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대한민국 육군 제 8보병 사단 오뚜기 부대◀◀◀

sc운용(218.148) 2008.10.17 21:56:37
조회 30929 추천 6 댓글 58








百折不屈  不顚常立 第 8 步兵師團 (백절불굴 부전상립 제8보병사단)


 



부대연혁



전통과 무훈에 빛나는 오뚜기 부대  제 8 보병사단(第 8 步兵師團)은 서기(西紀) 1949년 6월 20일 육본(陸本) 일반명령 제 26 호에 의거 강원(江原) 강릉(江陵)에서 이형근 준장을 초대 사단장으로 하여 창설되었으며, 그해 7월 5일 독수리 연대를 편입하였다. 이후 사단은 1950년 6월까지 38선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작전 등에 참가하였으며, 1950년 7월 22일 안동에서 번개연대를 예속하여 사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 8 보병사단(第 8 步兵師團)은 6.25전쟁 기간중 영천지구 전투(永川地區 戰鬪) 등 138회의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적 27,500여명을 사살하고 적 7,943명을 생포하였다.


 제 8 보병사단(第 8 步兵師團)은 휴전 이후 서기(西紀) 1955년 4월부터 1962년 4월까지 강원(江原) 홍천(洪川), 경기(京畿) 포천(抱川)·연천(漣川)· 양주(楊州)로 이동하였고, 서기(西紀) 1964년 8월 30일 현 위치로 이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기간동안  제 8 보병사단(第 8 步兵師團)은 6회의 대간첩작전을 통해 적 17명을 사살하고,  적7명을 생포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제 8 보병사단(第 8 步兵師團)의 상징명칭은「오뚜기부대」다. 오뚜기부대 명칭은 “백절불굴(百折不屈) 부전상립(不顚常立)”의 기상을 상징하는 뜻으로 서기(西紀) 1951년에 사단(師團)에서 제정하였다. 이곳에는 오뚜기부대원으로서 적과 싸우다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의 사명을 완수하고 유명을 달리한 위국영령 19,649명의 명패를 모시고 있다.



6.25 전쟁



6.25전쟁이 일어나자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강릉 축선에서 북한군 제 5사단과 766 및 549유격연대와 3일간 혈전을 치루어 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속전속결을 시도하는 북한군의 전략적 기도를 와해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한반도 방어의 최후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 15사단 및 73, 103독립연대를 상대로 영천지구에서 10여 일간의 격전 끝에 적을 완전히 궤멸시킴으로써 반격 작전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사단은 1950년 10월 8일, 38선을 돌파하여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하였으며, 백석산 지구 전투,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 탈환 전투에 참가하는 등 159회의 전투에서 백절불굴 부전상립 오뚜기 부대의 빛나는 위용을 떨쳤다.




육군을 선도하는  오뚜기 부대


 


이후 사단은 13회에 걸친 팀 스피리트 훈련과 4회의 호국훈련, 5회의 군단급 FTX 등 대규모 훈련에 주력부대로 참가하였으며, 이러한 전공과 수훈을 인정받아 대통령 부대표창을 10번에 걸쳐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1993년 12월 1일에는 전군 최초로 대북 우위의 신형장비를 대폭 증강시킨 최정예 차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1999년에는 SPIDER가 전력화되었고, 2005년 12월 최초로 육군전술지휘정보체계(ATCIS)구축을 완료하여 육군의 정보화, 과학화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육군의 부대훈련 시범을 실시하여 부대훈련에 대한 육군 표준안을 정립하였으며, 특히 군단급 야외기동 훈련에서는 군단의 주력부대로 참가하여 도하작전, 공중강습작전, 대화력전 등 공세적 동시통합전투로 상대를 제압함으로써 사단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최정예 오뚜기 부대로서의 자긍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편제



직할대(본부 정보통신 수색 의무근무 정비 토우 보급수송 전차 헌병 공병 화학지원 방공 보충 항공)
10연대(횃불)
16연대(번개)
21연대(독수리)
포병연대(50FA, 73FA, 75FA, 95FA)

8사단가 (http://www.dema.mil.kr/dema/song/Sol_SongPlayer.jsp?musicNum=B00002$307,)


1절 설악산 기슭에서 자라난 우리



  열풍을 식혀버린 영천대회전


  눈보라 몰아치는 만포선에서


  피흘린 자욱마다 영광의 승리


 


2절 태양이 떠오른다 아침이 온다


  진격의 북소리를 높이 울리고


  우리들의 정열을 한데 뭉쳐서


  전우의 핏자욱이 마르기 전에


 


3절 불멸의 돌격정신 오늘에 이어


  조국의 생명선을 지키는 우리


  빛나는 전통 속에 하나로 뭉쳐


  호국의 선봉으로 우뚝 솟았네


 


4절 다시금 찾아가리 통한의 희천


  압록강 줄기따리 백두산까지


  백절불굴 정신으로 힘을 키워서


  통일의 새역사를 창조하리라


 


후렴 나가자 싸우자 승리를 위해


   우리들은 불사신 8사단 용사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출처 : http://blog.chosun.com/xqon august 의 軍史世界 -국방 Reports)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1]


사단장에게 대든 하사관


 


전쟁 중 한명의 포병대대 탄약관이 각종 문서와 장비를 적재하려고 많은 차량들이 북적이며 작전으로 분주한 사단본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연병장에서 작전지휘에 열중하고 있던 사단장을 발견한 상사는 곧바로 달려가 거수경례를 붙이고 다짜고짜 외칩니다. 


 


1-1-1.jpg1-1-2.jpg


[ 상사와 대령 더구나 사단장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입니다


( 하지만 이것은 계급과 권한의 차이이지 인격의 차이는 물론 아닙니다 ^^ ) ]


 


" 사단장님 !  전쟁이 나면 북진을 한다고 하시더니 왜 후퇴준비만 하십니까 ?  공격은 언제 하실 것입니까 ?  그리고 저것은 또 무엇입니까 ?  문서가 그리 중요 합니까 ?  문서로 전쟁을 합니까 ?  포탄이 있어야 전쟁을 합니다 !  저희 포병대대는 포탄을 실어 나를 운반차가 부족 합니다.  저차들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


 


1-2[2].jpg


[ 戰時라도 부대의 주요 서류를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


 


이때 사단장 옆에 있던 참모들이  " 말단 일개 하사관이 어찌 사단장에게 이런 무례한 언동을 할 수가 있나 "  분개하고 당장 총살시키기 위해 헌병들로 하여금 이 당돌한 하사관을 체포하도록 지시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단장이 참모들의 이러한 행동을 제지하며  " 네 말이 옳다 ! "  고 하며 이 하사관에게 충분한 탄약 운반차를 지원해 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1-4[2].jpg


[ 하지만 일선 포병부대 하사관에게 서류보다 급한것이 있었습니다


( 한국전 초기 국군의 곡사포였던 M-3  105mm 견인곡사포 모형 ) ]


 


그러자 공문서를 적재하기 위해 줄서 있던 모든 차량들은 서류뭉치를 내려놓고 하사관의 지휘 하에 포병대대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이때 상사를 체포하려 하였던 헌병대장이  " 너는 무슨 용기로 전시에 총살당할 수도 있을 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 ? "  하고 묻자  상사는  " 사단이 북진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  하면서 차량들을 지휘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1-3[4].jpg


[ 포병부대에게는 포탄을 실어나를 1 대의 차량이 아쉬었습니다 ] 


 


사단장과 참모들은 이와 같은 당당한 그의 태도와 애국심에 깊은 감명을 받아 포병대대를 지원하기 위한 충분한 차량을 배당하여 주었고 사단 본부 인력으로 포탄운반을 도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 당돌한 하사관은 제 18 포병대대 탄약관 이석권 상사였고, 말단의 건의를 통 크게 수용하여 즉시 지시를 하달한 사단장은 제 8 사단장 이성가 대령이었습니다.


 


1-5_이성가.jpg


[ 제 8 사단장 이성가 대령 (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 ^^ ) ]


 


1950 년 6 월 25 일 북괴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절체절명의 위기 몰렸을 당시 공산군의 주요 공력 루트인 동해축선의 초기 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단양의 피 말리는 지연전과 영천대회전 승리의 주역인 오뚜기부대의 신화는 이렇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돌하지만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건의하던 말단 하사관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의 분투와 전선의 상황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지원하는데 아낌없는 배려를 하였던 사단 지휘부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6[1].jpg


[ 동란 초기 오뚜기부대의 영웅담에 대해 이야기 하여 보겠습니다 ]


 


위에 설명한 일화는 1950 년 6 월 26 일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강릉의 오뚜기부대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으면  말단 하사관이 사단장을 찾아가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며 직접 건의를 하였을 까요 ?  이제부터 한국전 초기 북괴의 압도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다하였던 오뚜기부대와 제 18 포병대대의 영웅담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2 ]


 


 



오뚜기의 탄생과 피아 대치상황


 


백두대간의 동측 동해축선은 남이던 북이던 그 지역적인 특성으로 서측의 전선과는 별개로 운용 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한국전 발발당시 북괴군은 38선을 38경비 1여단이 전담하여 경비하고 있었고 침공의 주축으로 제2군단 예하 제5사단을 배후에 전개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북괴 5사단은 만여 명의 韓人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중공군 제164사단이 전신으로 1949년 8월 23일 나남으로 입북하여 북괴군으로 군복을 갈아입습니다.


 


2-2.jpg


[ 북괴 5사단은 실전 경험까지 많았던 최정예 사단이었습니다 ]


 


이 부대는 國共內戰등을 통하여 실전경험이 풍부하였고 완편 후 사단급 전술훈련도 이미 마친 북한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사단이었습니다.  전쟁개시 시 북괴 5사단은 동해축선을 따라 급속 남진하여 적어도 7월 29일까지는 포항을 점령하여 태백산맥以西의 부대와 전선을 연결하고 8월 13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려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1[1].JPG


[ 북괴는 5사단외 38경비 1여단, 상륙부대인 766부대, 549부대를 전개 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


 


거기에 더해 북한은 전쟁발발 시 임원진과 정동진 해안으로 기습 상륙하여 기존의 공비세력과 연계한 후, 아군 제8사단의 배후를 차단할 목적을 지닌 766부대와 육전대인 549부대를 편성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형적인 여건으로 여타지역과는 달리 기계화부대를 편제하여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2-6.jpg


[ 북괴의 도발에 대비하여 1949년 오뚜기부대가 창설 됩니다.


 ( 창설기념비 사진출처 - BeMil 흰꼬리수리님 ) ]


 


이에 반하여 해당지역을 방어하던 아군은 1949년 6월 20일에 제6사단 예하 제10연대와 제5사단 예하의 제21연대를 기간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창설된 오뚜기부대였습니다.  제8사단은 38선 이남의 26 km 을 담당하였지만 삼각편제가 아닌 2개 연대와 약간의 직할부대로 이루어진 감편된 부대였습니다.


 


2-7[1].jpg


[ 감편된 사단형태로 출발하였지만 오뚜기부대는 조국 수호의 선봉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 기념비문 사진출처 - BeMil 흰꼬리수리님 ) ]


 


예하 제10연대는 사단본부와 함께 강릉인근에 주둔하면서 38선 경비와 함께 오대산 일대의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였고, 제21연대는 삼척에 주둔하며 주로 두타산 일대의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문의 M-3 견인곡사포를 보유한 제18포병대대가 사단의 화력 지원을 위해 강릉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2-4.jpg


[ 아군의 화력지원은 M-3 곡사포를 보유한 제18포병대대가 담당하였습니다 ]


 


전쟁직전 북괴 전력은 아군의 2배 이상이었으며 화력까지 계량화 한다면 3배가 넘는 전력이었습니다.  더구나 아군은 부대창설과 더불어 38선 경비와 태백산맥일대에 준동하는 공비 소탕전을 전개하였던 이유로 체계적인 연대급 전술훈련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2-5.jpg


[ 오뚜기부대는 창설 직후 38선 경비 및 공비토벌에 주력하여


체계적인 전술 훈련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 


 


하지만 38선 일대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북괴 38경비 1여단과의 충돌과 對공비 작전을 통한 소부대 전투의 실전경험은 풍부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런 전과를 바탕으로 적을 과소평가하여 장비와 전투력에 있어서 적을 압도하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고 적의 남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2-3_아군.jpg


[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오뚜기부대의 사기는 드높았습니다 ] 



특히 부대의 구성원 중 많은 병력이 서북청년단처럼 공산학정을 피해서 월남한 이북출신이 많아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였고 만일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곧바로 북진하여 통일의 선봉이 되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전쟁발발과 함께 자만감 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3 ]


 


 


 


38선의 붕괴와 고립된 10연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주문진 부근의 188고지에 1발의 포탄이 낙하되어 폭발을 일으키면서 전쟁은 개시되었습니다.  이 포격을 시작으로 포탄의 비가 내리고 주문진 일대의 38선을 경비하던 아군 제10연대 2대대는 불의의 기습으로 순식간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3-1[1].jpg


[ 1950년 6월 25일 북괴는 동족의 가슴에 총구를 향하고 도발을 시작합니다 ]


 


아군의 최 일선 경비부대가 무너지자 새벽 5시경 북괴 5사단 1개연대를 증강받은 38경비 1여단이 남침을 개시해 왔고 북괴 5사단 (-1) 이 뒤쫓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강릉 후방으로 적 766부대549부대가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하여 버립니다.  이로써 오뚜기부대 제10연대는 순식간에 최 일선이 무너짐과 동시에 배후가 차단되는 최악의 국면에 놓여졌습니다.


 


3-2_북한군_최초_상륙침투(03시).jpg


[ 북괴군 766부대의 최초 상륙지점 ] 


 


만주 출신의 사단장 이성가 ( 李成佳 1922.10.9 ∼ 1975.3.15 1962년 소장예편 ) 대령은  신흥무관학교 칠도구분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쓴 우국지사 이관석 장군의 아들로 중국 南京 군관학교를 졸업 후 중국군에서 소령까지 복무하면서 대일 항전에 참전하였던 정통 무인이었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서둘러 귀국하여 창군 일원이 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습니다.


 


3-3-1_신흥무관.jpg3-3-2.jpg


[ 신흥무관학교 ( 左 ) 와 이성가 사단장 ]


 


그는 초반 상황이 너무 나쁘다는 것을 깨닫고 삼척에 주둔한 제21연대를 강릉방어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릉으로 북상할 제21연대의 이동로를 이미 북괴군 766부대와 549부대가 절단한 상황이어서 사단장은 제21연대에게 임계-구산리로 우회하여 강릉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합니다.  38선과 제2전선의 포위망에 갇힌 제10연대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21연대가 속히 증원되어야 사단전력을 보존하고 강릉을 사수 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3-4[1].JPG


제8사단 본부제10연대는 배후가 차단되어 고립되었습니다 ]


 


제21연대가 도착할 때까지 제10연대는 혼자서 최대한 전선을 사수하여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적의 공세는 거셌습니다.  38선 경비를 담당하던 제10연대 2대대가 붕괴 된 후 주문진 북쪽 북분리~어성전리를 연결하는 능선에 급편 설치한 방어진지도 오전 8시가 지날 무렵 돌파되었고 오후 8시에 연곡천에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5[2].jpg


[ 제21연대가 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이동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우회하여야 했습니다 ]


 


이곳마저 돌파된다면 대관령 통로와 사단본부 및 비행기지가 있는 강릉의 방어 또한 장담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남쪽에서 지원하러 이동중인 제21연대가 도착하기에는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때 방어의 최전방에 제18포병대대가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뚜기포병대대는 대대장이 전쟁 발발 직전 육군본부 출장 중이었고 각 포대 포대장들이 파견 교육 중이어서 포대 지휘부가 사실상 공백상태였습니다.


 


3-6_인민군.JPG


[ 북괴군의 공세로 강릉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


 


다만 1,800 여 대대원 대부분이 1948년 12월 서북청년회원들이 의거 입대할 때 편성된 제1포병대대 출신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 어느 국군 부대보다도 적개심과 투지가 왕성했습니다.  때문에 제10연대가 압도적인 북괴군에게 밀리고 있다는 전황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대한 가까이 북쪽으로 올라가 포들을 방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7[3].jpg


[ 제18보병대대의 M-3 곡사포가 적을 응징하기 위해 북상하여 방열 합니다 ] 


 


방열이 완료 된 후 전방을 관측하자 제10연대가 밀려서 내려오는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M-3 견인곡사포의 사거리는 너무 짧았습니다.  압도적인 적의 병력에 육탄으로 맞서며 밀리고 있는 제10연대를 제18포병대대는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4 ]


 


 


 


불을 뿜는 곡사포


 


드디어 오전 11시 최전방에서 관측을 하던 제18포병대대 관측장교 김용운 소위는 제10연대를 추격하는 북괴 1여단 선도부대가 포 사정거리로 들어왔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김소위는 지체 없이 사격명령을 내렸고 M-3 곡사포가 분노의 불을 뿜기 시작하였습니다.


 


4-1.JPG


[ 제18포병대대의 곡사포들은 분노의 불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


 


전쟁개시 후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던 북괴군은 주문진 남쪽에서 엄청난 포 세례를 받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동해축선의 여건상 일렬종대의 형태로 진격 할 수밖에 없었던 북괴군은 공격 선두가 탄막에 갇혀 몰살당하고 계속 포탄이 날라 오자 결국 진격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2_연곡천[2].jpg


[ 연곡천 ] 


 


이틈을 타서 제10연대는 전열을 정비 하였고 강릉북방 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 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불을 끈 제18포병대대는 제10연대가 저항선을 구축하자 배후인 강릉 북쪽의 사천국민학교로 이동하여 포진지를 재구축합니다.


 


4-3_대치.jpg


[ 제10연대는 전열을 정비하여 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합니다 ] 


 


진격을 멈추었던 북괴 1여단과 후속하여 내려온 5사단은 다음날인 6월 26일 연곡천을 돌파하고자 맹공을 재개하였고 제10연대는 최선을 다하여 방어선을 지켜냅니다.  이들의 배후에 있는 제18포병대대는 다시 한번 방어의 십자군으로 그 역할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제18포병대대의 M-3 는 전방 관측자가 알려온 위치에 정확하게 포탄을 날려 보내 적들을 타격하였습니다.


 


4-7.jpg


[ 피아 작전참가 부대 및 지휘관 ( 사진 - BeMil 흰꼬리수리님 ) ]


 


이러한 제18포병대대의 지원으로 사기가 오른 제10연대는 전선을 38선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121 고지를 탈취하는 반격전을 벌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국군 화력의 주축인 제18포병대대는 빗발치는 지원사격요구에 포신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쉼 없는 지원사격을 가하였습니다.


 


4-6.jpg


[ 광개토부대의 포병사격 훈련 모습입니다.


비록 질과 양에서 당시 제18포병대대를 오늘날 국군과 비교 할 수는 없지만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모습을 그분들은 보여 주셨습니다 ]


 


비록 탄약소대의 차량이 쉴 새 없이 포탄을 나르고 강릉시민들이 탄약과 각종 식음료를 지원하여 주고 있었으나 포병대대의 분전이 계속 될수록 포탄의 소모량이 많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이글의 첫 번째에 쓴 것처럼 탄약관 이석권 상사가 사단으로 달려가 사단장 이성가 대령에게 직접 포탄운반차량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4-5.jpg


[ 사단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차량을 확보한 제18포병대대의 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 


 


드디어 14:00 시 이상사가 많은 차량을 이끌고 오자 탄약소대원들과 강릉시민들은 만세를 불렀고 적의 포탄이 난무하는 위험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충분한 포탄을 운반하여 포병들이 마음껏 적을 강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民軍이 하나가 되어 분전한 제18포병대대의 활약으로 제10연대는 연곡천방어선을 수호 할 수 있었고 이날 저녁 삼척에서 북상하여 증원하러 올라온 제21연대가 드디어 강릉외곽에 도착하여 힘든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던 제10연대를 지원 할 수 있었습니다.


 


4-4.JPG


[ 민군의 하나된 노력으로 연곡천을 사수 하였습니다 ]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던 북괴군도 더 이상 연곡천에서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이곳을 도하하지 못하여 강릉을 조기 점령하지 못한다면 북괴군 남침전략 전반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 끝 ]


 


 


 


조국을 수호한 살신성인


 


6월 27일 새벽 4시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적의 대공격이 시작 되었습니다.  어렵게 121고지를 탈환하였던 아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틈을 타서 적의 선봉이 연곡천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포위를 염려한 지휘부의 판단으로 제8사단은 후퇴를 하게 됩니다.


 


5-1_DPRK.jpg


[ 북괴의 대대적인 포격으로 121 고지 전투가 시작 되었습니다 ]


 


제10연대의 후퇴로 최전방 배후에서 화력지원을 펴던 제18포병대대의 포진지도 동시에 적의 전면에 노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대원들은 옥쇄의 각오로 인식표를 땅에 묻고 포병진지 전방 100m 까지 적들이 도달하자 수평으로 포신을 낮추고 직접 조준하여 적을 타격하였습니다.


 


5-2.jpg


[ 제18포병대대는 적들이 밀려오자 수평사격으로 방어하기 시작합니다


( 사진출처 -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스틸 컷 ) ]


 


제18포병대대는 포들을 후퇴시키면서 동시에 적들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2문의 포를 철수 시키지 못할 상황에 놓이자 견인포의 타이어를 터뜨리고 폐쇄기의 공이를 빼내어 적들이 포를 노획하여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 후 후퇴를 감행합니다.


 


5-3.jpg


[ 적들이 포진지까지 밀려 들어오자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스틸 컷 ) ]


 


이때 2번 포차 운전병 심우택 이병은 포 폐쇄기를 안은 채 적의 총탄에 산화하고, 통신소대 선임하사 최서종 중사는 와이어 드럼을 회수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어 돌아오지 못합니다.  또한 관측반 한명화 하사는 끝까지 관측소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하였습니다. ( 제18포병대대 순국 3용사 )


 


5-4-1.JPG


[ 현재 제18포병대대는 노도부대에 배속되어 있는데


순국 3용사의 전설은 오뚜기부대와 노도부대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눈물나는 제18포병대대의 분전은 전쟁 당일 강릉을 점령하려던 북괴의 계획을 무려 3일간이나 지체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날 연곡천 방어선이 무너졌음에도 제18포병대대의 살신성인의 분전으로 제8사단 주력과 수많은 강릉시민이 긴급 이동 전개한 제21연대가 확보한 대관령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었습니다.


 


5-4-2[3].jpg


[ 전적비문 ( 사진출처 - BeMil 흰꼬리수리님 ) ]


 


비록 전쟁개시 직후부터 통신이 두절되어 육본으로부터 어떠한 전장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오뚜기 부대장 이성가 대령은 대관령에서 부대를 재편하고 점검한 결과 역습을 가하면 승리감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있던 북괴군을 타격하여 강릉을 탈환 할 수 있겠다는 역발상을 하였습니다.


 


5-5[2].JPG


[ 대관령에 집결한 오뚜기부대는 강릉 탈환 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


 


반격 준비를 마친 오뚜기들은 6월 28일 오전 8시 예하 제21연대를 주축으로 강릉을 공격하여 경포대 부근까지 진출하여 강릉 점령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있던 북괴 1여단5사단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습니다.


 


5-6[1].JPG


[ 오뚜기들은 경포대 인근까지 직격하여 북괴군을 당황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


 


그런데 때마침 개통된 육본과의 통신에 의해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함락되는 위기에 처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전선의 단절을 우려한 육본의 명령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강릉을 포기한 후 대관령을 넘어 제천으로 철수 하게 됨으로써 동해축선의 용감했던 오뚜기들의 강릉 방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5-7[1].jpg


[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제천으로 철수 하였습니다 ]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의 놀라운 분전과 제8사단 왼쪽에서 춘천대첩을 이끈 청성부대의 고군분투 <U>( 관련글 참조 )</U> 에 의한 동부전선의 쾌거는 한국전쟁 초기 2사단, 5사단, 7사단이 괴멸되면서 서울이 함락되었던 서부전선의 암울하였던 전황을 상쇄하는 자랑스러운 승리였고 동부전선에서 작전 차질을 빚게 된 북괴의 전체 전쟁전략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5-8[1].jpg


[ 전적비 ( 사진출처 - BeMil 흰꼬리수리님 ) ]


 


이후 영천대회전에서 오뚜기들은 북괴군 15사단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보여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렸던 조국을 수호하였습니다.  포진지내에서 육박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제18포병대대 장병들처럼 이러한 오뚜기들의 놀라운 뚝심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한 지휘부이하 모든 장병들과 강릉시민들의 협조에 의한 노력이 씨앗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5-9.jpg


[ 무적 오뚜기부대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조국의 간성으로 영원 할 것 입니다 ]


 


현재 중부전선의 중핵임무를 부여받고 최강의 사단으로 그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있으며 조만간 국군의 6번째 기계화사단으로 변경 될 예정인 오뚜기부대는 그 명예로운 부대사를 계속하여 이어갈 것입니다.  선구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뚜기부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합니다.[ august 의 軍史世界 ]

추천 비추천

6

고정닉 0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대한민국 육군 제 8보병 사단 오뚜기 부대◀◀◀ [58] sc운용(218.148) 08.10.17 30929 6
공지 8사단(오뚜기) 관련 사진과 내용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38] 운영자 08.10.17 8907 5
5761 양주 8사단 알려준다 8갤러(106.102) 11:52 8 0
5760 8사단의 어느 부사관. karut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51 9 0
5759 들었냐 새끼들아!! 뚜비 인형을 들고 뚜방뚜방을 외치자! 검은원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4 0
5758 뚜방신이 들어오신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검은원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6 0
5757 이 갤러리는 지금부터 우리 뚜방뚜방의 사단으로 지정하겠다. 검은원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7 0
5755 2005~2007 8사단 10연대 3대대 본부중대 있냐 8갤러(61.78) 04.30 27 0
5753 8사단 취사병 Qhhag92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09 197 0
5752 10연대 수색중대 전우들아 나발555(106.101) 04.01 113 0
5749 이거 너네 부대마크 맞냐 [2] ㅇㅇ(211.234) 03.30 517 0
5746 8사단애들은 외박나오면 어디서 물뺐었냐?? [2] 우흥(59.22) 03.08 714 0
5742 8사단 [1] ㅇㅇ(118.235) 02.15 547 0
5741 안녕하세요 6사단 출신입니다 팀린스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2 232 0
5739 8사단 16연대 3대대 9중대 (09년 7월 군번) [1] 8갤러(220.86) 01.29 380 0
5737 04년 8사단 10연대 2대대 8중대 중형화기 계신가요 [1] 8갤러(112.165) 01.16 374 0
5736 8581부대 출신 없냐? [1] 000(125.248) 01.09 394 0
5734 옛날 16연대2대대(차돌대대) 자리 지금 가면 내부 구경 가능한가요? [3] 8갤러(218.39) 23.12.19 430 0
5733 겨울만되면 부대에서 일동사이판or 유황온천 단체 목욕 많이갔는데 [3] 8갤러(118.235) 23.12.12 368 0
5732 올ㅋ 73fa 김종철 대대장님 투스타 다셨네 [6] 8갤러(223.39) 23.12.06 498 0
5730 8사단 보수대 06~08년도까지 3분대 활동하던애들 댓글 달아봐라 8갤러(118.235) 23.11.28 230 0
5728 아들(8사단 운전병 포천) 면회(외박)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3] 8갤러(115.137) 23.11.01 696 0
5727 너네도 8사단 돌격대원 결의함?? 8갤러(106.102) 23.10.29 382 0
5723 세종대왕을 높이지않은 Koreans 꾀뮌이쟎냐. 8갤러(222.112) 23.09.12 198 0
5722 13군번인데 화생방지원대 출신들 8갤러(218.233) 23.09.12 236 0
5721 73브라보가 많군 [2] 73FA(B)(210.94) 23.09.06 477 0
5720 8사단 방작병 어떰?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30 301 0
5719 정신3급인데 gp 가능하냐 ㅇㅇ(112.218) 23.08.29 243 0
5718 73본부인데 알파 브라보 경계파견 나갔을때 느낀점 [5] 성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29 512 0
5717 85년에 8사단에서 사고가 있었네요. [2] v포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28 660 0
5715 73fa 복무 할적에 제일 컸던 사고 [6] 8갤러(1.224) 23.08.26 551 0
5713 8사단 예전에 전차가 전복됐다던데 [2] ㅇㅇ(112.169) 23.08.21 639 0
5712 이날씨에 애들 근무서면 죽겠네.. d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18 293 0
5709 73fa 브라자 전우들 그립노 [5] ㅇㅇ(1.224) 23.08.07 491 0
5708 본인 08군번. 21연대 1대대 3중대다 [9] 오뚜기(114.207) 23.07.28 601 0
5707 04군번 강종현 아는사람 없냐 ㅋ ㄴㄷㅅㄷ스(175.204) 23.07.24 363 2
5706 오뚜기8사단 [1] 탱화따봉(123.109) 23.07.24 669 2
5704 # 전선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던 국군 2군단(6,7,8사단)은 치욕적인 군대(211.55) 23.07.11 393 1
5702 외조부께서 8사단 10연대에 나왔다고 하는데 [2] ㅇㅇ(118.219) 23.07.05 509 0
5701 01년 6월 군번인데 당시 포천 일동면 횃불교회 담임목사님 연락처 암? [2] 00(124.194) 23.06.21 437 0
5700 천보대 50포병대대 있냐? [1] ㅇㅇ(112.153) 23.06.09 532 2
5699 오뚜기 라면 이제 안먹는다 [1] ㅇㅇ(58.231) 23.05.29 693 2
5697 모델 윤진욱(윤밤) 본썰 진격의낭유리(112.160) 23.05.06 576 0
5696 God bless SEOUL KOREA JHJG(211.54) 23.05.01 327 0
5695 8사단 10연대6중대 1소대있음? 03군번임 ㅇㅇ(106.101) 23.04.26 344 0
5692 동서울 터미널에 버스에 타면 번호표 주고 당첨되었다면서 강매하는 아재 [3] 데마시아(112.160) 23.04.06 738 0
5691 군복무하던 시절이 그립다. ㅇㅇ(39.115) 23.04.02 433 0
5689 와 8사단 갤러리도 있었네 [1] ㅇㅇ(123.215) 23.03.04 846 0
5687 101출신 있냐 [7] ㅇㅇ(59.12) 23.03.02 714 0
5686 수명 2년 남은 곳 [1] ㅇㅇ(2.58) 23.02.26 840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