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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일본 누명촌
[요시다 이시마츠]1913년 8월 13일, 나고야시 치쿠사구의 길에서 누에고치 소매업을 운영하던 남성(31)이 강도살인을 당함. 그리고 바로 다음날, 범인들이 검거가 되었는데 범인들은 형을 가볍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건과 관련없는 요시다 이시마츠(34)를 공범으로 지목함.결국 이시마츠는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고문과 함께 거짓자백을 강요받았고, 이시마츠는 끝까지 거짓자백을 하지 않음. 그럼에도 이시마츠는 끝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고스게 형무소에 수감됨. 하지만 이시마츠는 끝까지 무죄를 부르짖으며 저항함.간수들은 그를 고깝게여겨 고문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시마츠가 끝까지 저항하는 통에 결국 악명높은 아바시리 형무소로 이감함. 하지만 여기서조차 이시마츠가 지치지않고 저항하자 결국 아바시리 형무소 측에서 아키타 형무소로 이시마츠를 이감시켜 버림.다행히도 이시마츠가 이감권 아키타 형무소의 소장은 이시마츠가 지속적으로 무죄를 주장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선 자체적으로 이시마츠의 사건을 재조사함. 그 결과 이시마츠가 사건과 전혀 무관함을 알게되자 이시마츠를 위해 가석방 조치를 해줌.아키타 형무소장의 도움을 받아 가석방된 이시마츠는 대법원 출입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본인에게 누명을 씌웠던 범인 2명이 5년 먼저 가석방되어 사이타마현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후 그들을 찾아가 본인에게 누명을 씌웠음을 인정하라 촉구함.범인들은 이시마츠의 지속된 요구 끝에 결국 이시마츠에게 누명을 씌웠음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작성함. 하지만 한번 내린 판결을 두번다시 바꾸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 사법부이기에 범인들의 사과문을 바탕으로 세 번째 재심을 청구했음에도 기각당하였음.전쟁 이후인 1952년, 이시마츠는 다시 언론과 변호사들에게 무죄를 호소하였고 1958년에는 법무대신과 면담까지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음. 하지만 이때 이시마츠를 상대한 법무부의 간부직원의 도움으로 일본 변호사 협회 인권홍보부를 소개받았음.일본 변호사 협회에서는 이시마츠의 호소를 듣고선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도움을 주기로 하였으며 이시마츠에게 도움을 주었던 대법원 출입 신문기자도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하며 여론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국회에서조차 사건을 주목하게됨.이러한 여론의 움직임으로 1960년, 이시마츠는 또 다시 재심청구를 하였고 나고야 고등법원 제 4부 재판관들은 재심사유를 인정하여 재심이 이루어지는 듯 하였으나 검찰 측에서의 이의제기로 나고야 고등법원 제 5부 재판관들이 재심청구를 기각함.이에 일본 변호사 협회가 특별상고하여 이시마츠의 재심청구는 대법원까지 올라감. 그리하여 1962년, 대법원에서는 나고야 고등법원의 재심청구 기각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선 사건을 다시 나고야 고등법원으로 되돌려보내며 재심이 성사되었음.[만세를 외치는 요시다 이시마츠]1963년 2월 28일, 나고야 고등법원에서 열린 이시마츠의 재심에서 사건에 대해 이시마츠의 알리바이가 성립하기에 최종적으로 이시마츠에게 무죄를 판결함. 그리고나서 재판관들은 선배 판사들의 오판을 사과하며 직접 이시마츠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함.이시마츠는 이후 부당하게 구금되어있던 21년 7개월 7일의 수금기간에 대해 1일당 400엔씩쳐서 도합 315만 5600엔(약 3천 1백만원)의 국가배상금을 수령하였지만 무죄를 받기까지 걸린 50년동안의 오른 물가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배상금을 받았음.[실제 요시다 이시마츠의 묘]무죄 판결을 받고난 이후 이시마츠는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져 무죄 판결로부터 9개월이 지난 그해 12월 1일, 노쇠와 폐렴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하였음. 도치기현에 있는 이시마츠의 무덤에는 ‘인권의 신, 여기에 잠들다’라는 비석이 세워져있음. [시리즈] 일본일본 사건촌 · 일본일본 시작촌 · 일본일본 재명촌 - 1 · 일본일본 재명촌 - 2 · 일본일본 담요촌 · 일본일본 최초촌 · 일본일본 시골촌
작성자 : 기시다_후미오고정닉
일본일본 시골촌
1926년 8월 20일, 치바현 카토리군 쿠가촌의 방물가게에서 일하던 케이라는 여성이 살해된채 발견되었음. 게다가 케이의 내연남과 가게주인도 똑같이 사망하였으며 범인과 실랑이를 벌였던 케이의 할머니는 중상까지 입는 등 마을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짐.[범인 이와부치 쿠마지로]범인은 1892년생 이와부치 쿠마지로(34)였으며 도주하던 중, 추격하던 경관을 공격하여 중상을 입히기도함. 이런 쿠마지로의 무지막지한 행동으로 세간에서 쿠마지로는 이름의 쿠마(熊)를 따서 오니쿠마(鬼熊)라 불리게 되었음. 이후 쿠마지로는 잠적함.국가차원에서 경찰과 소방대, 마을 청년단 등 무려 5만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쿠마지로를 찾기위한 대대적인 수사를 하였지만 난항을 겪음. 왜냐하면 마을사람들이 쿠마지로를 숨겨주거나 수사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수사에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었음.이렇게 마을사람들이 쿠마지로를 숨겨주었던 이유는 평소 쿠마지로의 성품 때문이었음. 쿠마지로는 마부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평소 씀씀이도 좋았고 약자를 보면 발벗고 나서 돕는 등 인정많은 성품이었기에 마을사람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고있었음.하지만 이렇게 완벽해보이는 쿠마지로의 여성편력에는 문제가 있었음. 그리고 여자 문제로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함. 이런 상황 속에서 쿠마지로는 케이와 알게 되었고 가까워졌는데, 케이라는 여성은 바람기가 심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여성이었음.주변인들은 모두 반대하였지만 쿠마지로는 신경쓰지않고 만남을 지속함. 그러다가 케이에게 호감을 품고있는 또 다른 남성을 알게됨. 쿠마지로는 해당 남성이 케이를 포기하게끔하려다가 지인이 케이와 다른 남자를 이어주려 쿠마지로를 경찰에 고소함.3개월 후에 쿠마지로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케이를 만나러갔다가 진상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었음. 마을사람들이 이런 쿠마지로를 아무란 이유없이 숨겨주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일본 경찰의 인식은 바닥을 기어기고 있었음.당시 어느정도로 일본 경찰의 인식이 나빠졌냐하면, 쿠마지로가 범행 이후 경찰관을 한명 더 습격하여 살해했음에도 쿠마지로를 동정하고 응원히는 여론잋주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해당 사건을 소재로 ‘오니쿠마의 미친 사랑 노래’라는 곡까지 만들어졌음.이렇게 한달간 도피생활을 하던 쿠마지로는 1926년 9월 30일, 가문의 묘지로 도망쳤고 그 곳에서 취재차 찾아온 신문기자들과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독이 든 모나카를 먹고 면도칼로 자살함. 그리하여 쿠마지로 1개월 하고도 10일의 도피생활은 막을 내림.사건의 영향으로 작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쿠가촌에 언론 관계자와 같은 외지인들이 하나둘씩 몰려오자 상점이나 여관을 운영하던 마을사람들은 쿠마지로 덕분에 먹고 산다며 연쇄살인마인 쿠마지로에게 감사를 표하였다는 씁쓸한 뒷이야기도 있다함. [시리즈] 일본일본 사건촌 · 일본일본 시작촌 · 일본일본 재명촌 - 1 · 일본일본 재명촌 - 2 · 일본일본 담요촌 · 일본일본 최초촌
작성자 : 기시다_후미오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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