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챕의 하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메타포(은유법)를 이행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함.
‘사실 하뉴는 독자이며 하뉴를 욕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거다.’
하뉴=독자인거 추측할 수는 있어도 갑작스런 관점의 전환,
즉 작가와 독자였다는 메타포를 바로 이해하고 작품에 몰입해버리는 따효니가 대단하다고 느꼈음.
나는 초회차는 무슨 다회차때도 하뉴=독자라는걸 이해만 했지 딱히 소름이 돋거나 하지는 않았거든.
그러다가 따효니꺼로 보다가 미친듯이 소름돋고 오열한 케이스인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 앎이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지.
니체로 예를 들어 설명해볼게.
‘태양이 바다를 젖가슴처럼 애무하는 것으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사물을 안다는 것은 애무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했을 때 이 사람을 잘 알게 될까? 단지 고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니체)’
우리는 흔히 이분법적 사고로 앎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에서 출발해.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서 그에 걸맞는 선을 베풀어야한다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말하지.
그러나 니체는 진정한 앎이 행위와 구분될 수 없다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했어. 행위를 앎의 완성으로 봤다고도 할 수 있겠지. 도마가 의심속에서 예수의 옆구리와 손을 만져 본 후에야 예수의 부활을 믿었(알았)듯이 말이야.
니체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종교비판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기독교의 선이 위선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믿음(부분적 앎)을 지적했어.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신이 베풀라고 했으니까 등 자신의 행위를 신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사고해버리거든.
자신의 진심 어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인간 본연의 목소리, 즉 이미 합을 이룬 상태에 놓인 것에 굳이 진리(정답)를 끌어들여 앎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최초의 본능적인 충동에 의한 애무(앎)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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