) 원수(원수) 연간에 그 땅을 개척하여 낙랑군(악랑군)을 두었으며, 후한 말에 이르러 공손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연유한 것인데, 이는 《한사(한사)》의 기록과 대략 같다. 어찌 일찍이 공손강이 기자의 후손에게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있겠는가. 《풍암집화(풍암집화)》

🌕 광녕(광녕) 한 나라 때에 요동(료동)ㆍ요서(료서) 두 군(군)의 땅 성(성)의 북쪽 5리에 기자정(기자정)이 있고 곁에 기자묘(기자묘)가 있으며, 기자가 우관(후관 은 나라의 갓)을 쓴 소상(소상)이 있었는데, 가정(가정) 연간의 병화(병화)로 소실되었다. 《월정만록(월정만록)》

🌕 마한 말기에 잔약한 후손 셋이 있었는데, 친(친)은 그 뒤에 한씨(한씨)가 되었고, 평(평)은 기씨(기씨)가 되었으며, 양(량)은 용강(룡강) 오석산(오석산)으로 들어가 그 뒤에 선우씨(선우씨)가 되었다. 《운서(운서)》에, “선우는 자(자) 성이니, 주 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작은 아들 중(중)에게 우(우)를 식읍(식읍)으로 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성을 선우라 했다.”고 하였고, 《강목(강목)》에도,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 아들에게 우를 식읍으로 주니, 이로 인해 선우로 성을 삼았다.”고 했으며, 조맹부(조맹부)가 선우추(선우추)에게 보낸 시(시)에,

기자 후손 수염 늙은 첨지라 / 기자지후다염옹

했으니, 선우가 기자의 후손임이 명백하지 않는가. 홍무(홍무) 연간에 선우경(선우경)이란 자가 중령 별장(중령별장)이 되었으며, 그 7대손 식(식)이 태천(태천)에서 와서 전각(전각) 옆에 사니, 드디어 선우식을 기자의 후손으로 삼고 전각 이름을 숭인(숭인)이라 하고 식을 전감(전감)에 임명하여 자손이 대대로 이어 받았다고 한다. 《월사집(월사집)》의 숭인전비(숭인전비)

🌕 평양 대동강 동쪽 기슭에 긴 느릅나무 숲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데, 가로로 10리나 뻗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기자가 백성들에게 심게 하여 흉년의 굶주림에 대비한 것이다.”고 한다.

🌕 기자가 동쪽으로 올 때에 자작(자작)으로 봉함을 받았다. 후손 조선후(조선후)가 연(연)이 왕이라 일컫는 것을 보고 또한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연을 정벌하여 주 나라를 받들고자 하니, 대부(대부) 예(례)가 간하여 그만두었다고 하니, 대개 이보다 앞서서 이미 제후국이 되었고, 조선이 왕이라 일컫게 된 것도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후손이 교만하고 포학하자 연 나라가 그 서쪽 지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심한(만심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를 처음 봉할 때의 경계는 실상 연과 더불어 접경했으며, 지금의 장성(장성) 밖 요반(료반)의 땅이 모두 역내(역내)이다. 이른바 만반한(만반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연경(연경) 동쪽에는 달리 많은 땅이 없으니, 만(만)이란 지금의 만주(만주)이고, 반(반)은 아마 심(심)의 잘못인 듯하다. 《성호사설》


위만 조선(위만조선)

 


조선왕 만(만)은 연 나라 사람이다. 전연(전연 대연(대연)) 시대부터 일찍이 진번 조선(진번조선)을 공략하여 차지하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쌓았다. 진(진)이 연 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동 변방에 예속시키더니, 한(한)이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연왕) 노관(로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도망가자 위만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망명하여 상투를 틀고 만이(만이)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넘어 패수(패수)를 건너 진(진)의 옛 빈 터 상하(상하) 요새에 자리잡았다. 차츰 진번 조선의 만이와 옛 연과 제(제)의 망명자를 끌어 모아 왕이 되고, 왕검성(왕검성)에 도읍하였다. 마침 효혜(효혜)ㆍ고후(고후) 때에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니, 요동 태수가 즉시 위만에게, “외신(외신)이 되어 변방 밖의 만이로 하여금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보장(보장)이 되도록 하겠으니 모든 만이의 군장(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금지하지 말아달라.”고 약속하고 천자께 아뢰니, 천자가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병력과 재물을 얻게 되어 이웃의 작은 고을을 침략하여 항복받으니, 진번ㆍ임둔(림둔)이 모두 와서 복속(복속)하게 되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사기(사기)》 🌕 《동사(동사)》에는 패수를 대동강이라고 했는데, 이 패수는 당연히 압록강이 되어야 한다.

🌕 한 나라 혜제(혜제) 원년 정미(B.C.194)에 위만이 조선 왕 기준(기준)을 꾀어 쫓아버리고 스스로 임금이 되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역대아람(력대아람)》 🌕 《동문광고》에, “한 나라 고제(고제) 병오년(B.C. 195)에 일어났다.” 하였다.


그 지경이 서북으로는 만반한(만반한)까지이고, 또 그 이웃의 작은 고을인 진번과 임둔을 쳐서 항복시키니, 지금의 동북 변방 밖과 북도(북도)ㆍ영동(령동) 지역이 그것이다. 서쪽으로는 대해(대해)를 건너 청제(청제)로 통하고, 남으로는 한수(한수)에 이르러 삼한(삼한)과 접하였다.

🌕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우거)에 이르러 꾀어낸 한(한)의 유망인(류망인)이 더욱 많아졌다. 또 일찍이 천자를 들어가 뵙지 않고, 진번과 이웃 여러 나라가 상서(상서)하고 천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원봉) 2년 임신에 한 나라가 사신 섭하(섭하)를 보내어 달래고 깨우쳤으나, 우거가 끝내 조서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다가 경계인 패수에 다달아 부하를 시켜 자기를 호송하는 자를 찔러 죽이니, 조선 비왕(비왕) 장(장)이 곧 강을 건너서 달려 변경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돌아가 천자께 보고하니, 섭하를 요동 동부 도위(료동동부도위)로 삼았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사기》. 아래도 같다.

🌕 천자가 죄수를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하는데, 그해 가을 누선장군(루선장군) 양복(양복)을 보내 제(제 산동반도(산동반도))로 해서 발해(발해)를 건너 오고, 좌장군(좌장군) 순체(순체)는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쳤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루선)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성에서 나와 공격하니, 양복의 군사가 패하여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10여 일 만에 겨우 흩어진 군졸을 다시 수습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 군사를 공격하였으나 격파하지 못했다. 천자가 이에 위산(위산)을 보내어 군대의 위력으로 가서 우거를 효유하니, 우거가 항복하기를 원하여 태자(태자)를 보내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량을 보내기로 하였다. 만여 명의 무리가 무기를 가지고 패수를 건너니, 사자(사자)가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말하기를,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마땅히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 하였다. 태자도 사자가 속여서 죽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께 아뢰니 천자가 위산의 목을 베었다.

🌕 좌장군이 패수의 상류쪽 군사를 깨뜨리고 앞서 성 아래에 도착하여 그 서북쪽을 포위하니, 누선장군도 가서 모여 성 남쪽에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니, 수개월이 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두 장수는 서로 화합하지 못했다. 천자가 제남 태수(제남태수) 공손수(공손수)로 하여금 가서 정벌케 하니, 좌장군이 말하기를, “누선장군은 몇 번 기약하고도 모이지 않고, 게다가 조선과 더불어 함께 우리 군사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하니, 공손수가 그 말을 믿고서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그 군사를 병합하니, 천자가 공손수를 목베었다.

🌕 좌장군이 양쪽 군사를 병합하고 즉각 급히 조선을 치니, 조선상(조선상) 노인(로인)ㆍ한음(한음)ㆍ이계상(니계상) 참(참)ㆍ장군 왕겹(왕겹)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했으나 누선이 지금 구금되어 있고, 유독 좌장군이 더욱 급하게 공격하는데, 임금이 또 항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한음ㆍ왕겹ㆍ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길에서 죽었다.

🌕 원봉(원봉) 3년 계유(B.C108) 여름에 이계상(니계상) 참(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으나 왕검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성기)가 또 모반하여 한 나라를 공격하니, 좌장군이 투항해 온 우거의 아들 장(장)과 항복한 상로인(상로인)의 아들 최(최)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효유하고 성기를 잡아 죽이고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사군)으로 만들었다. 참을 봉하여 홰청후(홰청후)로 삼고, 한음을 적저후(적저후)로 삼으며, 왕겹은 평주후(평주후)로 삼고, 장을 기후(기후)로 삼으며, 최는 아비가 죽었으나 자못 공(공)이 있으므로 온양후(온양후)로 삼았다. 좌장군 순체는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한 데 연좌되어 목베어 저자에 버렸으며, 누선장군 양복은 마땅히 목베여야 하나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 위만은 한 나라 고조 병오년(B.C.195)에 일어나서 무제(무제) 계유년(B.C.108)에 이르렀으니, 88년 동안 3대를 전하였다.


예국(예국)

 


예(예)는 달리 예(예)ㆍ예(예)라고도 쓰며, 또한 예국(예국)이라고도 하고, 또 철국(철국)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지금의 강릉부(강릉부)이다.


지금 강릉부 동쪽에 예 시대에 쌓은 옛 성터가 있다. 신라 남해왕(남해왕) 때에 명주(명주)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인)을 얻어 바쳤다. 명주는 곧 강릉이다.

🌕 동이(동이)는 예의 도읍이다. 이(이)의 음은 이(이)이다. 《삼국사》


한 무제 원삭(원삭) 원년 계축(B.C.128)에 예의 임금 남여(남려) 등이 조선을 배반하고 요동으로 나아가 붙으니 28만 명이 투항하였다. 그 땅을 창해군(창해군)으로 만들었으나 3년 만에 군을 철폐하였다. 《한서》

🌕 남여(남려)와 우거가 항복해 왔다. 《후한서》

🌕 예는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옥저), 남으로 진한(진한)과 접경하고,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예와 옥저ㆍ고구려는 원래 모두 조선 땅인데 원봉 3년에 조선을 평정하고 예의 땅을 임둔군(림둔군)으로 만들었다. 《후한서》

🌕 신라의 북쪽 경계 명주(명주)는 옛날 예 나라 땅이다. 가탐(가탐)의 《고금군국지(고금군국지)》

🌕 건무(건무) 중에는 그 우두머리를 현후(현후)로 봉하였다. 세시 조공(세시조공)은 맥포(맥포)와 과하마(과하마 작은 말) 등이었다. 그 풍속이 자못 고구려와 같으나 사람의 성품은 우직하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었다. 의복 제도는 달랐고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으며 주옥(주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읍이나 촌락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벌로 사람이나 우마(우마)를 내놓게 하였다. 고구려가 여러 번 그 병력을 징발하여 한 나라 요동을 침략했고, 또 한 나라 군사를 따라 남으로 신라ㆍ백제를 쳤다. 《동문광고》

🌕 대대로 전하는 부여왕(부여왕)의 인문(인문)은 ‘예왕지인(예왕지인)’이라 하고, 또 부여의 장로(장로)는 스스로 ‘망인(망인)’이라 칭하였으니, 아마 부여가 남여(남려)의 유종(유종)인 듯 하다. 《동문광고》


《동국고기(동국고기)》에 부여국은 현도 북쪽 옛 예국에 있고, 그 인문(인문)을 예왕지인이라고 했으며,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예성)이라 한다. 남여는 곧 부여의 왕(왕)이니, 조선 경내에 있는 자가 아니다.


맥국(맥국)

 


맥국의 도읍은 지금의 춘천부(춘천부) 북쪽 13리의 소양강(소양강) 북쪽에 있었다.

🌕 처음과 끝을 상고할 수 없다.


신라 선덕왕(선덕왕) 6년 정유(637)에 우수주(우수주)를 설치하였다.

🌕 《고려사(고려사)》지리지(지리지)에, “춘주(춘주)는 원래 맥국이다.” 하였는데, 춘주는 지금의 춘천이다. 상서(상서) 무성(무성)에, “화하(화하)와 만맥(만맥)이 좇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고, 《맹자》에, 대맥(대맥)ㆍ소맥(소맥)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맥(맥)은 음이 맥(맥)이니, 북방 오랑캐의 나라이다. 북방은 땅이 차서 오곡(오곡)이 자라지 못하고, 오직 기장[서]이 자라는데 일찍 익는다. 무왕 때 기자를 조선에 봉하기 전에 이미 맥국이 있었고, 맹자 때에는 기자의 자손이 마땅히 조선을 지키고 있었을 것인데, 어찌 맥국이 그 사이에 낄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지리지에 또, “명주(명주)는 원래 예국이다.” 하였으니, 명주는 바로 오늘의 강릉부이다. 《운회(운회)》에, “예맥은 동이(동이)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고, 한무제 본기(한무제본기)의 예군 남여 주(예군남려주)에, “진한의 북쪽과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닿았다.” 하였으니, 예맥은 본래 한 나라인데,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일컬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물며 춘천과 강릉의 거리가 멀지 않고, 춘천은 영서(령서)에 있고 강릉은 영동(령동)에 있음에랴. 지리지에 또한, “고려 때에는 춘천이 교주도(교주도)에 속하고, 강릉이 동계(동계)에 속하며, 화주(화주)와 명주가 나누어 삭방(삭방)이 되었다.” 하였으나, 명주를 삭방이라 한 것이 석연치 않다. 《필원잡기》


화식전(화식전)에, “동으로 예맥ㆍ조선ㆍ진번(진번)이 이(리)를 잇는다.” 하였으니, 예맥과 조선이 경계는 이어졌으나 나라는 다른 것이다. 한 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그러했으니, 맹자 때에야 의심할 여지가 있겠는가. 예맥이 두 나라임은 또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옥저(동옥저 북옥저(북옥저)를 덧붙임)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대해(대해)를 끼고 자리잡았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어 사방 1천 리가 됨직하다. 북으로는 읍루(읍루)ㆍ부여와, 남으로는 예맥과 접경이며, 호구(호구)는 5천 가량이고, 대군장(대군장)이 없고 촌락에 각각 우두머리[추수]가 있다. 그 말은 고구려와 거의 같다. 《후한서》 《위서》

🌕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다. 《동사회강(동사회강)》

🌕 한 나라 초기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에 옥저가 예속되었다. 무제 원봉(원봉) 2년(B.C.109)에 조선 땅을 나누어 사군(사군)으로 하면서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이맥)의 침입을 받아 군(군)을 요동 지경인 고구려의 서북 땅으로 옮겼더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 고부(현토고부)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속해졌다. 한 나라에서 도정(도정)이 멀고 단대령(단대령) 동쪽에 있다는 이유로 나누어 동부도위(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불내성)을 수부(수부)로 하여 따로 영동(령동) 7현(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옥저도 현이 되었다.

🌕 광무제 6년(30)에 변방의 군(군)을 축소하니, 도위(도위)도 이로 말미암아 혁파되었다. 그 뒤에 모두 그 현 안의 토착 우두머리[거수]로 현후(현후)를 삼았는데, 불내(불내)ㆍ화려(화려)ㆍ옥저의 모든 현이 모두 후국(후국)이 되었다. 이적이 다시 서로 공벌(공벌)했지만, 오직 불내성 예후(예후)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조(공조)ㆍ주부(주부) 등의 관아를 설치하고 있는데, 모두 예국 백성이 맡고 있다. 옥저의 모든 읍락(읍락)의 우두머리는 모두 스스로를 삼로(삼로)라 칭했으니, 곧 옛 현국(현국)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아 대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고구려)에 산하로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다시 중대인(중대인)을 두어 사자(사자)로 삼아 거느리게 하고, 또 대가통(대가통)이 있어 그 조세(조세)를 책임지우니, 맥포(맥포)ㆍ어염(어염)ㆍ해산물을 천 리에서 메고 지고 운반하였으며, 또 미녀를 보내면 비첩(비첩)을 삼아 노복(노복)과 같이 대하였다.

🌕 그 토지가 기름지고 아름다웠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어 오곡에 적당하여 밭농사를 잘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이 질박하고 곧고 강하고 용맹하며 우마(우마)가 적어 창을 들고 보전(보전)을 잘했다. 음식과 주거ㆍ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나, 혼인 방식은 여자 나이가 10살이 되면 이미 약혼을 허락하여 시가에서 맞이하여 길러서 며느리로 삼되,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여자의 집에서 돈을 청구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사위에게 돌려 보낸다. 장사[장]에는 큰 나무 곽(곽)을 쓰는데, 길이가 10여 장(장)이나 되며, 곽의 한 머리를 터서 문을 만든다. 처음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체가 덮이도록 한다. 육체가 모두 썩으면 그제서야 뼈를 거두어 목곽(목곽) 속에 넣어 두는데, 온 집안이 모두 한 목곽을 함께 사용한다. 나무를 새겨서 살았을 때의 모습 같이 만들어 죽은 사람의 수대로 한다. 또 토기(토기)가 있어 그 안에 쌀을 담아 곽의 입구 가에 매달아 두었다.

🌕 관구검(관구검)이 고구려를 치니 왕 우위거(우위거 동천왕(동천왕))가 옥저로 달아나 드디어 군사를 몰아 공격하니 옥저의 읍락이 모두 격파되고, 3천여 급(급)의 목을 베니 왕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를 일명 치구루(치구루)라고 하였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 리가 되며,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와 더불어 접경하고 있는데, 읍루 사람이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북옥저가 두려워하여 여름에는 항상 산의 바위의 깊은 굴속에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촌락으로 내려가 살았다.

🌕 왕기(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 추격해 쳐서 그 동쪽 경계까지 도달하여, 그곳의 늙은이에게, “해외(해외)에 또 사람이 사는 지역이 있는가?” 물으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다가 풍파에 수십 일을 표류한 끝에 동쪽의 한 섬 가에 이르렀는데,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그곳 풍속에 7월에 동녀(동녀)를 취하여 바다에 던졌다. 또 한 나라가 있는데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일찍이 바다 한가운데서 떠오른 사람이 입는 옷과 같은 베옷 하나를 얻었는데, 그 두 소매 길이가 3장(장)이었다. 또 파선(파선) 한 척이 물결에 밀려 와 해안에 정박했는데, 이마 가운데에 또 얼굴이 있는 사람 한 명이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먹지 않아서 죽었다. 그 지역이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에 있다.” 하였다. 이상은 모두 《동문광고》이다.

🌕 고구려 태조왕(태조왕) 4년 병진(56)에 이르러 멸망당했다.

🌕 개마대산(개마대산)은 평양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이 곧 동옥저이다. 《일통지(일통지)》

🌕 평양 고적(평양고적)에, “수제(수제)가 고구려를 칠 때 좌 12군(좌십이군)이 개마(개마) 등 길로 나와 압록수(압록수)의 서쪽에서 모였다.” 하였고, 주(주)에, “개마는 현도군에 속하며, 개마대산이 있다.” 하였다. 《한서》에 “현도군 서쪽 개마현에 마자수(마자수)가 있다.” 하였으며, 《당서》에는, “마자수는 압록강이다.” 했고, 고려 임언(림언)의 《구성기(구성기)》에,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남쪽은 장주(장주)와 정주(정주) 두 주에 이르며, 서북은 개마산을 끼었다.”고 하였으니, 구성은 지금의 함경도에 속하며, 그 서북이 여진(녀진) 지방과 연했으니 평양의 지경이 아니다. 또 “수 나라 군사가 개마도로 나와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고 하니, 이 산이 아마 압록강 밖 서북 경계에 있은 듯하며, 고구려 전성시에는 요하(료하)에 걸쳐 있어 이 산이 국경 안에 있었을 것이다. 《여지승람》

🌕 《삼한회토기(삼한회토기)》에, “본국 산맥은 몽라골령(몽라골령)에서 시작하여 장령산(장령산)이 되고 두리산(두리산)이 되며, 두백산(두백산)이 되고 개마산이 되며, 그 아래가 동옥저이다.” 하였고, 또 “개마산맥이 휘돌아 철령(철령)이 되고, 그 서남 맥(맥)이 검지산(검지산)이 되며, 송악(송악)이 되었다.”고 하니, 지금의 함경ㆍ평안 두 도 사이에 영(령)의 등성마루가 수백 리 뻗쳐 있는 것이 곧 개마산이다. 임언의 기록에 의하면, 이른바 구성이 모두 지금의 함경남도에 있고, 장주와 정주 두 주는 지금 합하여 정평부(정평부)가 되었으며, 구성 땅이 3백 리에 불과하고 서북이 개마산에 끼어 있다고 하니,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현도군에 개마대산이 있다는 것과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다는 것으로 보면, 현도는 본래 동옥저의 땅이며, 지금의 함경도 개마산의 서북의 물이 압록강 상류가 되었으니, 이것을 또 알 수 있다. 수 양제(수양제)가 고구려를 칠 때에, 좌12군과 우군이 부여ㆍ낙랑ㆍ옥저ㆍ개마 등의 길로 나왔는데, 그때 요하를 건넌 것은 오직 9군뿐이니, 나머지는 원래 요하를 건너지 못하였다. 이른바, “어느 길로 해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여러 군사를 나누어 그 길로 나왔다는 것이지, 모두 그 길을 지나서 뒤에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는 것은 아니다. 과연 《여지승람》의 말과 같다면 낙랑과 옥저 길도 마땅히 압록강 서쪽에 있어야 하는가. 《반계수록》

🌕 개마 대산은 지금 어느 산인지 알 수가 없다. 《후한서(후한서)》 및 《통전(통전)》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고 했고, 임언의 《구성기》에는 구성 지방이 3백 리인데, 서북으로 개마산에 끼어 있다.”고 했는데, 옥저와 구성은 지금의 함경도이니, 이른바 개마산은 지금의 평안ㆍ함경 두 도의 경계에 대령(대령)으로 연이어 있다는 것은 의심이 없다. 《일통지(일통지)》에 실려 있는 조선 산천 조에, “개마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고, 그 동쪽이 옥저국이다.”한 것을 《승람》에서 이로 인하여 개마산을 평양 고적에 실었으니, 아마 잘못인 듯하다. 《풍암집화》


한사군(한사군)ㆍ이부(이부)

 


원봉(원봉) 3년 계유(B.C.108)에 조선 땅을 나누어 사군(사군)으로 만들었으니, 진번(진번)ㆍ임둔(림둔)ㆍ현도(현토)ㆍ낙랑(악랑)이다. 소제(소제) 때에 이르러 사군이 너무 멀다는 이유로 파하고, 요동(료동)으로 옮겨 이군(이군)을 두었으니 요동ㆍ현도이다. 그 후에 한 나라에서 동이(동이)의 모든 나라에 의복과 군악(군악), 광대와 음악을 내려줄 때에는 모두 현도군으로부터 받아 갔다. 《동문광고》

🌕 소제(소제) 시원(시원) 5년 기해(B.C. 82)에 평나(평나)ㆍ현도 등의 군을 평주도독부(평주도독부)로 삼고, 임둔ㆍ낙랑 등의 군을 동부도위부(동부도위부)로 삼았다. 《한서》 🌕 도독(도독)이란 이름은 당(당)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도독부라 한 것은 아마 기록한 사람의 잘못일 것이다.


이른바 평나는 바로 진번이고 평주도독부는 바로 현도군이다. 지형으로 논한다면, 소제가 이부(이부)를 설치할 때 이미 낙랑ㆍ임둔을 합하여 동부도위부로 만들었는데, 지금의 평양 동쪽과 강릉 서쪽의 땅은 진실로 이미 서로 접했고, 본부(본부)는 그 사이에 끼어 있어 평양과 매우 가까운 데, 또 어찌 한 나라 때에 평주부(평주부)가 될 수 있겠는가. 《반계수록》

🌕 소제 원봉(원봉) 원년 신축(B.C.80)에 현도가 이맥(이맥)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성을 고쳐 쌓았다. 또한 이부를 고쳐 이군으로 하였는데, 단대령(단대령) 동쪽에서부터 옥저ㆍ예맥이 모두 낙랑에 귀속되었다. 후에 강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령동) 7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했다. 《한서》


한백겸(한백겸)이 말하기를, “현도를 옮긴 뒤에 단대령 동쪽이 모두 낙랑에 속하자, 강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영동 7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건무(건무) 6년에 도위관(도위관)을 없애니, 마침내 영동 지방을 포기하고 모두 그 지역의 우두머리들을 현후(현후)로 봉하였다.” 하는데, 동이(동이)ㆍ불내(불내)ㆍ잠태(잠태)ㆍ화려(화려)ㆍ사두매(사두매)ㆍ전막(전막)ㆍ부조(부조) 등의 7현이 그것이다.

🌕 낙랑군은 본래 조선 땅이다. 군의 치소(치소)는 조선현에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평양이며 25현을 거느렸다. 《한지(한지 한서지리지(한서지리지))》에, “낙양(락양)과의 거리가 동북으로 5천 리이다.”고 하였다.

🌕 낙랑은 25현을 차지하였다. 《후한지(후한지)》에 의하면, 소제가 강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영동 7현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설치했다. 광무제(광무제) 건무 6년(30)에 도위관을 없애니, 영동 지역을 모두 버리고 다 그 지방의 우두머리들로 현후(현후)를 봉하였으며, 세시(세시)에 군(군)에 나아가 하례(하례)를 드리게 했다. 군에서 낙양과의 거리는 동북으로 5천 리며 18현을 거느렸다 하였으니, 대개 영동 7현을 버렸기 때문에 그 현의 수가 《반지(반지 《한지(한지)》)보다 적은 것이다. 《진지(진지 진서지리지(진서지리지)》에는, 낙랑군은 한이 설치하고 6현을 거느렸다고 하였으니, 대개 덜어서 병합한 차이가 있고, 또 이맥(이맥)의 침입을 받아 빼앗긴 것도 있으므로 그 수가 양한(량한 서한(서한)ㆍ동한(동한))보다 적은 것이다. 《자치통감(자치통감)》에, “진(진)의 민제(민제) 건흥(건흥) 원년(313)에 장통(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의 을불(을불)과 서로 침공하기를 여러 해를 계속하다가 장통이 얼마 후에 모용외(모용외)에게 돌아갔다.”고 하니, 낙랑 땅은 대개 이때에 고구려로 들어간 것이다. 또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서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고 하니, 이것은 별도로 요동에 설치하여 옛 칭호를 붙이기를 후세에 요령(료령 중앙에 있으면서 지방 장관의 직을 띠는 것)하는 예(례)와 같이 한 것이요, 한 나라의 옛 군은 아니다. 그 지역을 한 무제가 처음 개척할 때는 지금의 양서(량서)와 한북(한북) 지방이었고, 소제 이후에 옛 현도가 다스린 지역은 지금의 함경도이며, 임둔이 다스린 지역은 지금의 영동인데, 낙랑에 병합되었다. 광무제 이후로 영동 7현을 버렸으므로 살수(살수) 이북은 또한 고구려로 흡수되었다. 한 나라의 말기와 위 나라 초기에 또 나누어 대방군(대방군)을 설치했으며, 낙랑군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가, 장통에 이르러 고구려에게 핍박당하자 모용씨(모용씨)한테로 돌아가 버렸으니, 낙랑이란 이름은 이로부터 없어졌다. 《동사강목(동사강목)》

🌕 현도군의 치소는 혹 이르기를, “지금의 함흥에 있었으며, 동옥저성을 다스리다가 후에 이맥(이맥)의 침입을 당해 군이 고구려현 서북쪽으로 옮겨 가서 3현을 거느렸다.”고 한다. 《한지》에, “낙양과의 거리가 동북으로 4천 리이다.”고 했다.

🌕 현도는 동방 구이(구이)이다. 한 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정하면서 동옥저 지역을 현도군으로 했다. 《후한서(후한서)》 옥저전에는,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라 했으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당해 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했고, 예전(예전)에는, “소제(소제) 시원(시원) 5년(B.C.82)에 임둔ㆍ진번을 없애고 낙랑ㆍ현도와 병합했으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겼다.”고 하니, 이것을 보면 현도군의 치소는 처음에 옥저에 있다가 후에 고구려로 옮긴 것이다. 《한지》에, “현도군이 3현을 다스렸다.” 하고 《후한지》에는, “현도군은 낙양의 동북쪽 4천 리에 있으며, 6성(성)을 다스렸다.”고 했다. 역사에 비춰 상고하건대, 한 나라에서 위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어도 중국 땅이었다가, 진(진) 나라 때에 이르러 요동ㆍ현도가 모용씨에 귀속되어 고구려와 서로 침탈을 계속했으며, 진(진) 나라 효무제(효무제) 대원(대원)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ㆍ현도를 함락시켰더니 모용농(모용농)이 와서 두 군을 회복하였다. 안제(안제) 의희(의희) 원년(405)에 연왕(연왕) 희(희)가 와서 요동군을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두 군이 고구려에게 편입된 것은 이때이다. 《성경지(성경지)》에, “현도군이 많이 성경(성경) 동북방 및 영길주(영길주) 경계 내에 있었다.”고 하니, 이 설은 맞지만 또 해성(해성)ㆍ복주(부주)ㆍ봉황성(봉황성) 등지를 모두 한의 현도군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요동 18현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대개 낙랑 현도의 명칭은 서진(서진) 시대에 혹 지금의 요동으로 옮겨 설치한 것을 뒷사람이 다시 분간하지 못하고 마침내 사실로 여겨서 그러한 것인가. 현도의 땅은 진(진)이 망하고 당(당)으로 들어선 뒤에 발해(발해)의 대씨(대씨)에게 병합되었으며, 이로부터 여러 이(이)가 서로 빼앗다가 요(료)ㆍ금(금)을 지나서 지금에 이르러 중국에 속해졌다. 《동사강목》


🌕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동이현) 바로 지금의 강릉(강릉)이니, 옛 예국(예국)이다.에 있었으며, 거느린 현이 15개였다.

🌕 임둔은 《한서》에, “위만이 그 곁의 작은 고을인 진번ㆍ임둔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생긴 지는 오래된다. 무제가 사군을 설치할 때 임둔이 그 중 하나였으니, 대개 국(국)을 낮추어 군으로 만든 것이다. 신찬(신찬)의 주(주)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에 있으니, 장안(장안)에서 6천 1백 38리이며, 15현을 거느렸다.” 하였다. 또한 《후한서》에는, “소제가 임둔을 낙랑에 병합시키니, 단단대령(단단대령) 이동에서부터 동옥저와 예맥이 모두 낙랑에 귀속되었으며, 후에 강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 7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했다.” 하였다. 《한지(한지)》를 살펴보건대, 낙랑 25현이라는 것은 임둔의 속현(속현)을 합해서 말한 것이며, 7현을 나누어 동부(동부)에 귀속시켰으므로 《후한서》에는 낙랑현이 단지 18현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7현은 임둔 15현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고려사기지(고려사기지)》에, “명주(명주)는 본래 예국(예국)인데 한 무제 때에 임둔이 되었다.”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이니, 별호(별호)를 임둔ㆍ예국ㆍ창해군ㆍ동이라고 한다.” 하였다. 다시 《한서》를 살펴보면, 무제 원삭(원삭) 원년(B.C.128)에 예의 임금 남여(남려)가 남녀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내속(내속)하므로 그 땅을 창해군(창해군)으로 삼았다가 조금 뒤에 파했다고 하니, 이것은 사군을 정하기 20년 전이며, 임둔ㆍ예국이 모두 같은 때이다. 게다가 예의 인구가 28만에 이른다면, 그 땅이 작지 않다. 이로 말한다면 강릉 한 읍에 어찌 두 나라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 임둔을 이미 작은 고을이라 일컬었으니, 대개 부락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당시에는 예가 이미 한 나라에 항복했으니, 그 지역이 아울러 임둔에 속해 예군ㆍ동이현으로써 임둔의 치소가 된 것이다.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철령) 내외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한 줄기 산령(산령)이 그것이다. 《여지승람》에 대관령을 또한 대령(대령)이라 일컬었으니, 대게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이로 의거하여 말하면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강원도) 영동(령동) 지역이 모두 임둔의 소속이다. 《동사강목》

🌕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삽현) 지금의 요동 땅 에 있었으며, 영현(령현)이 15현 이었다. 관리를 요동에서 채용했다.

김윤(금륜)이 말하기를, “《한서(한서)》의 주에, ‘진번은 장안에서 7천 6백 리 떨어졌고,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38리 떨어졌다.’고 하였으니, 진번이 임둔보다 멀다면 우리나라 경계 안에 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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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958 오늘 그린 그림 책사풍후미나모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7.20 37 1
1746957 세계 100대 브랜드 순위. 대만 TSMC 어딨노? [1] 추적자(211.219) 21.07.20 58 1
1746956 카카오가CBDC시스템 제작 최종입찰 따냈네 ㄷㄷ ㅇㅇㅇ(39.118) 21.07.20 82 2
1746955 수송기 키워드가 발작 버튼이었나? ㅇㅇ(223.38) 21.07.20 31 3
1746954 탐정다중이 아이피에 닉에 손가락 바쁘겠네 [3] ㅍㅍ(39.7) 21.07.20 43 2
1746953 낯짝이 두꺼운 대만놈들. 혐한 죠낸 하면서 전쟁 나면 도와달래 추적자(211.219) 21.07.20 29 1
1746951 한국에서 살기엔 적당히 지능 낮은 편이 살기 편하고 좋은듯 [7] ㅇㅇ(222.110) 21.07.20 138 8
1746949 왜 한국과 일본을 욕하나 ㅇㅇ(122.128) 21.07.20 20 0
1746948 날죽일거면너도같이죽어 [1] MMMMMMMMM(79.110) 21.07.20 40 0
1746947 대만의 혐한 클라스 [2] 추적자(211.219) 21.07.20 46 2
1746945 혐한과 반일은 뿌리가 같다 ㅇㅇ(122.128) 21.07.20 29 0
1746942 625전부터 전방부대에 중국군이 배치되었다고 ㅇㅇ(122.128) 21.07.20 41 2
1746941 조선족들의 혐한 활동도 심각 추적자(211.219) 21.07.20 23 1
1746937 6·25 터지자 '북한군' 선봉 부대 돼 남침했던 '조선족 부대 [1] 추적자(211.219) 21.07.20 36 1
1746936 개새끼한테 무기쥐어줬더니 아주 개판으로 노네 ㅍㅍ(39.7) 21.07.20 36 0
1746934 마컨 자살 유도 헬조센 ㅇㅇ(89.187) 21.07.20 75 2
1746930 소울도그렇거 어스모도 그렇고 아이큐 90인듯 [1] ㅇㅇ(211.213) 21.07.20 135 12
1746928 조선족 화교들이 야갤 먹은게 확실하다 ㅇㅇ(223.38) 21.07.20 27 3
1746927 중화사상은 공산당이 만든거 아님? [15] ㅇㅇ(122.128) 21.07.20 6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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