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인트>의 주인공 홍설 김고은이라는 배우가 소화하고 있는 홍설은 분명 탁월하지만, 이 드라마 속 '홍설'은 본래 웹툰이 가지고 있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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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신성록 분), <나쁜 녀석들>의 이정문(박해진 분), 그리고 남궁민이란 배우가 연기한 <냄새를 보는 소녀>의 권재희, 그리고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남규만까지. 이들은 모두 '사이코패스'란 공통점을 가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드라마에서 더는 '사이코패스'란 병리학적 용어가 낯설지 않게 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 사이코패스는 현재 방영 중인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남규만처럼 선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의 진원지로 등장한다. 물론 <나쁜 녀석들>의 이정문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는, 범죄물의 주인공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설명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란 말처럼, 보통 사람의 수준을 벗어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 더 나아가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악 혹은 악 주변의 인물이었던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을 괴롭히는 자리에서 주인공의 자리로 주소 이전을 했다. 바로 <치즈인더트랩>(아래 <치인트>)의 유정 선배다. 박해진이 연기하는 유정은 역시나 그가 연기했던 <나쁜 녀석들>의 이정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지 다르다면 그 모호한 가치관의 세계와 뛰어난 두뇌를 범죄자를 잡는 대신 '사랑' 전선에 활용한다는 것뿐이다.

<치인트>가 화제가 된 것은 이른바 '선배'의 대명사로 회자하였던 '만찢남' 유정을 드라마로 구현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2016년의 청춘 현실에서 공감할 만한, '청춘 병리학'을 드라마화했기 때문이다. <치인트>는 어린 시절부터 재벌인 아버지의 방기로 인해 정신적 가치관을 상실한 유정이란 인물은 물론, 그와 사랑에 빠지는 홍설(김고은 분), 백인하(이성경분), 오영곤(지영호 분), 손민수(윤지원 분) 등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살아가며 한 번쯤은 만나볼 법한 이들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중심은 유정과 홍설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아무리 '노오력' 해도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청춘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치인트>, 2016년 병리학적 청춘 보고서

▲ <치인트>의 유정 사이코패스는 그저 여러 매력 중의 하나로 꼽힐 '스펙'을 위한 설정이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 <치인트>에서 유정이 사이코패스라는 건 별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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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스토커, 편집증 이런 병리학적 증상을 품은 젊은이들이 왜 당대성을 띠는 걸까? 한병철의 저작 <심리 정치>는 이를 '신자유주의' 사회 시스템 때문으로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인, 영리한 시스템이다.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에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 내는 해야 함의 자유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은 '다중'이 아니라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에 빠진다. 그래서 개인은 실패했을 때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며 정신적으로 병들어 간다." - 한병철 <심리 정치> 중에서

그래서 재벌 아버지의 왜곡된 사랑, 혹은 사랑의 방기 속에 고독에 몸부림친 소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코패스가 되었다. 역시나 동생에게 편애를 쏟아붓는 무심한 부모에게 시달린 홍설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노오력중독자'가 되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던 손민수는 홍설을 카피했고, 손민수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아도취'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드러낸다.

이들만이 아니다. <치인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여느 드라마와 달리 모두 평균이란 금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문제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가 당대 청춘들의 공감 어린 호응을 끌어내는 토대가 된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들에게 막장 드라마의 악인들에게처럼 손가락질하는 대신, "그래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어"하며 공감을 보낸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의 사랑은 그저 대학에서 '만찢남' 선배와 평범한 후배 여대생의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정은 홍설을 자기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드라마는 미처 표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정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던 그 가닿을 길 없는 절망을 유정은 홍설에게서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드라마는 이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됐다. 백인하의 말처럼 언제나 무언가를 기대하며 자기에게 다가왔던 그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자기방어 기제를 탑재하게 된 유정에게 홍설은 신선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점을 역시 잘 그려내야 했다.

홍설에게 유정은 그저 친절한 선배였다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제 자신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의 실체를 알게 되면 될 수록 말 그대로 트랩에 놓인 치즈를 담싹 집어 든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유정을 알지만 그런데도 유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홍설. 이를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병리학적 인물인 유정에 대한 캐릭터적 집중도가 필요했다.

그저 뻔하디 뻔한 삼각 청춘물이 되어버렸다

▲ 삼각관계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은 이제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 로맨틱 코미디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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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중반을 넘어선 이 드라마는 청춘의 병리학적 보고서 대신, 뻔하디뻔한 청춘의 삼각관계에 치중한다. 청춘들의 이상 징후와 그 원인을 헤아려 보는 대신, 제2의 남자 백인호를 등장시켜 그를 전형적인 '츤데레'에 '홍설바라기'로 친절하게 묘사한다. 물론 사랑 이야기에 박진감을 더하기 위해서는 '삼각'만큼, 그것도 결론을 추측할 수 없는 팽팽한 삼각만큼 적절한 도구는 없다. 문제는 그렇게 이야기가 삼각 사랑 이야기에 진입하면서 <치인트>가 <치인트>였던 이유가 탈색되어 간다는 데 있다.

11회, 홍설의 가족과 친해진 인호와 홍설이 유정을 앞에 두고 스스럼없이 자신들만이 아는 집안 얘기를 한다. 이를 보고 유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린다. 지난 시절 유정을 위해 집으로 들인 고아 인호·인하 남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유정은 더 외로워져만 갔다. 그렇게 아버지의 왜곡된 사랑 방식, 아니 사실은 무책임한 사랑으로 인해 유정은 자기방어 기제로 사이코패스가 되어왔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유정의 상처는 해프닝처럼 다루는 대신, 인호의 홍설바라기에 공을 들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홍설이란 캐릭터조차 모호해진다.

제아무리 인호를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지만, 홍설이 인호와 유정이란 두 남자를 두고 보이는 모습은 로코 드라마의 전형적인 '어장관리녀'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매사에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감이 모자란 인물이 되도록 한 원인은 그녀의 가족 문제인데, 이 문제조차 희화화된다. 하룻밤 가출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가족, 알고 보니 아버지는 가족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인호와 함께 남몰래 가족의 국숫집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등의 설정이 그렇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은 인호와 함께 외식하며 모든 시름을 날려 버린단다. 이는 그간 우리나라 드라마가 가족 문제를 풀어가는 전형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설정이다.

홍설은 그저 두 남자를 두고 자신도 모르게 저울질하는 여성이 아니다. 노력하고 또 하며 그리고 그 실패를 온전히 자신에게 돌리는 당대 청춘의 표상이다. 동시에 그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족은, 이 시대 가족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다. 그런 그녀가 유정을 사랑하는 것은 그저 여자가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것 이상이다. 늘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고통받아왔던 고립된 개인이,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고 비록 병리학적이지만 스스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게 된 '선배' 유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치인트>는 본래 이처럼 홍설이 유정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홍설을 양손의 떡을 쥔 채 행복해하는 어장관리녀로 끌어내리고 만다.

부디 또 되풀이되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 대신,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그 속에서도 스스로 방어 기제를 만들며 생존하려는 청춘의 발버둥을 제대로 그려낸 드라마로 마무리 짓길 바란다. 유정의 사이코패스를 그저 특이한 남자 주인공의 스펙으로 장식하지 말고, '노오력'하는 홍설을 평이하고 선한 여주인공으로 폄하시키지 말고 말이다. 부디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형상화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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