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브드 알 카디르(Abd al-Qādir) - 1
- 아브드 알 카디르 -
아브드 알 카디르, 본명 아브드 알 카디르 이븐 무히이딘(Abd al-Qādir ibn Muḥyiddīn)은 카빌리족 수피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19세기 중반 알제리를 침공한 프랑스군에 맞서 성공적으로 저항을 수행한 저항군의 리더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무히 앗 딘(Muhyi al-Din) 역시 수피교 공동체의 지도자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인 알제 태수의 반대한 죄로 여러 번 투옥되는 일생을 보냈습니다. 프랑스군의 알제 침공으로 정신없는 사이 탈출한 그는 곧바로 지지자들을 규합해 조국을 침공해 온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습니다.
1832년 오랑을 점령한 프랑스군과 현지 동맹군을 기습한 것을 시작으로 저항을 시작하였는데 젊은 아브드 알 카디르가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 또한 바로 이때였습니다. 같은 해 그가 태어난 마스카라(Mascara) 일대의 부족들이 그를 프랑스군에 대한 ‘지하드’를 이끌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총사령관 직에 오른 그는 알제리 일대의 부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급속히 세력을 불려나갔습니다. 아브드 알 카디르의 세력이 프랑스군에 대항할 만한 규모까지 커지게 되자 위협을 느낀 프랑스 측은 협상에 나서 오랑의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데미셸과 아브드 알 카디르는 오랑과 마스카라 일대에 대한 아브드 알 카디르의 지배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는데요, 문제는 아브드 알 카디르가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조약에는 반영되지 않았는데 조약을 성문화 하면서 프랑스어로 몰래 이를 적어버리게 된 겁니다. 이 조항은 훗날 프랑스에게 아브드 알 카디르를 공격할 빌미를 주게 됩니다.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결 낫게 된 아브드 알 카디르는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알제리 서부와 중부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영토에 (틀렘센Tlemcen)을 수도로 하는 에미르국을 세운 뒤 부족들이 자체적으로 다스리던 지역에 관료제를 도입하고, 교육 시설과 관공서를 설립, 농업과 공업 육성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부국강병을 추진하였습니다. 알제리의 첫 번째 총독으로 임명된 데를롱 백작은 아브드 알 카디르의 이러한 행보를 별로 경계하진 않았지만 오랑의 프랑스군 사령관이던 카밀 트레젤(Camille Alphonse Trézel)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 아브드 알 카디르를 따르는 부족과 그를 이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트레젤의 이간계는 성공을 거두어 오랑 근처에 거주하는 부족들 몇몇이 프랑스의 지배를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부족의 배신에 격분한 아브드 알 카디르는 곧 바로 군대를 파견했고 프랑스군은 곧바로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양 측은 위협 편지를 몇 차례 주고 받은 끝에 1835년 6월 아브드 알 카디르가 마스카라의 프랑스 영사를 추방하였습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죠. 양 측은 시그 강 일대에서 대규모 충돌을 벌였지만 승부의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보급품이 부족해진 프랑스군이 아르주로 후퇴하면서 아브드 알 카디르는 이를 추격, 마크타(Macta) 강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데를롱 백작은 총독 자리에서 경질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습니다.
- 토마 뷔고 -
데를롱 백작의 후임은 바로 저번 글에서도 언급된 노련한 장군 베르트랑 클로젤이었습니다. 클로젤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 같은 해 12월 마스카라를 함락시켰고 1836년 1월엔 수도 틀렘센까지 함락시켰습니다. 후퇴한 아브드 알 카디르는 게릴라전으로 전환, 틀렘센의 프랑스군을 지속적으로 위협하였고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토마 뷔고(Thomas Robert Bugeaud) 장군이 새로 파견되었습니다. 1836년 6월 시카크(Sikkah)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브드 알 카디르는 뷔고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완전히 게릴라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8. 아브드 알 카디르 - 2
- 1839년 경 아브드 알 카디르의 에미르국 영토 -
하지만 아브드 알 카디르의 에미르국은 여전히 굳건했고 뷔고는 이들을 와해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드 알 카디르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피해가 늘어나게 되면서 결국 1837년 5월 타프나(Tafna)에서 양측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조약의 결과 아브드 알 카디르는 알제리 영토의 다수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도시 몇 곳만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드 알 카디르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휴전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새 도시를 세우는 등 국력 회복에 치중하고 프랑스 지배 하의 주민들로 하여금 평화적 또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 프랑스에 저항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프랑스를 알제리에서 몰아내는 데에 자신만만했던 아브드 알 카디르는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령 알제리의 주요 도시였던 알제와 콩스탕틴을 잇는 도로 일대의 지배권을 주장하였고 프랑스는 바로 “좆까”를 시전, 1839년 12월 철수했던 콩스탕틴을 다시 점령하면서 양 측은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1840년 한 해 동안 아브드 알 카디르는 게릴라전을 수행,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때 프랑스군 사령관은 콩스탕틴을 점령하는 공로를 세운 발레 백작 실뱅 샤를이었습니다만 그도 역시 게릴라전에는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1840년 12월 아브드 알 카디르에게 승리를 거둔 바 있던 뷔고로 교체되었습니다.
뷔고는 게릴라전에 대한 대응책으로 초토화 작전을 꺼내들었고 초토화 작전의 시행과 동시에 아브드 알 카디르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프랑스가 국력을 쏟아부으면서(11만 명, 당시 프랑스군의 약 3분의 1을 알제리에 쏟아부었습니다) 아브드 알 카디르는 ‘스말라(Smala)‘라고 부르는 일종의 이동식 사령부를 세워 계속해서 옮겨 다녔으나 1843년 5월 사령부의 위치가 발각되면서 결국 병력의 대다수를 잃고 맙니다.
- 1843년 스말라 전투, 이 전투로 아브드 알 카디르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
- 아브드 알 카디르의 항복 -
- 1860년 다마스쿠스에서 벌어진 유혈사태 도중 마론파 기독교인들을 구해낸 아브드 알 카디르 -
모든 것을 잃은 아브드 알 카디르는 모로코로 도망쳐야했고 모로코 술탄 및 모로코 국경 일대의 부족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저항에 나섰으나 1844년 모로코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박살이 나면서 술탄의 지원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군 및 모로코군의 추격을 받던 아브드 알 카디르는 추격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쳐 다녔습니다만 1847년 12월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아브드 알 카디르는 항복 조건으로 타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신변의 보장을 내세웠으나 프랑스는 약속을 어기고 프랑스 본국으로 강제로 압송, 1852년까지 옥살이를 하다 풀려나면서 시리아로 망명하였고 1883년 다마스쿠스에서 7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시리아에서 생활하는 동안 프랑스도 미운 정이 들었는지 매년 연금을 보내주었고 프랑스 영사관과 협력하여 드루즈인들과 마론파 기독교인들 간에 벌어진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아내는 공로를 세우면서 서구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각종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865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 각계의 환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아브드 알 카디르는 제국주의에 맞선 알제리의 영웅으로 많은 알제리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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