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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Of Love -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27 18:25:19
조회 169 추천 12 댓글 1


미안해, 오해하고 있는거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오래전 고향 친구야. 여름 휴가철에 오래만에 놀러왔다고 해서 잠깐 만났던거니까 화 풀어줘. 연락 좀 받아. 만나서 설명해줄게. 그러면 훨씬 더 이해할 수 있을거야. 제발 부탁해 엘사.


엘사는 한스에게서 온 구구절절한 장문의 메시지들을 휘적휘적 넘기다 꺼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열 번쯤 쌓일 때는수신 거부를 했다. 개새기! 엘사는 핸드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깨질듯이 엎어 던졌다.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 원래부터 질 떨어지는 양아치 같다생각했고 처음부터마음도 없었다. 얄랑한 자존심에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한스네 웨스턴가드 가문과 잘 되기를 원하는건 부모님의 마음이지 엘사의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한스와의 반년 남짓도 안되는 짧은 만남은 항상 올곧고 바른 모범생 이미지였던 엘사의 입에서 욕까지 하게 만들 정도로 성격 파탄자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엘사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회의적이고 환멸을 느낀다. 요즘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견디기 어려운지 매사가 불만이었다.


겉으로는 부자집의 똑 부러지고 아리따운 장녀로 지내지만 그 사실 자체가 원흉이다! 지금도 대낮의 점심인데도 무슨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왔는지 복잡하고 시끄럽기만 하다. 엘사는 자연스럽게 2층으로 방을 옮겼었고, 얼마 안가완전히 구석탱이에 있는 복도 끝의 가장자리 방으로 도망쳤다. 엘사의 방은 충분히 넓었다. 다른 집의 거실만한 크기가 엘사의 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집에서 오가는 동선이라고는 부엌, 계단, 복도, 방의 정해진 장소 뿐이라 엘사는 마치 감옥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속에서 본 교도소 생활이 딱 이렇다. 시간이나 요일 별로 해야 할 수 있는 일이나 장소가 정해진 것.


엘사는 자신이 이중인격자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실 입에서 험한 말도 할 줄 알고 화도 낼 수 있고 공부도 안 해버리고 놀고 싶지만 밖에서는 완전히 다른 엘사가 튀어나온다. 그 위장 인격질 흉내를 내기 싫어서 염증이 나는데도 할 일이 없으면 엘사는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봤다. 엘사가 사는 이곳 노스에이라는 여름 겨울이 분명하고 1년의 절반은 따뜻하고 더워지다가 1년의 절반은 서늘하고 추운 곳이었다. 산과 계곡이 마을 전체를 두르고 있고 조금만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금방 해안가도 나오고 절벽 길을 따라 굴곡진 언덕 위의 하얀색 대리석 팬트하우스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유한 인간들인지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움푹 패인 산골사이의 분지에는 그냥 저냥의 중하류층의 평범한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인생에 지나치게 성공해서 자기 잘난 맛에 살며 복잡한 세상에서 탈출한 인생들이거나, 아니면 그 현대 사회의 경쟁에 도태되어 더 이상 경쟁력이 없는 실패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사가 창 밖으로 동네를 볼 때 그나마 흥미로운 일이 생기는건 픽업 트럭과 승용차 한 대가 마을로 들어올 때였다. 마을 외곽은 비포장 도로였기에 흙먼지를 잔뜩 내며 털털거리는 황토빛의 트럭은 딱 봐도 좋지 않은 승차감일거 같았다. 트럭 뒤편에 실린 짐도 별로 대단할 건 없어보였다. 트럭은 마을 외곽을 선회해 들어갔고 한 눈에 봐도 낡아빠진 옛날에 문을 닫은 주점 건물 앞에 멈춰섰다. 저 자리는 이미 폐업한 바가 있던 곳인데. 엘사는 곧 이어 승용차에서 내리는 한 남녀를 지켜봤다. 운전석에서는 노란 머리의 덩치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내렸고 조수석에서는 붉으스름한 머리의 여리여리한 소녀가 내렸다. 멀리서만 봐도 소녀는 뭔가 기분이 뚱하다는게 확 느껴졌다. 걸음걸이라던가 시큰둥한 반응들. 소녀는 앞선 픽업 트럭에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더니 운전 기사와 대화를 나눈다. 이삿짐을 옮긴 사례금 계산을 하나 보다. 그 사이에 먼저 내린 남자는 트럭의 적재함을 열고 있다.


'뭐야, 별것도 없었네.'


엘사는 그냥 눈길을 돌렸다. 뻔하지. 이곳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흘러들어온다. 그중에 저 새로 이사 온 남녀는 분명 뭔가 석연찮게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생 끝에 이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부류였다. 적어도 이 노스에이라의 토박이로 자라 벌써 20년 가까이 살아가는 엘사가 진단하기에 말이다. 그래도 엘사는 몇 분간 시간을 죽여준 그 광경이 고맙다. 이 다음 식사 자리는 진짜 최악일거 같거든.


"엘사! 엘사 위에 있니?"


엘사는 나름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감상에 젖은 적막을 깨는 어머니의 고함 소리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엘사는 창문 앞에서 내려 와 침대 위레 털썩 주저 앉으며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엘사 나름대로 착한 인격을 꺼내는 의식이다.


"내려와서 함께 식사하자. 혼자서 뭐하고 있는거야? 문 좀 열어보렴."


"나갈게요."


오랜 경험을 토대로 엘사는 이런 상황에 침묵을 지키거나 혹은 그냥 싫다고 말하면 더 짜증나거나 복잡해지는 상황이 뒤따른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해버리고 그 자리에 가서는 당장 떠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는게 효과적이면 더 효과적이지.


"한스도 와 있어. 얼른 준비하고 나오렴."


엘사의 방 앞까지 왔던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리고 한스라는 소리에 엘사는 구긴 인상을 더욱 팍 구겨버렸다.


"시발!"




노스에이라.


이곳에 처음 발을 들어서면서 느낀 첫 감상은 진짜 별거 없는 구린 시골이라는게 안나의 느낌이었다. 복잡한 도심가라던가 5층 이상의 건물도 없었고 도로는 하나 같이 자갈이거나 흙길에 그 옆으로 잔디와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있었다. 유유자적하게 자연 경관을 즐기거나 복잡한 관광지를 떠나 휴양하며 여유롭기는 딱이겠지만 그건 어디에서 살든지 모자람 없이 부유한 사람들의 시선일거고 안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심심하고 지루하며 앞으로 인생은 벌써 눈에 질려버린 이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늙어 죽어갈 것이라는 저주스러운 곳이었다.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옆에 있는 크리스토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망해버린 비참한 밑바닥 인생에 지쳐버려서 되려 초연해졌다. 그들을 달래주는 건 막무가내로 하는 지금 당장의 일이다. 예를 들면 지금 크리스토프는 운전만 하면 되는거고 안나는 담배나 하나 피고 있으면 될 뿐이다. 두 사람은 한 때 나름 애정도 있었다. 서로가 안식처가 될거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의 로멘스.......로멘스도 너무 유려하고 착각일 뿐이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각자의 인생에 햇빛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안나는 자신이 등처먹었던 바보 같은 얼간이들에게 쫓겨다녔다. 크리스토프 역시 온갖 빚쟁이들과 건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깽판을 치려고 안달이었다. 그 생활에 로멘스가 낄 틈은없었다. 이제는 그저 서로가 서로를 떠나버리면 정말로 남은 선택지라고는 끔직한 결말이 될 거 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서로 연계해 위기를 빠져나가는 노하우와 호흡도 생긴 덕이지만. 안나는 이제 익숙한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곧 붙일 예정이다.


"이제 여기서 똑바로 살아볼거야."


"그러든가."


크리스토프는 낡아 빠진 건물 앞에서 트럭을 멈추고 말했다. 내부는 예전에 있던 바 테이블이나 맥주 서스펜서, 다양한 높낮이의 선반들이 있었다. 그 위층은 보금자리라고 하기 어설픈낡아 빠진 방이 있었고. 트럭에 가득 실린 증류주와 리규르 따위를 내리는 동안 안나는 거미줄 쳐진 바에 들어가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리 도움 필요해?"


"내부만. 여기 조명도."


"청소만 해놔."


크리스토프 역시 일말의 감정도 없이 트럭 한켠에 처박힌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툭 던졌다. 안나는 그걸 주워들고 구석, 구석과 가구 밑에 붙은 거미줄들부터 쳐내고 바닥을 쓸었다. 한 번 쓸 때마다 먼지가 팍팍 올라와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이럴게 아니라 그냥 양동이에 물을 받아다 시원하게 흩뿌려야겠군. 안나는 낡은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갔고 한쪽 구석이 찌그러진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아무곳으로나 마구 던졌다. 약간 누리끼리한 먼지 덮인 회색 바닥이 물을 맞자 진한 갈색의 원래 색깔을 드러낸다. 그렇게 하니까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 Bar Sol de Verano


먼지를 쓸어낸 바 테이블 위쪽에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전 가게의 이름이었나? 안나는 스페인어에 일자무식이었지만 이 정도는 알았다. '여름의 태양' 이름 참 볼 품 없이 지었네. 안나는 문득 서머즈라는 자신의 성을 떠올렸다. 평소에도 촌스러운 이름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거지 같은 동네의 거지 같은 바의 이름이 겹치니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왜냐고? 안나의 인생은 거지 같으니까!


이유 없이 화가 차오른 안나는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다 핀 담배를 물에 절은 바닥에 던져 비벼꺼버리고 대걸레를 하키채 마냥 잡아 문밖으로 파악! 처버렸다.


- 서머즈 1점! 팀의 역전 골을 만들어 냅니다! -


혼자서 하키 경기의 흥분한 중계진 말투를 따라해본다. 망할 역전은 무슨 역전? 좆까!!!!





할 일 없는 안나에게는유일한 취미가 있다. 바로 싸구려 중고샵에서 건진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노스에이라의 거칠거 없는 도로를 막무가내로 달리는 것이다. 도로는 불편했지만 경치는 끝내줬고 마침 여름 날의 날씨도 시원한 스쿠터 바람과 잘 어울렸다. 복잡한 번화가에서 신호등이나 사람, 자동차 따위에 거슬릴 일도 없는 아우토반 그 자체! 자갈길이나 움푹 패인 비포장 도로라서 승차감은 아우토반 같지 않겠지만 뭐 어때? 바로 오른편으로는 수평선 짙은 해안가가 보였고 이내 급경사를 타며 숲 길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가 외곽 도로로 나오면 막힌 숨이 탁 트였다.


크리스토프와 오픈하기로 했던 바는 오전은 일이 없다. 삼류 커피나 만드는 카페 흉내를 내지만 조각 케이크라던가 색깔부터 앙증맞은 달콤한 마카롱 그딴건 없다. 손님도 어느정도 감당할만큼 왔고. 어차피 상관없으려나. 이 시골에서 돈 쓸 곳이 뭐가 있겠다고. 솔 데 베레노는 이름과 달리 해가 지고 이상야릇한 형광 LED조명이 켜지고 나서야 훨씬 괜찮은 곳이다. 그러니까 해가 뜬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거다. 안나는 노스에이라의 마을에서는 꽤 떨어진 한적한 곳까지 와서 절벽 해안길에 멈췄다. 도로를 구분하기 위해 세워진 목재 울타리도 썩어서 군데군데 무너졌지만 안나가 몸을 기대놓고 경치 구경할 정도는 버텨줬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어서 편하다. 누구는 바다를 보면 온갖 감성에 젖어서 헛소리 하기 쉽겠지만 안나는파도가 바위에 철썩이는 광경과 소리를 따라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문득 안나는 자기 감정이 이런 바다를 보면서 일반적인 감성도 느끼지 못하고 비관적일 정도로 닳고 닳아 무뎌졌구나는 생각을 했다. 안나는 이제 막 19살인 자신의 나이에 비해 지쳐버린 삶이 괴롭고 비루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하면 그냥 말하고 싶지 않다. 못 배운 망나니 집에서 태어났고, 도망쳤고, 길바닥. 다음은 비슷한 또래의 애들끼리 뭉쳐서 온갖 잡다한 짓을 해보고, 도망치고, 잡히고, 얻어 터지고, 다시 도망치고......그렇게 아는 것도 없이 멍청하게 이것 저것 범죄에 노출되다가, 지금은 이 꼴이니까.


어딘가의 흔한 클리셰. 소설이나 비극의 여주인공들이 겪는 그런 뻔한 스토리다. 물론 절대로 그런 클리셰처럼 흔해 빠지고 지루하지 않다. 낭만적인건 더더욱 아니고. 음지의 배움속에서 손에 남은 건 이것뿐이라 합리적인 담배를 핀다. 마약 따위에 비하면 가격도 그렇고, 구하기도 쉽고, 후유증이 있지도 않으니까. 안나는 익숙하게 담배갑을 튕겨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고는 반대손으로는 어느새 지포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고 있었다.


쓰으으읍- 푸우우우우..............


안나는 바닷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담배 연기와 이후에 남은 달콤쌉싸름한 냄새에 취했다.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리지만 정리하지 않는다. 뭐 어때, 그냥 이렇게 있지. 망할, 바닷바람이 너무 쎄서 머리카락이 담배 끝에 걸린다. 적당히만 정리해서 고개 뒤로 넘겼다.


걱정되는건 한 가지 있다.


이대로 끝나버릴 인생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이 기다릴까?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만 슬슬 보인다. 평생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구렁텅이에 처박혀 온 몸에 흙먼지와 오물을 뒤집어 쓰며 살아갈 밑바닥의 인생이. 안나는 멀쩡히 서 있는 자신의 싸구려 스쿠터를 쳐다봤다. 저것 마저 사기꾼에게 당한거지만 그런거치고 꽤 든든하게 안나의 곁을 지켜줬다. 이따금 말썽이 있긴 하지. 여하튼 안나의 인생은 저 스쿠터와 같으리라. 애초에 볼품 없는 싸구려 가게에 먼지를 쓰고 있었고. 언젠가는 완전히 고장이 나서 멈춰버리면 버려질 그런 운명.


"돌아갈까."


안나는 슬쩍 시계를 한 번 봤다. 오후 4시. 슬슬 돌아가야지. 볼 일 없는 인생이지만 그나마의 보금자리로 말이다.




엘사는 어제밤 한스에게 확실히 이별통보를 했다. 아니 그건 일종의 선언에 가까웠다. 다시는 너 같은 쓰레기는 안 만날거고 다시는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 말라는 명확히 선을 긋는 선언. 한스의 구질구질한 변명거리나 핑계는 듣기도 싫었다. 그런데 하다 못해 부모님 앞에 버젓히 나타나서는 당당히 집으로 오다니!? 엘사는 얼마 전 식사 자리가 끝나고 2층의 자기 방으로 다시 도망쳤다. 당연히 식사 자리는 조금 어색해졌는지 한스가 따라왔다. 순간적으로 엘사는 머리가 휙 돌아서 다시 숨겨진 인성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입씨름을 했다. 그런데도 뻔뻔스러운 모습에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스는 늘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 한스는 어느 여자라도 좋아할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빠짐없이 가지고 있다. 외모, 집안 배경, 몸에 배어 있는거 같은 매너라던가 그런 것들. 한꺼풀 벗겨보면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이지. 엘사는 진작부터 알아보고 있었다. 부잣집끼리의 정략 결혼 같은거나 다름 없는 소개이후로 한스와 잘 지내는 연극을 해야했고 한스가 다른여자랑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명분도 확실해져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엘사는 시원함과 함께 한 편으로는 자기가 한스 때문에 고생한 마음 앓이와 감정 소모에 대한 보상은 밋밋한거 같아서 답답한 마음이 같이 있었다.


정말 응어리처럼 남은건 한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더 이상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엘사의 마음이 떠나버렸다는걸 느꼈는지 그때부터 한스는 치졸하고 찌질하게 매달리기보다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그리고 엘사를 향해 더 만나봤자 뭐하겠냐는 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런 반응이자 엘사는 아주 처음 잠깐 동안은 그래도 한스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풀어가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 화가 났었다. 눈물까지 날거 같았지만 그건 너무 추할거 같아서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끅끅 눌러대느라 한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었다. 한스는 어차피 엘사의 보수적인 태도와 고정적인 성 관념에도 질려 있었고 그런것들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돌아섰다. 엘사는 그런 태도에 수치심까지 느꼈었고 결국 방에 들어와 울다가 잠 들었다.


엘사는 곧 대학을 가기 위해 이곳을 떠날 것이었다. 이 시골에서 지방 유지로 살면서도 충분히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은 엘사가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라고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보기를 원했으니까. 그건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이 끝나면 그렇게 될 것이고 그때가 오면 엘사가 원하던 것과, 엘사를 자극시킬 것들이 있겠지? 반대로 한스 같은 쓰레기들도 넘쳐나겠고 어쩌면 한스는 양반이었다고 할지도. 엘사에게 올 여름은 정말 길었다.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


엘사는 한적한 자신의 고향 땅을 산책하는걸 좋아했다. 이곳에서는 간단한 피크닉 바구니에 책 한 권만 들고 떠나 어디로 가든지 멋진 풍경과 산들바람이 반겨주는 낭만적인 장소가 기다린다. 그래도 엘사는 가급적 사람이 더 없을 곳까지 걸었다. 그러다가 마을 입구로 가는 덜렁이는 표지판에 1km라고 써진 지점을 지나고 슬슬 다리가 아파서 저려올 쯤 멈췄다.


해안길을 따라 걷다가 꺾어서 언덕배기를 올랐고 탁 트인 도로 옆의 양떼 목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까지는 그냥 이곳에서 지낼 것이다. 잡생각도 잊고, 응어리진 마음도 풀어버리고, 책 속에서 뭔가 재밌는 장면을 보면서 그걸 상상하면서 그렇게.......


이게 엘사가 노스에이라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극이었으니까.




"시발 진짜!"


안나는 돌아올려고 올라탔을 때부터 어딘지 상태가 이상한 자신의 스쿠터가 급격하게 들썩일 때마다 욕지거리를 뱉었다. 단순히 길바닥 상태 때문이 아니라 스쿠터 차체가 흔들거리고 기괴한 엔진음이 나쁜 예감이 들게 한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제발! 엔진만 꺼지지 말아라.....엔진만! 안나는 멈췄다 갔다를 반복하고 속도가 들쭉 날쭉하더니 시동이 꺼질락 말락하며 위태로운 자신의 스쿠터를 보면서 기도했고 정비를 해도 해도 엉망인 꼴에 진절머리가 났다. 마을까지 돌아가기에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만약에라도 스쿠터 엔진이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그 무거운 짐짝을 질질 끌며 가려면 꽤 고될 것이다. 이건 자전거 따위처럼 가볍지도 않다고!


병 약하고 낡은 베스파 스쿠터가 견디려면 도로라도 깔끔해야 할 건데. 하필 안나는 온갖 험한 비포장 도로도 달리던 참이었다. 겨우 겨우 그나마 잘 닦인 포장도로가 나왔고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은 표지판과 외곽 양떼 목장을 지날 쯤 안나는 그래도 이 멍청이가 주인에게 보답을 해주겠거니 싶어서 욕한걸 사과하려던 참이었다.


"어, 어? 왜 그래. 제발,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안나는 아무리 오른쪽 손잡이의 엑셀을 돌려도 올라가지 않고 줄어들기만 하는 속도와 찌는 태양 아래에 치솟을대로 치솟은 엔진 수온계를 보면서 절규했다. 급기야 옆에서 뛰는게 더 빠를 정도로 속도가 줄어서 두 발로 균형을 맞출 때쯤 이내 털털거리다가 푸시시식하며 식은 소리를 내는 스쿠터는 결국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고 안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멍청하고 덜떨어진 크리스토프 같은 스쿠터가 쓰러지지 않게 버텨야 했다.


"으으으...... 왜에에!!!!!! 왜 너까지 그러는거야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러냐고!"


안나는 방금전까지 짜증나는 자기 인생에 대한 비관으로 지칠대로 지쳤고 세상 모든게 안 좋게만 보이고 있었다. 그런던참에 결국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고 풀 곳은 애꿎은 스쿠터 뿐이었다. 결국 안나는 화를 주체 못 하고 스쿠터를 팍! 밀쳐서 한쪽 수풀진 비탈길에 밀어버린채 스쿠터를 아무렇게나 발로 밟아댔다. 자랑은 아니지만 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맞아보기도 많이 맞아봤다. 그 장면들이 떠올라서 자기도 막무가내로 발길질을 해댈 뿐이다. 한 십여 차례 발길질을 해댔을까? 금방 제 풀에 지쳐버린 안나는 자기도 그냥 거기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지친다. 다른 말 필요 없이 지친다고.


고물 스쿠터를 매번 수리하는 것도. 늘 최악의 사태를 맞이해야 하는 자신의 인생도. 집까지 최소한 1km 떨어져 멀기만 한 시골짝 마을까지도. 안나는 이제 두 개비 남은 담배나 피웠다. 엎드려서 슬슬 해가 지는 주홍빛 하늘을 보며. 안나는 담배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그냥 끝나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머즈라는 이름에는 아마 햇빛이 지고 인생에 노을이 걸려 황혼 때가 되면 본인도 죽을거란 저주서린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풍경이 딱 좋다.


"저기."


"왁! 뭐야!"


그렇게 한참 담배를 태우며 거의 다 피워갔고 부질없는 소망과 달리 죽을 용기도 없는데다 담배처럼 지금 당장 끝나버리지도 않을 자신의 인생에 할 수 없이 또 한 번 정면으로 해쳐갈려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안나의 머리 위로 불쑥 들어온 그림자와 귀에 딱 꼿히는 목소리에 안나는 호들갑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요? 아까 막 소리를 지르다가 쓰러지길래 깜작 놀라서 달려왔어요."


"뭐, 뭐야 넌?"


안나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 둬서는 안된다.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절대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 안 됐다. 그게 안나의 방식이었다. 자세히 보니 꽤 곱상하게 차려입은 여자 아이였다. 제대로 세탁하지도 않은 반팔 티셔츠와 스쿠터를 타고 달리면 추울까 짚업 후드티 하나를 걸친 안나에 비해서 깔끔한 장식의 원피스에 악세사리도 다양하게 걸치고 있는. 그리고 안나는 이렇게 부티나는 인간들은 더더욱 경계했다.


"아, 혹시 얼마전에 이사 오지 않았어요? 솔 데 베레노의 바 자리에."


"그걸 어떻게 아는데?"


"반가워요. 엘사에요. 이곳에는 새로운 사람이 오면 금방 알아보거든요. 동네가 좁아서."


"나는 그딴거 전혀 모르거든."


"주홍색 픽업 트럭 타고 왔잖아요. 인사나 해요."


엘사는 손바닥을 쭉 펴서 내보였다. 위압감이나 그런 불손한 의도는 안 보이는 착한 손길이었다. 안나는 인상 찌푸리고 경계심을 세우면서도 일단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까지 하얗고 고와서 투박한 안나의 손과는 달리 너무부드러웠다.안나는 이 엘사라는 여자아이의 손은 자기가 조금만 힘을 주면 푸삭-! 하고 으스러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스쿠터가 고장났나요?"


"맞아."


"같이 걸어가요. 마침 저도 집으로 갈려 했던 참인데."


엘사는 자기가 나서서 쓰러진 안나의 베스파 스쿠터를 일으켜 세웠다. 동작이 워낙 어리숙해 보이는게 스쿠터 같은건 전혀 타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경사진 비탈에 엎어진 스쿠터의 꽤 무거운 무게에 놀랐는지 자기가 그 힘에 휩쓸려 어리둥절해 하는 엘사를 보며 안나는 눈을 한 바퀴 빙글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비켜 있어." 엘사를 밀치고 대신한 안나는 금방 스쿠터를 안정적이게 세우고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어 밖으로 비탈 밖으로 빼냇다. 엘사는 무안한지 자기 팔을 쓰다듬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피크닉 가방을 챙겨들었다.


"혹시 이거라도 드실래요?"


"뭔데?"


"제가 만든 샌드위치인데. 목 마르다면 와인도 있고 물도 있어요."


"하나 줘봐."


안나는 엘사가 건네는 바게트 빵에 포개진 샌드위치 하나를 우걱대며 걸었다. 엘사는 그 옆에서 보조하며 안나가 샌드위치를 먹고나자 금방 와인 한 병을 병째로 건넸다. 엘사가 많이 마셔서 절반만남았지만 안나는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그걸 집어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엘사는 안나에게서는 조금 특이한 감정을 느꼈다. 또래의 여자아이 같지 않은 터프함이랄까? 쉽게 만나기 힘든 우악스러움. 흡사 남자 아이들, 아니 어른들이라고 해도 이렇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그냥 받기만 뭐 한데. 너도 하나 필래?"


안나는 빈 병을 돌려주고나서 멋쩍게 주머니를 뒤지다가 마지막 한 개비가 들어 있는 담배갑을 내밀었다. 그러자 엘사는 사색이 되어 손사레를 친다.


"하긴 이런건 안하겠지."


안나는 엘사의 곱상한 얼굴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다. 이건 그냥 안나딴의 농담이였지만 진지하게 받아넘기는 것도 그럴줄 알았고.


"이름이 어떻게 되요?"


"안나, 안나 서머즈."


"서머즈요?"


"왜? 너도 그게 웃겨? 실컷 비웃어."


"아니요. 전혀."


"촌스러운 이름이긴 해. 서머즈라니. 그냥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 이름인가봐."


"요즘 같은 날에는 정말 잘 어울리는걸요."


안나는 와인을 다 마셔버리고 당연스럽게 다시 엘사에게 건넸다. 엘사가 거절한 김에 입가심으로 마지막 담배를 물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원래 존댓말만 쓰는 성격이야?"


"아직 잘 모르는 사이니까요."


"그래? 근데 불쑥 다가와서 샌드위치도 주고, 와인도 반 보틀 주고, 이렇게 겁도 없이 함께 가도 되는거야? 내가 갑자기 너를 납치해버리거나 강도질을 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같은 노스에이라에 사는 이웃사촌일게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강도인들.....어쩌겠어요 신경 안 써요."


"속도 편하다. 막상 강도 만나면 울먹대면서 어쩔줄 모를거면서."


"그럼 안나는 만나보셨어요?"


"한두번이겠어? 내가 그 강도였는데. 아무튼 됐고 이제부터는편하게 말해. 난 그런거 엄청 싫어. 괜히 따지고 어쩌고 잘 알지도 못 하지만."


"그래요? 그럼 편하게......."


"편하게."


"그래, 안나."


"응."


자기도 모르게 존칭으로 가고 그걸 눈치주듯 자르고 들어온 안나 때문에 엘사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볼수록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안나는 힘이 딸리는지 가끔 한쪽씩 손을 탁탁 털면서도 스쿠터를 꽉 붙잡았다.


"목장에서 일해?"


"아니, 혼자 산책길이야."


"여유로워서 좋겠다."


"요즘 안 좋은 일이 있거든."


"퍽이나. 나만 하겠어?"


"글쎄, 원래 이 동네는 각자만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 그런 고민 하나씩 있는 셈이라 생각해."


"넌 척 봐도 부잣집 아가씨인데 무슨 고민이 있는데?"


"사람 문제."

"왜? 너가 좋아하는사람이 알고 봤더니 쓰레기였어?"


"어....."


엘사의 흠칫하는 모습에 안나는 덩달아 흠칫했다. 툭 찔러본게 맞는 말이었을려나.


'아아, 아무튼 됐고 그런건 빨리 잊어버려 어차피 네 주변에 쓰레기라고 해봐야 다 잘 나가는 부자들일건데. 쓰레기면 어때 나는 돈 많은 쓰레기는 환영이야."


"푸흡. 돈 많은 쓰레기가 뭔데?"


"뭐든지!"


흠칫하던 엘사는 금방 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가 돌아왔다. font-family: "Malgun Gothic", "맑은 고딕", AppleGothic, sans-serif;">함께 얘기하면서 걸으니까 금방 마을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안나는 몇 개의 대화에서 금방 엘사에 대해 알아차렸다. 굳이 안나식으로 해석하자면 엘사는 멋 모르는 순둥이였다. 나이는 안나보다 많아 보였지만 세상 살이에서는 한참 뒤쳐져 있는? 안나는 엘사의 고민이 별거 아니라 치부했다. 사람 문제? 망할! 나는 크리스토프가 옆에서 살고 있는데 그보다 심한 사람 문제가 있겠어? 하지만 그렇게 자세히는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이고 금방 노스에이라에 도착했으니까. 다만 마을 입구의 갈림길에서 엘사는 언덕 위를 따라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윗길로 가야했고 안나는 분지로 내려가는 아랫길 앞으로 살짝 몸을 틀어 갈라졌다.


"나는 이 위에 살아. 올라가자마자 푸른 지붕이 있는 집이야."


"안 궁금해."


"너는 바에서 일하는거야?"


"놀러오려면 와. 술 마실거 같지 않지만."


"나도 술좋아해. 솔 데 베레노가 닫아서 내심 아쉬웠거든. 이전 주인은 인상이 나쁘지만 친절한 아저씨였어. 너도 그래 보이네. 그 가게 특징인가봐."


안나는 갈림길에서 헤어지기 전에 엘사를 다시 위아래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나 알려줄래? 놀러오기 전에 연락해. 지금은 멍청한 녀석이 주인장이라 내가 근무 안 하고 있을 때 걔랑 놀면 심심할거야."


"그럴까."


애둘러 핑계 댈거 같던 예상과 달리 엘사는 금방 자기 번호를 눌러서 안나에게 돌려줬다. 번호 저장 화면에 '엘사 아렌델:)' 이라는 이모티콘까지 적어서.


"잘 가 안나. 다음에 꼭 놀러갈게."


"응."


엘사는 익숙하게 언덕 윗길로 올라갔다. 안나는 그런 뒷모습을 몇 초 바라보다가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라 그나마 스쿠터를 끌고 가기 편할거라 생각하며 언덕 아랫길로 내려갔다. 망할 스쿠터.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맡겨야지. 이번에 안 고쳐지면 넌 끝장이다 멍청한 베스파 자식아!




안나의 일은 바 테이블 안에서 제대로 계량하지 않은 막무가내 식으로 칵테일을 섞는게 주 업무였다. 계산은 전부 선불제다. 파는 거는 온통 술 천지. 맥주, 스피릿츠, 칵테일. 담배를 팔기도 한다. 이 시골 바닥에서는 술집도 귀한지 아니면 단순히 할 일이 없으니까 술집에 모이는건지 저녁 쯤에는 제법 사람들이 차 있었다. 안나는 바 안에 높다란 의자를 하나 두고 일이 없으면 거기에 앉아서 자리를 지켰다. 크리스토프는 밖에서 베스파 스쿠터를 손 보는 중이다. 그걸로 또 한 차례 서로 푸닥거리를 한 직후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매번 스쿠터를 고장내냐고 성토했고 안나는과속해본게 전부라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그러면 크리스토프는 조금 과속이 아니라 스치면 튕겨 날아갈 정도로 달리니까 엔진이 못 버티는거 아니냐며 다시 스쿠터 살 여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고 안나는 그게 너무 거슬렸다. 내가 지금 스쿠터 하나 새로 사자고 이러는줄 알아? 이 망할 새기야!!!!


하지만 서로 씩씩대면서도 거기까지다. 크리스토프는 하는 수 없이 수리를 하러 나갔고 안나는 바를 지킨다.


"진 토닉 하나."


안나는 새로 온 손님의 주문에 별 다른 인사나 환영의 멘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음악도 없어?"


"원하는거라도 있으면 그걸 틀게."


"음, 오아시스의 Super sonic. 마침 진 토닉이니까."


안나는 속으로 '병신.'이라고 욕했다. 나름대로 자기 딴에 주문에 어울리는 센스 있는 선곡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도 최소한의 서비스로 안나는 핸드폰을 낡은 엠프에 연결해서 Super sonic을 검색해 틀었다. 계산으로 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잔금을 받고 대충 섞은 진과 토닉에 무성의하게 레몬을 툭 던져서 교환한다. 사운드가 살짝 깨진 웅장한 일렉기타 전주가 흐르고 노래를 따라서 손님은 자기 무리로 돌아가서 안나를 흘끔거린다. 이 불친절한 바에 다시는 오지 말자고 하는건지. 아니면 오히려 그 매력에 반해버렸을련지. 안나는 언제나 자기를 주시하는 시선은 놓치지 않고 의식하고 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테이블 밑에 숨겨둔 호신용 스턴건이나 야구방망이를 꺼낼 준비가 되어 있다.


스쳐 지나가는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으며 안나는 핸드폰을 다시 바라봤다. 내심 엘사가 떠올라서 연락이 왔나 확인해본다. 안나는 망상을 잘하는 편이다. 처음에 집 밖을 도망쳐 나왔을 때는 뭔가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성공하는 망상을 했었고 또래 아이들끼리 모인 가출 집단에서는 크게 한 탕 성공해가며 최고의 범죄 사기극이 펼쳐지는 스릴러 영화 같은 인생을 망상했다. 그런 파란만장한 드라마는 없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지금 흐르는 Super sonic의 노래 가사는 어딘지 안나에게 잘 맞물리는 느낌이 든다. 물론 초음속을 느꼈다기에는 하루 만에 박살 나버린 스쿠터와 함께 끝장 났지만 나름 안나를 재밌게 할만한 사람을 만난거 같다. 그 사람 사인 대신 연락처도 알았고. 하지만 역시나 엘사에게서 메시지는 잠잠했다.


'망할 그럼 그렇지.'


안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시계나 바라봤다. 빨리 하루를 정리하고 늘어지게 잠이나 잤으면 한다. 오늘 하루 너무 열을 내서 피곤하기도 하고. 안나는 자기도 진 한 잔을 들이키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제 주문은 안 받을거니까 다 꺼지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직 주문되지?"


"늬에엡."


안나는 팍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했다. 엘사는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의 복장으로 안나 앞에 서 있었다. 낮에는 하늘한 드레스차림으로 완전히 부자집의 지체있는 아가씨 같더니 이번에는 청바지에 깔끔한 면티만 입은채였다. 엘사는 바 선반의 천장에 붙은 메뉴판들을 훑어가며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에 놀러 온다는게 바로 오늘이었어?"


"상관없잖아. 바로 언덕 아래인데. 지금 노래 혹시오아시스인가?"


"손님 신청곡이야."


"이 노래 좋아해. 여기 가사에 나오는걸로 시킬까? 주문은 진 토닉. 나도 슈퍼소닉인지 뭔지 느껴보게."


"하아, 취향 진짜 저렴들하네. 저렴한 동네라 그런가."


안나는 아까 전에 속으로 병신이라 욕한 남자 손님과 똑같은 센스로 주문하는 엘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차마 엘사에게는 또 병신이라 욕하지는 않는다. 대신 뭐가 웃겨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체 전세계가약속이나 한 것일까? Super sonic에 가사에진과 토닉을 달라는 말이 있다는 것만으로 전부 진 토닉을 시키자고. 엘사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내자 안나는 와인이랑 샌드위치 값이니 내지 말라고 하고는 잘 쓰지 않는 계량컵으로 정확히 계량했다.


"아까 슬쩍 봤을 때는 대충 만드는거 같았는데."


"감으로 하는거지. 감으로 해도 정확해. 하지만특별 손님한테는 조금 신경써줘."


"내가 특별 손님이야?"


"이 싸구려 동네에서 안면 튼건 처음이니까."


엘사는 베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답하며 안나는마지막으로 포옹- 하고 집게로 집은 레몬 슬라이스를 넣어서 엘사에게 내밀었다.


"부잣집 아가씨가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뭐라고 안해?"


"그래서 걱정이야. 사실 통금 시간이 거의 다 됐거든."


"그 나이에 통금."


"농담이지. 하지만 걱정은 하실거야. 으음, 실력이 나쁘지 않은데?"


엘사는 진 토닉을 크게 삼켰다. 곱상한 아가씨 주제 술은 거리낌 없이 삼키는걸 보고 안나는 조금 놀랬다. 단번에 절반 가까이를 물 마시듯 넘긴 엘사는 잔에 들어 있는 레몬을 꺼내 살짝 즙을 짜넣는다. 그 모습이한 두번 마셔본 적이 아니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자연스러워서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뭐가 웃겨?"


"생각보다 말술이라서."


"말술이라고!"


"더 마실 수 있으면 서비스 해줄게."


"나야 좋지. 여기 있는 진은 네가 마시던거야?"


"하나 따라줘."


엘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지 바 앞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나가 드르륵하고 미는 술병을 잡아든 엘사는 안나의 잔에도 넉넉하게 채웠다.


"나는 브릿팝을 좋아해. 너무 매니악하게 말고 유명한 밴드들만.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


"글쎄. 노래가 낄 틈이 없이 살아서."


"다룰 줄 아는 악기는?"


"기타만 조금. 잘 치는건 아니고 흉내만."


"기타? 정말이야? 우리 집에도 기타가 하나 있긴 하거든. 근데 손이 너무 아파서 못 하겠더라고. 피아노 같지 않아서 포기했던 참인데 나도 알려줄 수 있어?"


"귀족 아가씨 손에는 무리야."


안나는 다시금 엘사의 손을 흘끗거렸다. 정말 곱게 생긴 하얀 손이었다. 이제 보니 엘사는 자기 키처럼 손가락도 늘씬하게 빠져서 피아노라는 이미지에도 잘 어울렸다. 특유의 부잣집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귀티도 그랬고.


"다음에는 우리 집에 초대할게. 재밌을거야."


"다음이 또 언제인데."


"아마도 내일?"


안나는 푸흡-! 하며 웃다가 사레가 걸려 기침했다. 엘사는 다음에, 다음에 하며 넘기는 예의치레만 하는 아가씨는 아닌거 같다. 생각보다........터프하네. 엘사는 다음 입에 진 토닉을 끝장낼 생각인지 안나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안나는 기꺼히 그 건배를 받는다. 안나는 기분 좋게 치잉-하고 울리는 청명한 잔 소리에서 왠지 모를 속 시원함을 느꼈다.


마치 이건 서로 친구가 되자는 약속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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