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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혼란

유자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12 20:51:12
조회 861 추천 14 댓글 47

나는 과거 모 중견기업에 대졸신입으로 입사했다


선배님들과 다른 동료들의 기대를 받으며, 나도 나름의 꿈을 안고 회사를 잘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반갑지 않은 여러 사람들, 힘든 일, 부정함, 이상한 비밀이 만연한 곳으로


나는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아가고만 있을 뿐이었다


겉으론 동기와, 주변 직장동료들과 잘 지내며 회사에 적응해 가고 있는것 처럼 보였지만


마음 속에선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으로 어느새 나는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입사원들의 교육 일정이 잡히고


나와 동기는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장차 회사의 핵심인재가 될거라는 아주 거창한 기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산에 위치한 연수원으로 가게 되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버스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기분도 들었고, 교육이라 했지만 들뜬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덧 연수원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주변의 경치도 보며 이곳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찰나 교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곳이 놀러온 곳이 아니고 교육을 받으러 온 곳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려는듯


그들은 여러 주의사항이나 교육생들이 외워야 할 것에 대해 근엄하고 무서운 태도로 알려주었다

(그들의 말투나 분위기는 군대에 있을 때 겪었던 조교, 교관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외워야 할 것은 충성심이 있는 직장인이라면 으레 갖춰야 할 행동강령 같은 것으로,


주로 정서적인 욕구의 충족을 위한 말과 행동을 최소화 하고(일 외의 생각과 행동을 사전 차단하려는 시도),


회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계부품이 되는데 주저함이 없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문장이 몇 줄 적혀있었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듣기 좋은 명분이 참 많았지만 핵심은 그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외워야 했고 나중엔 교관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 소리를 지르며 행동강령을 모두 머리에 넣었음을 점검받아야 했다


자세는 몸을 정면에서 45도 정도로 비틀어 다리를 활짝 벌린 기마자세를 취한 다음 주먹을 쥐고 양팔을 90도로 굽혀 높이 쳐든다

(우리가 팔근육을 보여주려 할 때 취하는 자세)


이 자세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있는 힘껏 내질러 외운 행동강령을 꽥꽥 내지르면 된다


강연장에서 교관의 시범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기이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광기였는데, 당시에는 회사를 잘 다니고 싶었던 나로서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절차로


그것의 당위성에 대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가졌던 의문을 잠시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연수원의 커리큘럼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커리큘럼이라 해봤자 방금 말한 소리지르기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쨋든 나는 해냈다


원래 미친놈이라는 소릴 자주 들었었고, 이상하고 해괴한 장난을 치기 좋아했던 나로서는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자세로


소리를 지른다는 게 그렇게 체면이 상하는 일처럼 다가오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교의 시범이 끝나고 개인 연습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제일먼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부끄러운데, 마치 연수원에 있는 사람들 중 나의 노예 근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스스로 광고하는 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입된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충실히 해내는 당신의 노예가 바로 접니다." 하고


선배님들의 눈에 띄기 위해 발악하는 원숭이 한마리가 되기 위해 열심이었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회사에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 꿈에 대해 종이에 적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목표를 자영업이라 적은 선배님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육의 취지에 심각하게 어긋나기 때문에 선배는 주의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교관 앞에서 눈물의 똥꼬쑈를 마치기까지 힘든 과정이 많았다


길거리에 비맞은 개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외운 스크립트를 열심히 토해내는 시간(행동강령 말고도 외울 게 많았다.)

눈물을 질질 짜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교관에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며 거짓말을 한 시간(그때는 진심이었다.)

등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처음의 교관의 소리지르기 시범을 보고 느꼈던 기이함을 교육이 끝나도, 한참이 지나서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뭘까?


나는 왜 이상함을 느꼈던 걸까?


이유는 시간이 오래오래 지나서, 의외로 싱거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서 배운 말과 글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연수원에서 보여준 어떤 꼴사나운 굴종은 둘째로 치더라도, 더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철저하게 주입된 생각이었고 내 본질과 한참 빗나가 있는 것들이었다


조교는 행동강령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자신의 것인양


자신감 넘치게, 그리고 아주 기쁜 태도로 외쳤다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조교에게서 느꼈던 기이함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까지 꽥꽥 질러가며 할 수 있는 말들은 나의 말밖에는 없다


그런 우스꽝스럽고 번거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행동강령 쑈를 해야 했던 이유는 내 인생 대신 모 기업 회장의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


회사를 다니며 느꼈던 혼란과 모순은 이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젠 그 원인이 나에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창피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이제 웃으면서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나도 훗날 누군가처럼 나의 말과 뜻을 전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또 그렇게 돼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과거의 문제에서 벗어나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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