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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은비 상플) 스무살 공태광 이은비 2

ㅈㄷㄷ(61.77) 2015.06.22 02:36:11
조회 4450 추천 96 댓글 28


06. 오늘 그댈 본다면 기나긴 아픔의 이유를 알겠죠




고은별, 네 동생 여기. 그럼 간다. 


은비를 은별에게 넘겨주고는 바람처럼 쌩하니 사라져 버린 태광이었다. 피로만 쌓았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이안을 겨우 달래놓고 집에 들어왔더니, 축 늘어진 쌍둥이 여동생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은별이 이마를 짚으며 있는 힘껏 은비를 쇼파 위로 옮겨놓고는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한 잔 마시고 뻗을 고은비가 아니었다.


역시나 은비가 엉망으로 풀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 동생인지 이제는 술 취한 연기도 할 줄 알았다. 은별은 이걸 좋아해야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지라 엄마가 깨기 전에 다급히 은비를 방으로 이끌었다. 은비 샤워한다고 거짓말 했는데 들키면 끝이었다. 은비는 은별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방으로 들어왔다. 스파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고 문을 닫은 은별이 은비를 추궁했다.

 


“무슨 얘기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듣기만 했어.”

“뭐? 그럼?! 야!! 헙.”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던 입을 틀어막고 기가 막힌 얼굴을 한 은별이었다. 은비가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태광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왜 전화 안 받냐.’, ‘네가 만날 사람 목록에 왜 나는 없냐.’, ‘정말 10분도 내줄 시간이 없냐.’ 하고 쏘아 붙이려고 손목을 잡은 거였다. 그러나 태광은 오히려 그럴수록 입을 굳게 다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비를 피하고 싶어서 무던히 노력중인 게 너무 티가 났으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고 취한 척을 했는데, 운이 좋게 태광이 넘어갔다.



“야? 고은비! 너 그냥 잘 거야?”

“응. 언니, 나 졸려. 내일 얘기해!”

“야?! 너 진짜!!!”

“엄마 깬다, 언니야.”

“무슨 얘기 했냐니까?!”



은별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은비가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서 거울로 보이는 제 얼굴을 매만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게, 태광은 술 때문인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광이 무심하게 내뱉던 예쁘다는 말이 은비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언니, 근데 있잖아. 태광이 하나도 안 변했어.

나 듣기만 했는데도 이제 알 것 같아. 공태광이 연락 안하는 게 왜 그렇게 속상했었는지.






07. 티가 나나 봐, 다 보이나 봐





또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 태광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고은별, 장난하냐?”

“넌 내가 하면 다 장난으로 보이냐?”



만나자마자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은별과 태광을 보며 은비가 웃었다. 또 은비의 맞은편 자리는 피하고, 싫어죽는 은별의 앞에 자리 잡은 태광이었다. 간밤에 태광의 속마음을 엿들은 은비는 더 이상 속상하지 않았다. 태광이 은별에게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은별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태광이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씨. 야, 돈 갚는다며 그래서 나온 거 아냐.”

“아아, 맞다.”

“맞다-아? 그냥 안 받는다는 걸 굳이 줄 거라고 찝찝하다고 전화로 떽떽거려 놓고.”

“나 돈 없어. 그리고 나 지금 가봐야 돼.”

“야, 계좌로 부쳐. 간다.”



곧장 일어서서 나가려는 태광의 옷 뒷덜미를 잡아챈 은별이었다. 은비가 깜짝 놀라 만류하려 손을 뻗었지만, 태광은 이미 켁켁대며 끌려오는 중이었다. 은비는 누구 언니인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태광이 인상을 팍 쓰고 은별을 노려보다, 이내 은비의 시선에 애꿎은 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진짜 예전부터 좋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제일 잘했다. 그거 하나는 공태광이 일인자라고, 은비가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맨날 어딜 가, 가기는.”

“약속 있다고!!!”

“너 나 좀 그만 귀찮게 해라. 난 너 마음에 안 드니까.”

“나도 마찬가지거든?!!!”

“은비 전화 왜 씹는데.”



여유롭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화를 식히려 물을 마시던 태광이 그대로 은비의 얼굴에 물을 뿜어버렸다. 야!!! 은별이 손이 태광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것을 간신히 제지한 은비가 당황한 낯으로 은별을 바라봤다. 그렇게 당사자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해버릴 줄은 몰랐다. 역시 직구하면 고은별인데, 잠시 망각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은비였다.



“내가 왜 널 귀찮게 불러내겠냐.”

“...피한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아, 아무튼 아니거든!!!!”



은비와 태광을 번갈아보던 은별이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관여하는 거였다. 이후로는 고은비가 어떤 애교를 부려도 넘어가지 않으리! 굳게 다짐하는 은별이었다. 난감해하는 태광과 은비를 두고 은별이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은비가 다급하게 은별의 손목을 잡았지만 조심스레 빼내고는 웃어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은비 너의 큐피트가 아니라고.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카페를 벗어난 은별이 읊조렸다.



“공태광, 여전히 한심해.”



태광의 태도는 누가 봐도 다 티가 날 정도였다. 탁 트인 유리창 안으로 어색한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은별은 문득 몇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안과 은별도 서로 말하지 못한 응어리들 때문에 멀어졌었던 적이 있었다. 은비가 그 때의 고은별을 닮진 않았기를 바라며, 은별이 자리를 떴다.



“한이안한테 전화나 해볼까...”






08. 누구보다 솔직한 나의 맘을 따를 거야






대체 그놈의 벽은 왜 쳐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야. 공태광.”

“...”

“공태광.”

“...”

“고-옹, 태-에, 과-앙.”

“왜, 왜, 왜!”



은비가 앞에 놓인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술 마시고 다닌다고 걱정하던 사람은 어딜 가고 한껏 아무것도 안한 ‘척’으로 중무장한 태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은비가 웃었다. 괜히 모질게 굴고 일부러 겉포장 열심히 하는 거 다 보였다. 이미 열여덟의 공태광이 자기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또라이인 척을 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당연히 지금처럼 이렇게 각 잡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고.



“한국 와서 만날 사람 있다고 했잖아.”

“...어.”

“그거 누군지 물어봐도 돼?”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줘도 되고, 라고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그건 은비의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은비를 비롯한 친구들이 아니라면 태광이 한국 와서 만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은비의 질문에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태광이 시계를 들여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사람 만나러 가야해서 간다.”

“야! 공태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는 태광을 쫓기 위해 은비가 곧장 따라나섰다. 큰 보폭의 태광을 부지런히 따라잡았다. 버스정류장에 멈추고 나서야 은비를 알아챈 태광이 인상을 썼다. 햇볕이 참 강하지? 은비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디 가냐고 다섯 번을 넘게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침묵시위 중이었다. 은비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버스를 타는 태광을 따라 은비도 탑승했다. 급하게 타는 바람에 미처 버스카드를 꺼내지 못한 은비가 카드기 앞에서 가방을 뒤지고 있자, 앞서 가던 태광이 뒤돌아왔다.



“아저씨, 한명 더요.”



별 거 아니라는 듯 유유히 좌석으로 가앉는 태광을 보며 은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태광의 앞좌석에 앉아 은비가 뒤를 돌았다. 은비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던 건지, 깜짝 놀라 급하게 시선처리를 하는 태광이었다. 이럴 거면서. 그 행동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게 느껴졌다. 서로 타인에게 말 못할 마음의 있는 얘기를 공유할 정도로 우린 가까웠었는데, 지금의 태광은 왜 자꾸 멀어지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여전히 좋아하면서, 어째서 열여덟의 공태광처럼 다가와주지 않는 걸까.



“너 지금 뭐 듣고 있어?”



은비의 말이라도 피해보자는 식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는 태광에게서 은비가 그것을 낚아챘다. 태광이 은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젖히고는 말했다.



“앞이나 봐, 다쳐.”

“너 지금 나 걱정하는 거지?”

“허...”

“야, 공태광. 너 솔직히 말해봐.”

“뭘.”



그래도 기분이 좀 풀렸는지 조금씩 입이 트이는 태광이 반가운 은비였다.



“너 사실 집에 가는 거지? 만날 사람 같은 거 없지?”

“..아, 아니거든!!!”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야. 됐어. 내가 너랑 왜 놀아.”

“이거 너네 집 가는 버스 아냐?”



태광이 뜨끔한 듯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은비는 아예 대놓고 태광의 얼굴을 감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친다니까. 은비의 관심을 멀리해보려고 태광은 노력했지만, 은비는 그런 태광의 노력을 보란 듯이 배신하며 굳건한 자세를 취했다. 태광이 한숨을 푹 쉬더니, 급기야 하차 버튼을 눌렀다. 어어??? 은비가 갑작스런 상황에 얼이 빠진 사이 태광이 버스에서 내렸다.




“아저씨!! 아저씨!! 잠시만!!! 내릴게요!!!!!”





09. 그랬나봐, 나 널 좋아하나봐






버스가 출발 직전 상태였기 때문에 은비는 무사히 태광이 내린 곳에서 하차할 수 있었다. 벌써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태광의 뒷모습이 괘씸해 보인 은비가 크게 소리쳤다.



“공태광!!!!”



햇빛에 눈이 부신지 태광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멈춰서 은비를 돌아봤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됐지만 은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제 네가 기억하는 예전의 이은비는 없어. 더 이상 소극적이고 부끄럼타고 겁이 많던 소녀가 아니었다. 지금은 네 도움이 없어도 의사표현 똑바로 할 수 있거든? 은비가 먼저 한걸음을 떼어 태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점점 좁혀지는 간격에 부담을 느낀 태광이 은비를 멈춰 세웠다.



“잠, 잠깐...!! 그만 쫓아오고 집에나 가라.”

“공태광, 너 이러는 거 되게 안 어울리거든?”

“이은비, 장난 그만하자.”

“장난이 아니라 너 따라하는 건데?”

“...날?”

“너도 예전에 나 쫓아다녔잖아.”

“허?”



진지한 눈빛으로 은비가 태광을 응시했다.



“왜 따라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별로 안 궁금하거든.”

“내가...”

“안 궁금하다니깐?!!”



아, 아, 아. 

귀를 틀어막으며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상황을 벗어나려는 때, 은비의 한 마디가 태광의 발목을 붙잡았다.



“너 좋아하니까.”

“...”

“그래서 너랑 똑같아지나봐.”

“...”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나 피하고 거부해도...”

“...”

“그래도 니가 좋아, 난.”



마침내 마음 속 모든 응어리가 풀어진 은비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이대로 터져서 죽어버리면 어쩌지. 태광은 침착하게 굳어있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빨리 벗어나야해. 이은비 옆에만 있으면 가뜩이나 제어가 되지 않던 심장이 오늘은 크게도 말썽을 부렸다.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얘기였는데, 마냥 좋다고 받아들이기엔 태광에겐 상처가 생각보다 많았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풀려갈 때, 남은 것이 없었던 태광에게 그나마 주어진 건 이것뿐이라 생각해서 홀연히 한국을 떠날 수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라는 건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은비도 기다렸지만 원했던 만큼은 다가오지 않았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 그들이 정한 위치에서 태광을 머무르게 했었다.


너는 친구 하자고 했지만, 나는 죽어도 친구가 될 수 없었는데.



“사실 한국에 있는 동안 너 되게 심심하지? 혼자 있고 싶지 않지? 난 다 알아!!!”



이은비가 목이 터져라 소리친다. 저러다 성대라도 상할까봐 걱정이 됐다.



“공태광! 내일 세강고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

“...”

“너 올 때까지!!!”



태광이 뛰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은비가 안 보이는 코너에 들어서서 무릎을 짚고 숨을 들이 쉬었다. 언제 저렇게 겁이 없어졌는지, 창피하지도 않은지 크게도 질러대던 은비의 말이 머릿속 안에 가득 찼다. 이은비가 이젠 내가 좋다고 한다. 정말일까? 의심부터 하게 되는 상황이 싫었다. 그럼에도 아까부터 올라간 태광의 광대와 입 꼬리는 계속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비가 내가 좋대. 더는 친구가 아니래. 태광이 들뜬 마음에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사실은 말이야.



“내일 가야 돼? 말아야 돼? 또 호구 되는 거 아니야?!”



그 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 알아채는 건 은비 너 하나라서,



“이은비...진짜..너, 진짜로...”



아직도 니가 좋아,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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