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2살 때였나.

한창 쪽쪽이 빨며 아장아장 걸어 다녔을 시절 내 인생은 한차례 대격변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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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살짜리 아이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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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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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생을 깨달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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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고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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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이가 가려워서 쪽쪽이를 빨고 있던 나는 충격을 받고 쪽쪽이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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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왕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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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전생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때마다 일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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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중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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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1의 대한민국 청년, ‘이승민’의 인생을 대충 요약해보자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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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 없다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대학교 갈 머리도 안되는 것 같으니 중학교만 졸업하고 그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아이를 밀치고 대신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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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대충 요약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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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왕따, 중졸, 만 23세에 교통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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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음.

친구 없음.

지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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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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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생은 2살 아이의 입에서도 그런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안쓰러웠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째서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전생이 떠오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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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하던 전생을 반추하고 이번 생에 감사함을 가지라는 신의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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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도련님.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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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올 내용은 아니었지만, 유모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날 안아 들었다.

나는 이가 다 나지 않은 나이답게 똑똑한 발음으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모에게는 대충 아따따 아따 아따 쯤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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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따 아따."

번역: 놔 봐, 유모. 나 지금 진지한 생각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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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가 있다는 점에서 눈치챘겠지만, 이번 생의 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 그 이름도 찬란한 상송의 재벌가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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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삼X가 아니라 상송이라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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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중졸이래도 한국 최고 기업의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X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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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평행 세계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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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전생의 지구와 흡사하지만 완벽히 같지는 않은 곳 이라고.

그리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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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가야. 아가는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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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기억을 얌전히 봉인했다.

‘나’라는 자아는 존재의 연속성에 있는 법.

이승민의 육체가 화장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순간 그는 죽은 것이었다.

이승민의 기억을 가진 로봇이 이승민이 아니듯, 나 역시 이승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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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론을 내린 순간.

나는 마침내 참아왔던 일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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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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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시원하세요? 도련님 꼬치 봐 드려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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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가 내 기저귀를 내리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엄숙하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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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가다. 나는 아가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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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격이 무참히 살해당할 뻔한 위험에서 벗어나고, 이후로 스스로 아가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질 무렵 또다시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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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봐봐. 네 여동생이야. 꼬물꼬물 귀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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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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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가 안고 온 갓난아기를 보며 정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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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다시 한번 제대로 봐봐."

​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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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조금 더 제대로 된 감상을 바라시기에 정말 마음속 심상을 그대로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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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글쭈글하고 붉은 피부, 홉고블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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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게 뭐야. 귀엽다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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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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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너 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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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을 먹은 나는 돈 쓸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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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아빠 반반씩 닮아서 너무 귀여워. 나중에 크면 미스코리아 나가는 거 아냐? 하, 돈도 많은데 이쁘기까지 하면 이거 뭐 일등 신붓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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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거기까지 생각했어? 완전 동생 바보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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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내 볼을 잡고 쭈욱 늘리는 걸 고소하다는 듯 보시던 어머니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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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애 오빠야. 그냥 오빠도 아니고 5살 오빠. 무슨 일 생기면 지켜줘야 하고 아빠 없을 때는 네가 가장인 거야. 알겠지?"

​

"흠.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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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꼭 붙잡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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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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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이어지던 회상이 끊겼다.

머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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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빠는,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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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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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용돈 인상을 대가로 수락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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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 묻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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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슬슬 정신이 돌아오며, 내가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나는 끊어졌던 연기를 다시 이어갔다.

​

"······김다솜, 우스운 말이다. 너는 아직도 망령에 사로잡혀 있나? 내 마지막을 장식할 영웅이 고작 이런 어리숙한 계집이라니 미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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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듯이 증오하고 있는 눈.

불살의 히어로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살의로 가득하다.

내 역할은 그녀의 숙적을 연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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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대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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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크큭. 그래,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답은 변하지 않는다. 네년의 오빠는 옛적에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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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떻게 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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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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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몇 번이고 말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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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나는 크나큰 착각을 했다.

이 세계는 평행세계 따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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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고 죽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마왕님의 그릇으로 재능 없는 15살 꼬마가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애초 계획대로, 그 동생을 잡아 왔더라면 성공했겠지. 너 말이다. 김다솜."

​

김다솜.

내가 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을까.

한때 가장 좋아했던 웹툰에 나오는 빌런의 본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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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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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김다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웹툰 속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깨진 눈동자와는 다른, 비록 살의를 띄고 있지만 여전히 깨끗한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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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개자식아.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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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이 땅에서 띄어졌다.

그녀의 손아귀 힘에 목이 부러질 듯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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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헥,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였나? 그래, 죽여라. 나는, 숙적에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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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나는 연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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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경고를 알아먹지 못한 나의 속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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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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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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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이승민은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탓에 별달리 취미랄게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인생.

남아도는 시간을 버릴 수단이 절실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방 안에 틀어박혀서도 가능한 웹툰이 그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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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마블 영화네 뭐니 히어로 나오는 것을 보길래 따라서 히어로 나오는 웹툰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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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웹툰은 어느 히어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었다.

재벌가 출신 히어로가 악의 조직에 가족을 모두 잃고 히어로로 활동한다는 내용.

댓글에서는 디시의 배트맨을 빼다 박았네, 조센 웹툰은 이래서 안 되네 등등의 비난이 주를 이었지만 이승민은 원본을 몰랐으므로 그 비난에 공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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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의 여동생이 사실 그를 지긋하게 괴롭히던 섹시한 빌런이었다는 반전에 거금 1천원을 들여 쿠키까지 구웠을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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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은 그 웹툰 덕에 출근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날, 아이를 밀치고 대신 트럭에 부딫혔을 때도 그것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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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건대, 그 웹툰의 주인공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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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애아 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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