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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아렌델행 횡단열차 (1)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12 21: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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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행 횡단열차 (1) ebook으로 읽기

https://online.pubhtml5.com/vwdc/rkfs/#p=21





Prologue


딱딱한 매트리스에 등을 딱 붙이고, 철골을 타고 우르르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곰곰이 돌이켜 보노라면, 그래, 지금껏 겪은 모든 기묘한 일들은 이 열차에 오르고부터 시작됐다. 애초에 처음 봤을 때부터 무슨 늙은이들이 피울 법한 파이프처럼 생겨먹어 마음에 들지 않던 이 둔중한 기관차에서는 그녀가 기대했던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나 온몸을 울리는 여행의 박진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황량한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따분히 흐르는 풍경만 지겹게 훑으며 시간의 물결을 고스란히 떠안을 뿐. 깊은 산골에 숨어 있다 행인을 약탈하려는 산적도, 마을을 위협하는 괴물도 없이 재미와 스릴이라곤 전혀 없는 이 무미건조한 여행이란 버터 없는 빵이요, 생크림 빠진 케잌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수없이 많은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가는 데 재미를 들였던 그녀에게 시작과 끝이 정해진 채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이 일정은 여행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형편없는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다.



그녀 앞에 웬 소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겨울을 끝내러, 내 동생을 만나러 가고 있어요.”



이것이 카산드라가 소녀에게서 들은 첫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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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행 횡단열








1. 카산드라 / 로윰(Royaume)


또 그놈이다. 머리를 감싸 쥐고 카산드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 아래 보이는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소용돌이친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나무 바닥이 자신을 붙잡고 아래로 끝없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이봐요.”



부드러운 손길이 팔을 잡았지만 카산드라는 거칠게 사내를 쳐냈다. 뾰족한 짜증이 사방에서 머리를 안팎으로 쿡쿡 찔러온다. 주먹만 한 푸른 보석이 그녀를 조롱하듯 머릿속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닌다. 눈앞에 알짱거리는 보석을 쫓다 카산드라는 그만 눈을 꼭 감아버렸다. 놈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수록 어지럼증은 더욱 심해졌고, 몸은 통제를 잃고 하염없이 휘청거린다. 의지대로 버텨주지 않는 몸을 부여잡느라 신경이 자꾸만 날카롭게 곤두선다.



“당신, 많이 취했어요.”



제 어깨에 올린 손을 힘껏 쳐내려다 그녀는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술잔이 엎어지며 탁자며 옷이 흥건하게 젖는다.



“괜찮아요?”



뒤집힌 의자를 바로 세워 주고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사내를 가만히 노려보다 카산드라는 탁자 기둥을 잡고 스스로 일어섰다. 선득한 푸른 섬광이 여러 개로 쪼개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며 초점을 흐릿하게 찢는다. 빙글빙글 도는 눈앞, 코를 찌르는 싸구려 술의 악취, 며칠 묵은 듯 푹 절은 땀 냄새와 상한 음식 냄새. 머릿속에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것만 같다. 두개골이 그 벌레가 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둬 버린 것만 같다.



빌어먹을 대가리에서 그 놈을 빼내야 해, 어서.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질 때까지 카산드라는 괴성을 질러댔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독처럼 스며드는 비웃음, 주인장의 호통. 수많은 감각들이 물감처럼 질척하게 뒤섞이다 희미해진다. 커다란 손이 또 한 번 어깨를 잡고, 카산드라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집었다.



툭.






2. 카산드라 / 로윰(Royaume)


눈꺼풀 너머 스며드는 빛이 너무도 따가워 카산드라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허리며 팔꿈치, 무릎에서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커튼을 뚫고 선명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머리를 사방에서 지끈지끈 조여 온다. 갈라지는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키는데 식도에서부터 진한 알코올이며 치즈 향이 올라왔다.



역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카산드라는 허겁지겁 양동이를 찾아 속에 든 것을, 입이 더 이상 음식 파편을 쏟아내지 못할 때까지 게워냈다. 내장이 뒤틀리고 가래가 식도를 긁는다. 구역질을 멈추고 나니 이제는 위액이 지나간 자리로 타는 듯한 갈증이 입 안을 진하게 달군다. 아래층에서 주인장에게 물을 좀 얻을 수 있을까. 누가 제 방으로 물을 좀 가져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카산드라는 침대에 벌러덩 몸을 던졌다.



쥐가 파먹은 듯 천장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천장에서 작은 파편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다 아래로 똑 하고 떨어진다. 니글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카산드라는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하나 둘씩 긁어모아 보았다. 소실되거나 빠진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마지막 남은 은화 다섯 닢 중 두 닢을 양파 스프와 싸구려 럼 값으로 주인장에게 던져 줬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더듬다 동전이 모조리 사라져 있음을 깨닫고 카산드라는 절망했다. 말도 안 돼, 럼을 네 병이나 처먹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머리가 이렇게 아프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자니 다시금 두통이 진하게 몰려온다. 놈이 눈앞을 또다시 휘젓지 않는 게 다행이다. 이 상황에서 놈이 깨어났다간 정말 이성을 잃고 미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바닥만 보며 한참을 앉아 있는데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땡전 한 푼 없는 내가 어떻게 이 방에 묵게 된 거지?



생각이 머리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저절로 비척거리며 아래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인장에게 물도 좀 얻을 겸 어젯밤 있었던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듣고 싶었다. 스툴에 걸터앉아 주인장에게 막 말을 걸려는데 앞쪽에서 반가운 시선을 보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낯이 익긴 한데 저렇게 반갑게 인사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자가 로윰에는 없었으므로 도리어 은근한 거부감이 치민다.



“술은 좀 깼어요? 어젯밤엔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실눈을 뜨고 더듬거리며 카산드라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우리 아는 사이였던가요?”



수상쩍게 자신을 응시하는 카산드라를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다.



“기억 안 나요?”



카산드라는 여전히 경계의 빛을 꺼트리지 않았다.



“정말? 어제 그 난리를 쳐 놓고 기억 안 난다고 한다니, 아무리 술 때문이라도 그렇지 섭섭한데요?”

“이 사람 아니었으면 당신, 어제 여기서 쫓겨날 뻔 했소.”



물과 스프가 거칠게 그녀 앞에 떨어진다. 커다란 맥주잔에 든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한 잔 더 달라며 카산드라는 주인에게 잔을 불쑥 내밀었다. 냉랭한 시선이 잠시 그녀 위에 머물다 주인은 기어코 한 마디 덧붙였다.



“이 스프 값도 저 사람이 내 준 거요. 세상에 어디서 저런 사람이 나타났는지. 운 좋은 줄 아쇼.”



찬물이 식도를 씻어 내리자 한층 속이 가벼워진다. 입술에 묻은 물을 혀로 핥으며 카산드라는 남자의 용모를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갈색 구레나룻이 턱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칼은 가르마를 타고 단정히 옆으로 떨어져 있다. 귀족적인 기품이 색이 짙은 눈썹, 흔들림 없이 또렷한 눈동자, 오똑 솟은 코 구석구석에 스며있고, 힘 있게 떨어진 얼굴 윤곽은 선이 굵고 뚜렷하다.



“어디 지방 귀족이라도 되시나 봐요.”



관찰이 끝나고 스프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카산드라가 입을 열었다.



“유틀란트 반도 쪽 사람인가?”

“예리한걸요?”



장갑을 벗어 그는 손을 내밀었다. 카산드라는 악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곱다란 용모와는 달리 오랫동안 험한 일을 해 온 사람처럼 손은 딱지와 물집 자국으로 무척 거칠었다.



“한스입니다.”

“카산드라예요.”



주인장이 갖다 준 물을 식도로 단숨에 들이부은 후 카산드라는 스프를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텅 빈 속이 채워지니 몸에 밴 알코올 냄새가 한결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카산드라, 뭐가 그리 힘들어서 어젯밤엔 혼자 술을 푸고 있었어요? 그것도 숙녀께서 이런 허름한 여관에.”



숙녀라는 말에 카산드라는 날카롭게 고리눈을 뜬다. 예민한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지 한스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제가 뭔가 잘못-”

“첫째, 저는 숙녀가 아니에요. 둘째, 초면에 너무 개인적인 질문은 실례라고 배우지 않았나요?”



뜻밖에도 어쩌면 조금 드세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그는 곧바로 사과했다.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 숙박비에다 이 식사도 모두 제가 값을 치뤄 줬는데, 사정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냥 하릴없는 어느 귀족의 궁금증이에요. 입가에 묻은 스프 자국을 닦으며 카산드라는, 어제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에게 이토록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한스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오직 그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 다른 꿍꿍이는 전혀 엿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설령 이 남자가 아무 속셈 없이, 정말 그저 순수한 의도에서 질문을 던졌대도 낯선 이에게 무턱대고 제 사정을 줄줄 읊을 순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제 처지를 하소연하는 게 썩 기분 좋은 일도 아닐 뿐더러, 이야기가 끝난 이후 그가 내비칠 반응 또한 긍정적이리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선드랍이니 문스톤이니 하는 고대의 마법 이야기는 떠올리기만 해도 골이 지끈거렸고, 또 이 남자가 그걸 완전히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을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카산드라는 제 정신의 심연까지 깊숙이 뿌리박힌 문스톤의 잔해를 이렇게 축약해서 소개했다.



“불면증이 좀 있어요.”

“불면증이라....... 뭐, 술이 잠 오는 덴 특효약이니까요. 또?”



또? 카산드라는 주저하다 가까스로 대꾸했다.



“또라니 무슨.......”

“정신적인 문제도 있는 거죠?”



정신적인 문제, 그 단어가 카산드라의 머릿속을 뾰족하게 찌른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한스의 태도는 비난이라기 보단 중립적이고 신중한 쪽에 가깝다.



“많이 불안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 있군요?”



숟가락을 소리 나게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카산드라는 한스를 가만히 노려봤다. 하지만 한스는 그녀의 시선에 더 개의치 않는다.



“나쁘게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말아요. 듣자하니 귀족이나 심지어 여왕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심각한 자들이 많다던데,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뭐 대수겠어요.”

“귀족이나 여왕이요?”



지체 높으신 분들이 겪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지, 당장 한 끼 식사조차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는 사람이나 전쟁 통에 반병신이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 호사를 누리면서 별달리 무슨 근심이 있다고?



하긴 매일같이 성에 칩거하며 시종이 갖다 주는 음식이나 꼬박꼬박 받아먹으니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테지.



“대체 여왕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게요. 저도 말로 전해들은 소식이라, 정확한 전모는 모르지만요.”

“세상에 어느 왕이 그런대요? 진짜 그런 왕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아는 유일한 왕족이자, 세상만사 아무 걱정 없이 해맑았던 라푼젤을 떠올리며 카산드라는 한스의 말이 혹시 그저 재미삼아 지어낸 것은 아닌지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한스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저 북해 너머, 아렌델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아렌델이라. 글쎄, 저는 이 대륙에서만 주로 돌아다녀서.”

“아름다운 나라죠. 북쪽에 있으면서도 사계가 뚜렷하고, 겨울이면 눈으로 온 세상이 덮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고요. 겨울이 되고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찾아오면 오로라가 눈밭에 내려앉는데, 세상이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걸 보노라면.......”



하고 말끝을 흐리며 한스는 비스듬히 틀어 앉아 아련한 시선을 멀리 던졌다. 상념에 잠긴 그의 모습은 이미 극야가 드리운 얼음 왕국에 가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산드라는 그의 상상을 끊었다.



“그래서, 아렌델의 왕께서도 그런 정신 문제를 겪고 계시다?”

“정확히는, 왕이 아니라 여왕이요. 안나 여왕.”



입술을 비죽여 헛웃음을 흘리며 카산드라는 비아냥거렸다.



“그 여왕께선 왜 그런대요?”

“소문으론, 제 언니와 남편을 잃은 슬픔 때문에 그런답니다.”

“언니와 남편을? 전쟁 때문인가요, 혹은 병에라도 걸린 건가요?”

“둘 다 아니에요.”



재미있는 가십거리를 씹듯 한스는 빙글빙글 덧붙인다.



“자발적으로 떠난 거랍니다. 자기 가족마저 자신을 등지다니. 그만큼 그 전에도 여왕이 한 성격 했단 거겠죠. 아렌델 민심도 들끓고 있답니다.”

“재미있네요.”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듣다, 카산드라는 문득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해 주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저명한 선생 하나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요.”

“선생? 어떤 선생을.......”

“제가 태어난 서던 제도에 샤르코라는 교수가 있어요. 한때 병원 대표 자리에까지 오른 분인데, 이런 쪽으로 유명하답니다.”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볼 수나 있을까요?”

“추천장을 써드리겠습니다.”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스의 미소가 너무도 부드러워서, 카산드라는 그 표정에서 그 어떤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떠나온 이래 수없이 많은 세상의 오물을 뒤집어쓰며 그녀 나름대로 세운 행동 수칙이 있었고, 그 중 첫 번째가 낯선 사람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건은요?”



한쪽 눈썹을 가만히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는 한스의 표정은 당황스러움과 흥미로움이 반씩 섞인 모습이다.



“조건이요?”

“잘 곳, 먹을 것, 게다가 제 개인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려 하시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걸 보면 분명 제게 원하는 게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순수한 의도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곤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방랑 생활 5년차에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카산드라를 보는 한스의 눈빛이 변한다.



“좋습니다.”



의자를 끌어당겨 그는 카산드라에게 깊숙이 몸을 숙였다. 품에서 손바닥만 한 그림을 꺼내 카산드라 쪽으로 주욱 들이밀며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 여자를 지켜주세요.”



사진을 얼굴에 가까이 붙이고 카산드라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한 갈래로 곱게 땋은 금빛 머리칼이 어깨 위로 도드라지는 여자다. 분을 여러 번 덧칠한 것처럼 새하얀 얼굴이며, 눈꺼풀 위로 옅게 칠한 보랏빛 마스카라, 장미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은 어쩌면 아이들이 갖고 놀 법한 인형을 연상케 한다.  얼음을 품은 것처럼 이지적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윤곽이 뚜렷한 얼굴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지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콧바람을 한숨처럼 한 번 내쉬며 한스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녀의 이름은 엘사. 제가.......아끼는 여자예요.”



‘아낀다’라. 카산드라는 한스가 마치 그 단어를 사람이 아닌 물건에 적용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엘사.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 것 같아, 빈 접시 바닥에 숟가락을 콩콩 찧으며 카산드라는 머릿속을 더듬어봤다. 하지만 도통 떠오르는 바가 없다. 며칠 전에 마을을 지나치며 우연히 들은 이름이었을 수도 있었고, 가판대에 놓여 있던 신문에서 얼핏 보았을 수도 있었다. 알프스에서 양을 치는 소녀나 동네의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도 붙을 법한 흔한 이름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소녀의 초상을 바라보며 고민해보다, 기억의 흔적을 더 더듬어보지 않기로 카산드라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 여자는 아마 내일쯤 아렌델로 가는 열차에 오를 겁니다.”

“열차요?”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한스는 미간을 곧추세웠다. 5년, 길다면 긴 방랑 생활이었지만 카산드라는 주로 도보나 말을 이용했지, 단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 없었다. 대륙 이곳저곳에서 철도가 생기고, 역사가 들어서며, 기관차가 도시와 도시 사이를 누비는 철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지만 카산드라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걷거나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데 익숙한 그녀에게 생소한 문물이기도 했고,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옮겨 다니며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들이 즐거운 그녀에게 걸맞지 않는 여행 방식이라 여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표는 준비해 뒀습니다. 오르기만 하면 돼요. 이용하는 방법은 알죠?”

“무, 물론이죠.”

“내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얘기해요. 하지만 만약 의뢰를 수락한다면.......”



한스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와 함께 수표 한 장을 써서 자신만만하게 들이밀었다. 그 액수에 경악하여 카산드라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잡일이며 여러 의뢰를 수락해 가며 지난 일 년 동안 번 금액을 모두 합쳐도 택도 없을 정도의 돈이었다.



“좋아요.”



계약서의 남은 절반을 고이 접어 넣으며 한스는 덧붙였다.



“아렌델로 그 여자를 꼭 무사히 데려다줘요. 그리고, 그녀가 안전한지 상태와 경과를 적은 종이를 매일 자정에, 식당칸과 5호차 사이에 있는 선반 아래 놓아주세요. 그 여자가 무사한지 제가 알 수 있도록.”

"당신도 이 열차에 오를 건가요?"

"물론."

"그러면 당신이 직접 지켜주지 그래요? 당신 사람이라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스의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끼는 사람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죠.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시려나."



굳은 그의 동공 이면으로 숨은 비밀스런 기운을 카산드라는 잠시나마 엿보았다.



“알았어요.”



우선 제안을 수락하는 척 카산드라는 이 귀족 사내를 조사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한스는 간단히 인사하곤 여관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웅웅 맴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기차예요. 기억하세요, 그녀의 이름은 엘사예요.”



잠시 잠잠했던 푸른 보석이 또다시 눈앞에 흐릿하게 피어오른다. 거친 숨결 끝에는 아직 옅은 알코올 향이 남아 있다. 뜨뜻하게 달궈지는 이마를 짚으며 카산드라는 숨을 골랐다. 소녀의 사진, 역명과 차량 번호, 시각이 찍힌 기차표, 엄청난 금액을 담은 수표와 의뢰를 수락했다는 계약서, 그리고 한스의 이름이 적힌 추천장이 차례로 머릿속에 흩날린다. 뾰족하게 벼린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려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카산드라는 아직 숙취가 남은 탓이겠거니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봐, 주인장. 여기 물 한 잔만 더 줘.”



더러운 앞치마 차림으로 옆을 지나는 주인에게 컵을 던지듯 안겨 주며 카산드라는 오늘 밤에는 잠이 잘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연재 시작부터 작가의 말 같은 거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 글은 왠지 써야 할 것 같다.


이번 글은 쓰면서 되게 힘든 작품이었어. 2002문학대회나 저번 장편을 쓸 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소재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데 플롯은 자꾸만 꼬이고 글은 마음먹은 대로 안 써졌거든.
고작 팬픽인데 뭘 그리 신경쓰냐고 할 수 있는데 퀄리티를 올리려고 한 번 욕심을 내니까 이게 걷잡을 수 없더라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는 말이 정말 맞나봐


문학들 보니 그림을 함께 넣으니까 훨씬 몰입도도 높고 사람들이 더 많이 클릭하고 봐주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삽화를 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
그런데 막상 삽화를 받아보니까 이 글이 과연 저런 삽화를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에 겁이 좀 나더라


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자면 '아렌델행 횡단열차'는 시즌1, 2로 나눠서 진행될 것 같아.
그런데 시즌2는 아예 제목부터 다를 거고, 1을 보지 않아도 이해가 될 스토리로 쓸 거야.


서사가 길어져도 부담갖지 않도록 쓸 테니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즐겨 줬음 좋겠다


시즌1은 지금 2/3쯤 써 놨는데 그래서 매일 연재는 못 할 것 같고, 3일 주기로 연재할까 생각중이야
읽고 개추랑 후기 댓글 남겨주면 기쁠 것 같아


아 그리고 라푼젤 tva 안본 프붕이들 많니? 앞으로 볼 프붕이라면 스포일러가 될 법한 내용이 많은데, 스포일러 싫어하는 프붕이면 tva보고 읽는 걸 추천할게.

연재주기가 긴 만큼 tva다 보고 와도 아직 연재하고 있을거야....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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