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솟아나는 활자가 없길래 고민을 좀 했다.

가지고 있던 화보를 쭉 훑으며 해사하던 소년이 명료한 남자가 되는 것을 기껍게 보았는데

이 이상의 문장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새 드라마들을 보자니 저 고운 수컷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감내하는 꼴을 보고있기 버거울 것 같았고

새 영화를 보자니 저 고운 수컷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해버리는 꼴을 보고있기 버거울 것 같았다.

비집고 나오려는 활자가 없어서 정이 식었나 생각했더니 그저 너무 고와서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기념하고자 수염을 깎아보기로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신선한 면상으로! 가열찬 검열삭제의 활자를 뿜으려는 준비 차원으로 보면 되겠다.

그런데 설레는 손길로 덥수룩하고 걸리적거릴 코 아래 수염부터 확 없애버렸더니

어디서 많이 본 누군가가 떠오르는 심란한 몰골이 되는지라 대신 찻잎을 붙여보기로 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거침없고 풍성한 검열삭제의 활자를 바라는 마음으로 찻잎을 늘려봤더니

망태기 들고 잠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단 위에 잘빠진 고운 수컷을 올려놓고 신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디오니소스 축일을 기다리는 열기라면 모를까 새해를 맞이하는 형상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 따져봤다. 대체 뭘 바라서 이러고 있나?

성불은 안 돤다. 그건 포기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매체와 장르 특성이라 억지로 수긍하는 수 밖에 없다.

대신 찻잎도 가끔 우리고, 폭주하는 자신감으로 활자도 좀 싸지르고, 검열삭제도 좀 많이 하고, 똧밥마다 신나게 주워모으고.

그래서 수염 대신 찻잎을 매달고, 자신있게 수선화를 꽂고, 목욕권 보장을 위한 죽창을 들고, 똧밥수집용 자금을 쌓아보았다.

전투력이 폭증한 느낌이다. 안 싸워도 다들 피해줄 것 같다.

묘하게 안정감 있다. 솔직히 제법 만족스럽다.

언젠가 수선화도 죽창도 팽개치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날이 오겠지만 확실히 아직은 아니다.

서로가 제일 곱지는 않은 날이 오더라도 이 마음과 기억이 남아 꽤 오래도록 고울 것이다.

쏟아내는 활자가 없어도 마음은 같이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반품은 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