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갤문학#1 배트모빌 하나만 그려줘요

히갤문학#2 내전 한편

1973년에 있던 일이다. 내가 국방부 장관이 된지 얼마 안 되어 파리에 평화조약을 맺으러 갔을 때다. 회담 전날에 기분을 좀 풀기 위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건너편 탁자에 예쁜 금발의 서양 아가씨가 있었다. 말을 걸어보니 우리나라 말도 할 줄 알았다. 예쁘기까지 해서 방으로 데려간 뒤, "쇼 미 모어, 베이비... 클로스 오프?"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뜸을 들이는 것이다.

"좀 빨리 벗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여자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어? 기다리기 싫으면 딴 여자 데려와.”

대단히 무뚝뚝한 여자였다.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잘 벗어나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잠자코 천천히 벗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벗나 했더니, 속옷이 보일 듯 하니 들었다 놨다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엔 그냥 내려도 될 거 같은데 자꾸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인제 못 기다리겠으니 확 벗겨버리겠다고 해도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따라놓은 쟈니 워커가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벗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가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볼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벗는다는 거요? 아가씨, 외고집이구먼. 쟈니 워커 다 식는다니까.”

아가씨는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마셔. 난 안 가.”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쟈니 워커는 이미 틀린 거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벗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늦어진다니까.”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벗었던 윗도리를 각 잡아 개어 놓고 태연스럽게 내 쟈니 워커를 마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쟈니 워커 잔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발을 들어 내 목젖을 짓눌렀다.

갑자기 숨이 막히게 된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해서 남자친구가 생길 턱이 없다. 남자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가지고 도도하기만 하다. 성도덕(性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아가씨다.' 생각할 수록 화증이 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서 보니 여자는 이미 가고 없었다. 시퍼렇긴 했지만 멋들어진 몸매가 기억나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아가씨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회담장에 들어온 볼리바 박사에게 그 여자 얘기를 해줬더니 능력이 특이하다고 야단이다. 여태까지 인체실험했던 뮤턴트들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아가씨가 별로 쓸모있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볼리바 박사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변신 능력을 로봇에 적용하면 어떤 상황에도 대응하는 로봇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아가씨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중략)

나는 그 아가씨를 찾아가서 쟈니 워커에 베트남 정통음식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담이 끝나는 길로 그 아가씨를 찾았다. 그러나 그 아가씨가 앉은 자리에는 핏자국만이 있었다. 왠 남자한테 쫓겨 도망갔다는 것이다. 나는 아가씨가 있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할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귀국했더니 고향의 아가씨들이 나를 맞았다. 그 아가씨의 파란 피부가 생각이 났다. 백인 여자를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베트남에 백인이 왔다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문득 파리에서 본 옷 벗던 아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