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회에서는 3세기 중엽까지 교회 전례는 물론 교회 저술에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라띤 지역의 일반 서민들은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알아듣거나 구사할 수 없었으므로 특히 성서의 라띤어 번역을 필요로 하였다.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던 서북 아프리카에는 일찍부터 도시들이 번창하였고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중요한 무역 상대가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의 중심지인 카르타고는 로마의 관리·군인·상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므로 주로 라띤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라띤어 성서를 필요로 한 것 같다.
현존하는 라띤어 교회 문헌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쉴리움의 순교자 행전〉(Acta Martyrum Scillitanorum)인데,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 출신인 여섯 순교자가 카르타고에서 집정관 사뚜르니누스(Saturninus)에 의해 심문받고 참수된 기록이다. 이 행전에서 순교자들은 〈의인인 바울로의 작품과 서간들〉(Libri et epistulae pauli, viri justi)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바울로의 저서들이 그리스오번이었는지 라띤어 번역본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떼르뚤리아누스는 197년부터 본격적인 라띤어 저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는 저서들에서 이미 라띤어로 일부 번역되어 있던 성서를 인용하거나 자신이 직접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213년 전후에는 성서가 모두 라띤어로 번역되었으며 아프라(Afra) 번역본, 이딸라(Itala) 번역본 등이 있었다.
라띤 교회 안에서 라띤어 사용이 늦어진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어에 비해 라띤어의 어휘가 상당히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어 어휘를 라띤어화하여 사용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라띤어의 apostolus(사도)와 baptisma(세례)는 그리스어를 라띤어 표기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라띤어 저술가는 카르타고의 떼르뚤리아누스였으며 치쁘리아누스가 그 뒤를 이었다. 떼르뚤리아누스와 동시대인이었으며 로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히뽈리뚜스(Hyppolitus)는 그리스어로 저술 활동을 하였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떼르뚤리아누스, 치쁘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딴시우스, 아우구스띠누스로 연결되는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 주류는 로마 교회의 신학을 능가할 만큼 강했으며 라띤교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누스(키프리아누스), 《도나뚜스에게 / 가톨릭교회 일치 / 주의 기도문》, 이형우 옮김, 역자 해제
원래는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라시움(Latium) 주(州)에서 사는 주민들의 용어였다. 3세기 경 서방교회에서의 공용어로 그리스어 대신으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먼저 사용되었다.
-가톨릭 대사전, 라틴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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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어가 라틴어 아닌 걸 안다면 "아니 왜 히브리어도 아람어도 희랍어도 아니고 라틴어가 전례언어야" 싶을거임.
근데 당연히 중세 사람들도 라틴어가 성경 원어 아닌 거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중세인이 라틴어를 무슨 판타지의 신성언어마냥 생각한 건 아님.
그럼 왜 라틴어를 썼냐?
라틴어가 토착어니까. 라틴 사람은 라틴어로 미사 보고 라틴어로 성경 읽는 게 당연하니까.
이를 볼 수 있는 게, 서방 교회에 라틴어가 도입된 과정임. 의외로 라틴어 전례 도입은 로마가 아니라 아프리카(여기서는 카르타고와 친구들) 교회가 최초였음. 로마 지역 교회는 신약 원문인 희랍어를 전례에 썼지만, 아프리카 교회는 3세기에 서방 중 최초로 라틴어 전례 체제로 돌입함. "라틴 사람은 제발 우리말 씁시다"라는 정말 실용적인 이유로.
즉 라틴어 전례가 서방에 도입된 이유는 "신성언어를 쓰자"는 판타지적 동기도, "경전 원어를 쓰자"는 이슬람적 동기도 아니고, 그냥 "토착어 쓰자"는 실용 동기임. 아마도 현실에서 가장 비슷한 사례를 찾자면, 슬라브 정교회들의 교회 슬라브어가 교회 라틴어에 대응함. 슬라브 지역 교회들이
1. 슬라브 사람은 슬라브어 씁시다라는 이유로 토착어를 쓰고
2. 그래도 서로 말은 통해야 하니 옛말투를 '표준어'로 정했듯이
라틴 지역 교회들은
1. 라틴 사람들은 라틴어 씁시다라는 이유로 토착어를 쓰고
2. 그래도 서로 말은 통해야 하니 옛말투를 '표준어'로 정한 거.
(왜 하필 옛말투를 표준어로 정한건지 이해 안가면, 프랑스인이 과연 현대 이탈리아어 미사를 라틴어 미사보다 더 좋아할지 생각해보면 됨)
아무튼 그런 이유로 라틴 가톨릭은 라틴어를 쓰게 됨. 당연히 동방 가톨릭에 라틴어를 강요하진 않았음.
근데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슬슬 눈치를 챘겠지만, 이 논리엔 중대한 회색지대가 있음.
'라틴 교회'에 묶이지만 실제로는 로망스어 안 쓰는 지역은? 가령 독일은? 영국은? 스칸디나비아는?
물론 이 지역에서도 식자층은 라틴어를 알았고, 문명화도 라틴어와 묶여서 패키지로 된 것이니 처음엔 문제가 적었음. 그러나 역사가 진행되고 민족성이 강해질수록 언어 문제가 중대하게 떠오른 거.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동북아 대승불교에서 한문의 위치를 생각하면 됨.
동북아 문명화는 '중국화'와 불가분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고, 전근대 식자층은 한문을 실용소통언어로 사용했음. 당연히 불교에서도 '표준어'는 한문이었음. 식자층 불자들은 불경 원어가 한문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전근대엔 별 문제가 없었음.
하지만 민족주의가 발흥한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그래도 한문이 낫지만) 못 알아먹을 한문 불경 볼 바엔 차라리 조선어/일본어 번역을 읽자"는 정도의 주장이 나올 거임. 그러다가 민족주의가 더 강해지면 "어차피 다 번역들인데, 한문 불경이나 한국어 불경이나 똑같은 거 아님????" 할 거임.
라틴 가톨릭에서 라틴어가 퍼지고, 다시 그게 반성되는 과정이 바로 이랬음.(다만 대승 불경은 한문번역만 남고 소실된 경우도 있어서 완전 일대일 대응은 안 됨)
로망스어권 내부에서 보더라도, 라틴어 미사보다 자국어 미사를 선호하는 과정은 민족주의와 궤를 같이함.
코르시카 사람이 파리 말(프랑스어)을 라틴어보다 더 '우리말'이라 느낄 때, 시칠리아 사람이 피렌체 말(이탈리아어)을 라틴어보다 더 '우리말'이라 느낄 때, 그때서야 라틴어 미사를 반성하게 되는 거.
[세 줄 요약]
1. 라틴어 쓴 이유는 그 지역의 식자층 소통언어라는 실용 동기 때문이다.
2. 비로망스어권에선 문명화와 라틴화가 분리될 때 라틴어가 반성된다.(비유: 한국에서 문명화와 중국화가 분리될 때 한문이 반성된다.)
3. 로망스어권에선 군대를 가진 사투리가 라틴어보다 더 친숙해지면 라틴어가 반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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