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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에 씌다

부들쿠스(110.15) 2018.12.17 22: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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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과 안대
 


 

 현유치의 머리카락은 검다. 내 머리카락에도 나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지만, 현유치의 머리카락은, 뭐랄까, 일말의 여지도 없이, 오롯이 새까맣다. 왜, 가끔은 지구도 태양을 모조리 가리기 버거워서, 밤하늘이 더러 밝은 날도 있지 않은가. 장담하건대, 광공해에 갈색으로 얼룩진 그런 밤하늘보다는 훨씬 검다. ‘검다 못해 푸른 머리’라고들 하듯이. 현유치는 부러울 정도로 완연한 흑발이다.

 그의 머릿결을 따라 스며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 사이에 들어찬 그림자를 세면, 꿈도 없이 자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냄새조차 그윽한 검은 향기가 난다. 아… 먹 향이던가. 검은색이, 짙은 연기처럼, 극지방에 있는 숲에 부는 바람처럼 번진다. 이윽고 덩굴처럼 손을 뻗고 뿌리박아 내 속에 깊이 든다. 마음속에 벅찬 먹물이 차오른다.


 

 언제였던가,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어림잡아 1년은 가까이 되었을 테다. 처음 만났을 때 현유치는 대뜸 나를 안았다. 헌 창고에서 있던 일이다.

 나는 그의 품에서 꼼짝없이 무력하였다. 안긴 채로, 내 은빛 머리카락이 그 가슴팍부터 곤두박질쳐서, 배 언저리에 흘러 닿았다. 그는 아랑곳않고 내 정수리에 코를 박은 채 킁킁댔다. 그때도 현유치는 새까만 머리에, 모자랄 것 없는 단발이었다. 밑에서 바라보니, 한밤중에 갈대밭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턱 높이에서 머리칼 끄트머리가 일제히 흔들렸다.

 그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더니, 제 머리카락을 넘겨서 엮고 나를 뒤집어썼다. 인간 냄새를 가까이서 맡자 비로소 힘이 났다. 괜히 가발 귀신이 된 것이 아니런가…. 이런 식으로 영기를 빨아야 살다니…. 오랜만에 영체를 뻗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희미하게 푸른 몸이 불쑥 솟았다. 나는 머리 위에 올라앉은 채로, 그의 면전에 고개를 거꾸로 내밀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는 물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귀신 들린 가발이네요.” 내가 아직 이름을 몰랐던 여자는, 그의 귀밑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꼬았다. “이거 인모예요?”

 “내 머리카락이야. 어쩌다가 영물이 돼서 썩지도 않아. 너는 이름이 뭔데?”

 “유치예요. 현유치.” 이름은 현유치였다.

 그는 뺨을 타고 내리는 내 머리카락을 그러잡고, 코 앞에 가져다대어 냄새를 맡았다. 수십 년짜리 고독과 더불어 쌓인 먼지 냄새가 콧날을 타고 흘렀다. 영기가 도로 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백 년짜리 고독을 깨운 여파는 컸다. 그 옅은 콧바람으로 말미암아, 나는 창호지로 만든 마음에 구멍이 뚫려 속이 줄줄 새었고, 투명한 심장에 고여 있던 허여멀건한 동맥혈이 조수처럼 밀려 나갔다. 그렇게 빠져서,

 조수는… 바다가 되어… 나가서… 심해로 가라앉는다. 은빛 물살도, 은빛 물비늘도, 해구에 대여 검게 젖어 든다.


 

 구한말을 지내고 일제가 들어설 즈음하여, 경성에는 한 여자가 살았다. 꼬마 계집종에겐 손위에 누이가 있었는데, 그도 계집종이었다. 꼬마 계집종은 단발하지 않았지만, 계집종의 누이는 단발머리였다. 딴에는 모던 걸 흉내를 낸 모양이었지만 영락없이 귀엽게 보였다. 둘 다 흑단 같은 머리였다. 껴안고 고개를 묻으면 온통 밤하늘 뿐이었다. 검을 로(盧)자 쓰는 노씨라서 그랬나 보다.

 계집종의 누이는 나와 또래였다. 교회인가 성당엔가를 다니는 교인이었는데, 글자도 모르는 것이, 내가 학교에 있을 동안 천주니 예수니 하는 것들을 알음알음 들어 왔다. 그러고는 제 주인어른 되는 이, 그러니까 가친 몰래 내게 복음을 가르쳤다. 아버지가 아셨어도 어머니 덕에 무사했을 것이다. 작은 여종도 가끔 성경에 담긴 구(句)나 잠언 같은 것을 외워서 내게 들려 주었다. 아마 제 스스로 복음의 이치를 깨치지는 못했을 것이고, 누이에게서 배운 것을 그저 옮겨 온 모양이었다.
 

 그는 마침내는 주일에 내 손을 잡고 사원에 다니기까지 이르렀다. 어머니 또한 신자였기에 아버지가 보내는 못마땅한 눈살이 한층 무뎠다. 정작 예배당에 나가 보니, 계집종 누이는 나보다 더 예배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천주를 알고는 있으나, 선교사의 말마따나 온 마음을 바쳐 사모할 줄은 모르는 듯했다. 나는 정신없이 이끌려 다니느라, 혼기조차 계집종 누이의 손을 꼭 쥔 채로 보내 버렸다.
 

 다만 즐거웠음이다. 일명 신여성들이 비혼이라니 어쩌구 떠드는 것을 나는 마뜩잖게 여겼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천주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계집종 누이의 손을 포개고 있으면, 나는 포구에 닻을 내린 배처럼 가만히 매여 있고 싶었다. 그 봉긋하고 옴폭한, 희고 부르튼 손바닥이, 내게는 여정을 끝마치고 반기는 요람처럼 보였다. 고운 손금 하나하나에 내가 살 곳이 있었다.
 

 그 손바닥에서 나는 구태여 출(出)하려 들지 않았다. 내게 있어 가(家)란 오로지 그 손바닥 위에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로 출가(出家)라는 것은 내 천자문에서 빠졌다. 나는 계집종 누이의 손바닥 위에 出家라고 썼다. 한문을 읽지도 못하면서, 그는 햇살같이 웃었다.
 


 

 현유치는 내게 가발 씨라는 이름을 지었다. 라노벨스러운 작명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을 조금만 덜 봤다면…. 우선 한국인의 말법을 쓰는 자로서 ‘아무개 씨’ 같은 작명은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원래 이름을 잊은 지도 오래였기에, 나는 군말없이 새 이름을 받았다. 그래 원래 이름은 뭐였던가. 금金… 간艮…? 유치에게 나는 가발 씨였으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름이었다.
 

 유치는, 크고 작은 코스프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나를 쓰고 나갔다. 코스프레 동료들조차 돌려막기에 혀를 내둘렀다. 행사장에 있는 코스프레 대기실에서, 그는 뭇사람에게 둘러싸여 옷에 잡아먹히고 분칠을 당했다. 시종일관 의자에 앉아 평온한 표정이었다. 내가 숱한 캐릭터들을 알음알음 배운 것도 이곳이었다.  히비키나 베르니, 카시마, 카구팔, 마카로프, 구아구, 멘마, 에밀리아, 타카네, 인형, 시계탑의 레이디 마리아, 분식집 애쉬와 시계방 애쉬, 블러디 메리, 화방녀까지….
 

 나는 어찌어찌 생머리부터 트윈테일까지 소화했고, 유치도 만족스러워했다. 다만 유치는 눈코가 날카롭고, 턱이 똑바른데다 입이 깊어, 앳된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확실히 유치는 어떤 캐릭터건 쿨뷰티로 바꾸어 버렸다. 재능이라면 재능이고 저주라면 저주일 것이다.
 

 “가발 씨, 모자는 불편하지 않아요?” 그때 나는, 베르니가 쓰는, 챙이 달린 하얀 수병 모자를 쓰고 있었다.
 

 “딱히 안 불편해.” 나는 그의 정수리에 머리카락을 파묻고 엎드린 채 말했다. “그러는 너는, 머리에 귀신이 붙어 다니는데 안 힘들어?”
 

 “안 힘들어요. 나중에 어깨가 좀 뻐근한 거 빼고.”
 

 흰 손가락이 내 머리를 파고들어 속을 간질였다. 무심하고 덤덤한 움직임인데도 깊이 닿았다. 나는 그의 뒤에 매달린 채로, 희미한 손을 뻗어, 만져질 턱이 없는 어깨를 힘껏 주물러 주었다. 그러면 세상을 노니는 유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유치의 머리는 새까만 안대 같았다. 이제 세상에 내 몸뚱아리라고는 머리카락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난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숱한 세월을 잠깬 채로 보낸 나는, 유치의 머리에 얹히고 나서 비로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묵향에 파묻혀 몸이 둥실 떠오르면, 흰 구름 아래 새까만 밤이 피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머리카락은 바람이 서로 스미듯이 뒤섞였다. 화선지에 농묵이 선을 그어 산줄기가 내리고 큰물을 이루듯. 언젠가 이런 말을 한 번쯤 털어놓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유치의 머리에 씌인 채였다. 유치는 어리광부리듯 엉겨드는 나를 말없이 받아 주었다. 머리에 얹히고 내가 문득 말이 없어지면, 유치는 내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는 가발을 벗지도 않고 집에 돌아왔다. 곤히 잠든 아이를 업은 듯이 말이다.
 


 

 가발에 깃든 귀신이 사람을 마구 저주하고 해코지하는 괴담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저주 같은 것은 걸 줄을 몰랐다. 유치가 가끔 어깨가 무겁다고 호소하는 것을 빼면 말이다. 내가 어째서 유령이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죽음을 자각했을 때쯤 문득, 내 인모로 만든 가발에서 튀어나왔을 뿐이다. 나는 내 육신이 바스라졌는지 여전히 썩고 있는지 몰랐다. 내 시신은, 백골이 되었을까, 화장했을까.

 유치는 여종의 누이와 닮았다. 제 누이와 닮았으니 당연히 꼬마 여종과도 닮았다. 흑단 같은 머릿결이 흡사하다고 나는 느낀 모양이었다. 조금 기르면 고와도 보이련만…. 그러나 유치라고 하면, 목덜미에서 치맛자락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 말고는 다른 머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지면 곧장 잘라 오는 유치를 보고 나는 내심 안도했다.

 “항상 단발머리인 이유라도 있어?” 어느날 나는 그렇게 물었다.

 “글쎄, 왠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유치는 제 옆머리를 꼬았다. “가발 쓰는 데는 머리 짧은 게 편하기도 하고.”

 “그래?” 유치의 어깨너머로 만화를 바라보며 나는 또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하고 다녔는데?”

 그때 나는 유치 등에 업혀 있었다. 합법 만화 공유 사이트 ‘바쿠바쿠’에는 온갖 만화가 올라왔다. 옛적 만화와는 썩 달랐다. 갇혀 있는 창고에는 구닥다리 책 뿐이었다. 이따금씩 들어오는 신간을, 동굴에 엎드린 부랑자가 이슬을 핥듯 소중히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것도 바깥 세계에서는 구닥다리가 되어, 영원한 유배 생활을 위해 창고에 들어온 책들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어릴 때부터니까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유치는 눈을 왼쪽으로 굴렸다. “그러고 보면 코스프레 하기 전부터 이 머리였네.”

 “십 년 넘게 굼바였다고? 너도 참 한결같다.” 나는 당시 굼바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언 이십 년이죠. 그 전에는 기억도 없고.” 유치가 말했다. “할머니가 예쁘다고 그랬던가. 엄마였나?”


 

 “인전 아가씨두 모던 껄이로군요.” 아마도 여종은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농담조이면서, 씁쓸함을 채 감추지 못한 말씨였을 것이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애는 가위를 손가락에 끼우고, 거울을 들어 내 앞에 보였다. 자요, 색경 대령입니다요… 하고 말했다. 흰 두피가 보이게 머리가 짤막해져서, 나는 영락없는 비구니 꼴이었다. 머리 뒤편으로, 창 너머로 보이는 흰 하늘이, 창틀에 진 그림자에 잘려 있었다. 내 얼굴 또한,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림자를 온통 끼얹은 듯 앙상했다.

 “모껄이라? 이애, 말도.” 나는 웃음이 비어져나오는 것을 힘도 없이 흘리고 있었다. “이러면 영락없이 모던 뽀이다. 곧 죽어도 곱게는 가야지.”

 “후후, 그래요, 모던 뽀이.” 아이는 보자기 위에 떨어져내린 머리카락을 한 올씩 주웠다. “그래두 어여쁘신 걸요. 아이, 아쉬워라. 이럴 줄 알았음 진작에 아가씨한테 시집갈 거.”

 그렇지, 진작에 시집갈 거…. 그때는, 신여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말 그대로 대로에 활개치던 시절이었다. 날이 밝을 때마다 문득문득 한길가를 따라 가로등과 양옥이 솟구쳤고, 금세 인력거와 차가 나다녔다. 나는 시대가 쏟아 내는 격류가 어딘가로 이끌어 주기만을 바라며, 바닥이 없는 나룻배에 한없이 매달려 있었다. 개화에도, 종교에도, 민족 어쩌구에도 마땅히 관심이 없던 나는…. 무엇에 빠져 있었나….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리고 순한 여종이, 얼굴이 한없이 어여뻤다. 시집갈 걸 그랬다는 말끝을 어지간히 흐리는 것도 귀여웠다.

 “시집 들려니?” 나는 손을 뻗어, 계집종의 뺨을 쓰다듬었다. 창 밖에서 여윈 가로수 그늘이 밀려들어, 내 손 위에 포개어 앉았다.

 “농담두….” 계집종은 얼굴을 붉히며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필시 앙상한 내 손가락이 썩은 가지처럼 무서웠음이다. “아가씨두 나두… 똑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혼인을 헌단 말예요?”

 꼬마 여종의 얼굴에서, 그 누이의 얼굴이 보였다. 무서워하고 떨던…. 그러면, 내 기억은 좋은 것만 보려는 듯 저절로 시간을 되감아서, 그 누이가 웃던 시절의 화상을 비추었다.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고 나다니던 시절. 앞서 뛰던 그 애가 입은 흰 옷이 가없이 펄럭이고, 검은 머릿결이 찰랑였다. 꼬마의 얼굴에 그 모습이 비쳤다. 나는 한없이 슬퍼졌다.

 몸은 이미 쇠진해진 지 오래였다. 죽을 팔자였으나 죽지 않았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마땅했다. 어쩌면 그저 염라대왕께서, 영이에게 인사하고 올 말미를 주신 걸지도 몰랐다. 아, 그래…. 계집종 이름은 영이였지. 노영….

 “이애, 그야 물론 농담이지.” 나는 손을 올려, 계집종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올이 굵고, 새 먹처럼 새까맸다. “너두 곧 혼기가 차려니…. 좋은 신랑을 찾아야지, 영아. 한없이 멀거니 있다가 나처럼 되지 말구….”

 계집종이 주워 모은 머리카락은 제법 많았다. 아이 손에 들기로는 두어 움큼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차마 모조리 그러쥐지도 못했을 따름이다. 강에서 먹빛을 모조리 풀어 버리고 온 것인지, 온통 희게 세어 있었다. 늙은이 같은 은빛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받아 함에 넣었다.

 겨울이 되어 나무가 낙엽을 모조리 떨어 버리듯, 나는 머리를 모조리 벗겨진 채 앉았다. 영이는 내게 와서 와락 안기더니, 옷섶에 제 얼굴을 비볐다. 고운 머리가 더없이 까맸다. 나는 울음을 울컥 터뜨리고 고개를 여종의 정수리에다 파묻었다. 새까맸다.

 “아가씨, 울지 말어요….” 영이는 고조곤히 읊조렸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도 코 먹는 소리를 냈다. “고운 아가씨, 자! 시집서껀 뭐든 들어 드릴게요, 백년해로합시다, 자, 아가씨…. 울지 말구.”


 

 “여유가 되면 가발 씨를 코스프레 해 볼 생각이에요. 개인적인 작업으로….”

 내 유령 몸뚱아리가 보이는 사람은 아마도 현유치 말고는 없었다. 유치는 내가 가발과 똑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했다고 했다. 그야, 그 가발이 내 머리카락이니 그렇지만…. 또, 조금 앳된 얼굴에, ‘함락당한 츤데레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귀신이 된 것은 복이런가 했다.
 

 그는 눈동자 색을 잘 알아볼 수 없다며, 그러나 잘 들여다 보면 분명 붉은 빛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생전 내 모습과 얼추 같았다. 몸이 죽어 바스라져도 혼백이 그 형상을 받는다면, 시체가 부패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옷은 때때로 내 기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데, 보통 흑백 원단에 레이스가 달린 소담스러운 드레스라고 했다. 아무튼 유치는 그 나름대로 스케치를 해 본 모양이었다. 나는 ‘고스로리’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생전에 해 본 차림새였다.
 

 “대학생인데 안 바빠?” 그나저나, 내 모습을 구현해 준다는 말에, 나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이제 곧 2학년이면서, 막장인생이네.”
 

 “나름 과제니 뭐니 하면서 바쁘게 산다는 것들도, 헤아려 보면 여가 시간은 차고 넘쳐요. 저는 그걸 성실하게, 남김없이 코스프레에 꼴아박는 거죠. 학점도 괜찮고.”
 

 “마음에 드네.” 아무튼 유치와 더 붙어 다닐 수 있는 것은 축복이었다.

 내가 유치를 사랑하는 것은, 한없이 검은 머리카락과 한없이 여유로운 마음 때문이었다. 방금, 사랑한다고 했던가. 끝없는 구멍이나 드넓은 동굴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검어 보인다. 그런 것처럼, 유치의 마음은 바닥도 없이 한없이 깔린 솜이불처럼 푹신했다. 사뿐한 저항을 받으며 그 마음에 가라앉다 보면, 언젠간 바닥에 가볍게 내려앉을 것도 같았고, 심장에 닿을 것도 같았고, 영원히 떨어질 것 같기도 했다.

 해구에 빨려드는 잠수부처럼, 나는 그 끝없는 먹 바다의 끝이 궁금해졌다. 궁금해진 순간 이미 빨려든 것이다. 끝이 없는 것이 끝이라, 악당이 맞을 최후에나 어울리는 말이다.


 

 “인전… 차마 방도가 없지요. 하나님두 멀리 계시러니….” 그때 한강은 넓고 잠잠했지만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에헤헤, 아씨…. 말이 길지요. 아씨가 가려실 때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집종의 누이가 내미는 손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동생의 이름이 영이인 것도 확적히 떠오르는데…. 또, 영이도 그 누이도 내 집에 딸린 여종이었는데, 어째서 나는 그만을 ‘계집종의 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직까지도 모르거니와, 이젠 영영 알 수 없다. 그는 햇살같이 환해서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또, 새까만 먹빛이라 채 울 수 없었다. 나는 울고, 또 웃고 싶었다. 계집종 누이는 둘 다 할 수 있었고, 나는 그게 부러웠다.
 

 “사랑해.” 나는 눈물도 미소도 없이 말했다. “다시 보자.”
 

 “네, 아씨.” 영이의 누이는 환하게 울면서 서럽게 웃었다. 미소지어 곱게 구부러진 입가로 눈물이 몰렸다.
 

 얼른 강물로 저 눈물을 씻어 주는 수밖엔…. 저 눈물은 고작 내 두 손에 담기는 물로는 미처 닦기 어려우니, 온 한강 물을 모두 써서 씻어 주는 수밖엔… 없었겠다….
 

 그때 강은 은빛이었다. 한강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각기 일어나서, 두물머리를 짚고 쓸려 온 토사가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강은 한 뼘 양보 없이 은빛이었다. 겨울이 올 길을 비키지 않고 때아니게 흐린 하늘이 비친 것이었을까.
 

 나는 한참 강 밑을 내려다보았다. 영이의 누이는, 빨래와 설거지에 부르튼 손이 아물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거친 손가락 사이를 내 흰 손이 비집었다. 이는, 의기(義妓) 논개려나…. 코와 귀를 잘라 가는 무시무시한 사내 왜장은 없었고,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논개였다.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서양의 무용수들처럼 발을 디뎠다. 서로의 사랑을 꼭 깍지 낀 채로 물살에 몸을 던졌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낙화암의 궁녀들을 떠올렸다. 떨어지는 꽃이려니….
 

 얼마나 지났을까. 계집종 누이는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고, 나는 다만 떠밀리고 떠밀려서, 밤섬인가 노들섬인가 하는 하중도의 둔치에 대였다. 죽는 날까지 영영 빼내지 못할, 폐에 들어찬 한강의 탁류를, 나는 뻐끔뻐끔 뱉어 냈다. 계집종의 누이가 나를 밀쳐 올렸는지, 내가 계집종의 누이를 밟고 올라 헤엄쳤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서양 의학은 신기로웠다. 배를 타고 가던 코쟁이 사제가 나를 구해 내서, 어떤 수술을 했다던가, 필경 넋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시절을 따라 마침 겨울이 와르르 밀려 오고 있었던 때였다. 건기침을 하는 나를 보고, 내 아비도, 꼬마 계집종도, 나를 살린 천주교 의사도 내가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폐병은 날이 갈수록 녹진한 기침을 얽었다. 때마침 창으로 흰 구름이 방에 들 즈음이었다.

 “영아.” 나는 침대에 앉아 불렀다. “이애, 가우 좀 가져오련.”

 “네에, 아가씨.” 영이는 실 자르는 가위를 들고 왔다.

 꼬마 계집종은 울기라도 했는지 눈두덩이 온통 붉었다. 나는 조만간 귀밑머리를 풀었다. 영이가 가위를 들고 머리 둘레를 누볐다. 그렇게 물이 빠진 머리칼을, 모조리 잘라 냈다.


 

 현유치는 까만 날에도 빨간 날처럼 놀았다. 그는 종강이 되자, 이국에 흐르는 강에 풀린 가물치처럼, 세상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널찍한 지느러미에 쓸려 강바닥에는 검은 흙이 일었다. 가물치가 노는 탁류는 먹물과 진배없었다. 그러고 보니 가물치를 현례(玄鱧)라고도 했던가.

 나는 유치를 따라서 G-STAR니 코믹월드니 하는 행사를 쏘다녔다. 내가 살아 있는 눈으로 보았던 세상과는 달랐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숨이 붙어 있던 그때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빛으로 된 세계. 산 채로 여기 왔다면, 나는 옛날 사람이니 눈이 멀었으려나…. 더없이 새까만 유치는, 나로 하여금 머리를 가린 채 그 사이를 떠돌았다. 얹혀서 다니는 시간은 퍽 즐거웠다.

 유치는, 대학생 혼자서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썩 고독한 짓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난 매달려 다니는 유령 신세라, 산 사람 두셋이서 나다니는 사이에 애매하게 끼게 되었다. 또 그 가운데서도 곧잘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 없이 유치에게 매달려 있다가, 고요하고 청명한 고독이 이방인에게 방해를 받기라도 하는 양이면 더없이 화가 치밀었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아서 질투하는 거예요, 가발 씨?” 유치는 장난스럽게 말하곤 했다. 아무렴 질투일 리가 없다.


 

 “그래서 가발 씨는 무슨 캐릭터예요?” 하루는 쏘가리가 이렇게 물었다. G-STAR에서였나, 그랬을 것이다.

 쏘가리라는 것은, 송가린이라는 작자한테 내가 붙인 별명이다. 쏘가리는, 고운 매화문 비늘에 나부죽한 얼굴이 퍽 예쁘게 생겼지만, 실상 잡아먹지 못하는 것이 없다. 유치가 키가 큰 것인지 쏘가리가 작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쏘가리는 꽤 앳된 면상에, 이마가 유치의 턱에 닿았다. 알록달록한 가발을 잘도 쓰고 다녔는데, 유치보다야 유명한 코스어였다. 하꼬인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귀신인데, 가발에 붙어 사는 귀신.” 유치가 대답했다. “은발 메이드복 미소녀예요.”

 나는 유치의 머리에 씌인 채 잠자코 말을 듣고 있었다. 계집종 둘이 드는 수청을 받아 지내던 내가 메이드라니 우스웠다. 쏘가리는 연신 유치에게 추근덕대며 다가갔다. 무심한 손을 부여잡고 제 팔에 끼웠다. 두 사람은, 사람과 땀과 연기가 들어찬 회장을 누비고 다녔다. 유치는 둘 다 코스프레 대회에 나간다고 했다. 코스프레 대회라니…. 나는 가장 무도회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유치는 그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거기다 트윈테일에 안대까지 있으면 완벽하겠네요….” 쏘가리는 멍청한 얼굴로 헤실댔다. “잠깐, 그런데 그런 갓캐릭터가 어디 나와요? 다음 분기 신작인가. 아니면, 오리캐인가요?”

 사진기를 든 기자인가 하는 인간이 와서 무언가 부탁하는 통에, 둘은 대화를 멈추었다. 잠깐 자세를 잡아 주자, 기자가 몇 장 사진을 찍어 갔다. 회장에 있는 남자들은, 뚱보도 꺽다리도 태반이 안경잡이였다. 코스프레를 할 때가 아니면 나는 유치의 머리에 얹힐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곳일수록 방해꾼은 많은 법이다. 가장 거슬리는 치는 물론 쏘가리였다.

 “제가 아는 유령인걸요.” 유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명한 작품은 아니라.”

 “나 여기 있다, 쏘가리야.” 나는 말했다. 그러자 유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발 유령 미소녀 가발 귀신 메이드라고요?” 쏘가리가 말했다. 유령과 귀신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그거 완전 오른쪽인데! 《제가 아는 유령인걸요》라고 했죠? 어라, 정발은 안 된 것 같네요….

 합법 만화 공유 사이트 ‘바쿠바쿠’가 폐쇄된 마당이었다. 나 또한 유치 어깨너머로 만화를 보는 일이 왕창 줄었다. 그것만으로도 성가실 지경인데, 쏘가리는 유치의 두 손을 붙잡아 제 가슴팍에 붙였다. 주제넘는 조바심이 들끓었다.

 먹빛 강에 쏘가리가 끼어들어, 아름다운 비늘을 뽐낸다. 가린(嘉鱗)이란 그런 뜻일 것이다. 주제넘는 년은 눈밖에 난다고…. 쏘가리는 강바닥을 헤치고 어지간한 생선을 잡아먹는다. 나는 듬직한 가물치가 쏘가리를 먹어치워 주기를 다만 바랐다.
 


 

 아침에 기침이 심해져서, 나는 정오를 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창으로 찬바람이 마구 들었다. 영이가 아무리 창틀에 솜을 발라도 꼭 한 줄기씩은 샜다. 몸이 더없이 더워져서, 나는 기꺼이 냉풍을 마셨다. 무슨 행사라도 하는지 거리가 시끌시끌하고, 집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땀이 송골져 이마에 머리카락이 엉겼다. 죽음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치열하게 자라는 머리카락에 나는 놀랐다.

 “아가씨….” 그렇지, 영이 하나는 꼭 남아 있었다. “의원을 부를거나요?
 

 영이는 내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 같았을 테다. 짐짓 놀라더니만, 제 이마를 거기다 부볐다. 제 열로 식히겠다는 것인지, 참 아기새 같은 짓을…. 뼈다귀에 살갗이 들러붙은 손으로, 나는 여종을 붙들어 안고 토닥였다. 마침내 영이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래 입원을 하시지 그랬어요!” 외치고, 이내 어린애 같은 울음이 벽을 긁었다. 속을 모조리 뱉어 내는 소리가. “아가씨…. 낭중에… 내가 크면요… 아가씨한테 시집 갈 터이니까, 죽지 마셔요. 네? 아가씨….
 

 여종이 주인집 딸에게 하는 말치곤, 제법 당돌한 소리를 냈다. 천주를 믿어서였을까. 천주를 믿었다면, 계집 된 몸으로 아가씨에게 시집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천주를 믿었다면 계집 된 몸으로 아가씨에게 사랑한다 속삭이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계집종은 그렇게 말했다. 계집종은 천주를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천주를 믿고서야, 그 계집종은, 이렇게 안겼으랴…. 또, 스스로를 강물에 던지는 파국으로까지… 나를 이끌었으랴….

 꼬마 여종은 은빛 눈물을 흘렸다. 구름과 창을 뚫느라 허옇게 물이 빠진 햇살을 받아서 그랬다. 가슴팍이 온통 축축했다. 나는 병석에 있는 동안에 땀을 이만큼도 빼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손등으로 그 뺨을 훑었다. 여종의 땋은머리가 단정했다.

 “아가, 가우 좀 가져오련.” 나는 말라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다급했으리라.

 영이는 곧장 가위를 들고 왔다. 행여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걸음이었다. 나는 그가 묶은 댕기를 풀어헤치고 침대 옆에 앉혔다. 그는 무얼 하려는지 아는 듯 잠자코 따랐다. 뒷머리를 잘 그러모아 한 줌으로 쥐고, 가위로 단칼에 잘랐다. 삐죽하게 썰린 머리칼 끄트머리가 턱 높이에서 일제히 흔들렸다. 올이 굵고 새까만 머리칼이 내 손에 쥐였다.

 “너두 인전 모껄이야.” 난 앙상하게 웃었다. “단발허니 참 어여쁘다…. 이 머리칼은 내가 갖고 가려니까, 혹 묻으려면 함께 묻어라.”

 손가락을 움켜서 잘려 흔들리는 터럭을 그러쥐었다. 코 밑에 대고 향을 깊게 마시자, 짙은 연기처럼 먹 향기가 돌았다. 난 여종에게서 잘라낸 머리채를 가슴팍에 품고서 침대에 올랐다. 흑단 같은 머리채로 말미암아, 세어 버린 머리에 다시 검은 물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참 이쁘다, 이애.”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전번에 자른 머리는 있지, 장농 맨 아래 서랍엘 보면 함이 있다. 거기 두었으니까, 좋을 대로 네가 쓰련.”

 “어여쁘다니, 아가씨….” 귀여운 단발머리가 된 채로, 영이는 다시 울었다. “진작 말해 주시지, 그럼 진작에 자를 걸요….”

 나는 곧장 누워서 잠을 잤다. 깨기란 어려웠다. 백 년 가까이 걸렸으니.


 

 유치는 나 말고도 가발을 몇 개 더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늦은 오후에 햇빛을 받은 복숭아같이 고운 금발, 오래된 저택의 문짝 같은 풍성한 고동빛 가발, 온갖 총천연색까지…. 그러나 귀신 들린 가발은 내가 유일했다. 그는 이따금씩 가발을 모두 한데 늘어놓고, 조촐한 상을 벌여서 고사를 지내 주었다. 
 

 “초 피워도 안 싫어하시는 걸 보니 잡귀는 아니신가 봐요.” 유치는 청탁 대신 밀키스를 따르면서 말했다. “자아, 마음껏 흠향하시기를.”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가발은 왜?” 신위로 가발걸이를 대 놔서, 나는 영락없이 제사상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혹시 모르죠. 쪼매난 역신이라도 붙어 있을지 모르고. 차별대우했다가, 앙심이라도 품었다간.”
 

 유치는 넋이 멀쩡히 붙은 인간이었기에, 내가 보이기로서니 역신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내게만 제를 올리는 것도 그림이 조금 이상한지라 이렇게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저 사실대로, 코스튬 플레이어로서, 가발에 묘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면 될 일이다.
 

 상에 올라간 과자는 더러는 유치의 입으로 들어갔다. 산 사람과 제삿밥을 나눠 먹는 꼴이다. 그렇담 이것은 제사가 아니라 식사 아닌가. 나는 허공에 쪼그려앉아, 접시에 가득 담긴 나초를 집어서 씹었다. 신경을 쓴 건지 단지 요행인지, 나초는 홀수였다. 현세에 있는 그릇에 담긴 나초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내 손에는 나초의 혼을 끄집어낸 듯 투명한 나초가 잡혔다. 귀신은 이렇게 공양을 받아 먹는 것이다.
 

 “나초가 아니라 토르티야 칩이에요.” 그가 정정했다. “과카몰레도 치즈도 없으니까.”
 

 “나초.” 나는 반박하고 나서 잔을 들었다. “일부러 소금도 안 뿌린 걸 고르고, 신경 쓴 거야?”
 

 “토르티야 칩이에요. 글쎄요. 어차피 나중에 음복하는 건 저니까,” 이미 충분히 음복하고 있으면서, 유치는 그렇게 말했다. “제 취향대로 고른 거예요. 무염식.”
 

 유치는 대뜸 상 위에 올라간 잔을 들어 마셨다. 내가 들고 있는 잔이었다. 잔 주둥이에 그의 입술이 압력을 조금 받고 눌렸다. 그렇게 지그시 입을 대면, 필경 타액이 약간 묻고, 치아 사이 벌어진 틈으로 음료가 흘러든다. 생경한 맛이 혀에 돌자, 직접 닿기라도 한 듯 입술이 얼얼했다.
 

 “아, 아니…. 잠깐,” 나는 입을 닦으려다 말았다. “내가 마시고 있는데.”
 

 “제가 산 밀키스인데 안 되나요?” 그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눈을 내리깔고 대꾸했다.
 

 “안 되는 게 아니라, 그, 잔이 같잖아, 잔이…. 이러면, 입이 닿는 거니까.”
 

 그는 갑작스레 휴대폰을 덮어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채로, 상 위에 떠서 내려다보는 나를 마주보았다. 시선이 깊이 박혔다. 참척한 관심과 어떠한 탐구심이, 머리카락만큼이나 새까만 유치의 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겸손한 학생이 하는 자세로 꿇어앉았고, 총성을 기다리는 주자처럼 준비했다. 갑작스레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피하고 고개를 숙여 나초를 집었다.
 

 유치는 내 손에 눈을 뚫어져라 붙이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상으로 성큼 팔을 뻗었다. 손끝에 내가 집어올린 조각이 붙들렸다. 영락없이 무언가를 노리는 눈빛이 아니었나. 물러섬 없이 칼을 뽑는 무사런가…. 사람이 먹는 나초와 귀신이 먹는 나초가 같아서, 누구 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영락없이 삶과 죽음을 뒤섞어 욕되게 하는’ 짓이었다. 손이 떨렸다.
 

 “너, 너…. 무슨….” 손가락에 힘이 쏠렸다. 유치가 내 앞으로까지 얼굴을 들어올렸다. 코가 맞닿았다.
 

 나는 긴장한 채 나초를 내 입에 밀어넣었다. 그도 기다린 듯이 덩달아서 입술에 물고, 입을 곧장 내밀었다. 전광석화였다.
 

 키스인가?
 

 유치는 내 쪽으로 고개를 꺄룩 들이민 채, 눈꺼풀을 닫아 놓았다. 이승에 육신을 붙이고 있는 사람과, 저승에 한 쪽 발을 걸친 귀신은 서로 닿을 수 없다. 나를 간지럽히는 것은 오직 거리 뿐이었다. 오직 그 가까움이, 산 사람끼리 하는 입맞춤보다 더욱 강한 압력이 되어 입술을 밀쳤다. 산 사람이, 귀신이 먹고 있던 제물을 입에 넣으면, 그것은 간접적으로나마 입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산 사람이 귀신을 보며 그에게 입을 맞추면, 그것은 귀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화선지같이, 옅은 은빛으로 물든 방 안에, 내 고요한 산하에, 먹빛 물줄기가 파닥파닥 튀었다. 마음에서 수많은 강이 순식간에 태어나고 또 번졌다. 나는 비로소 느꼈다. 유치는, 적어도 나 하나가 있는 세상 정도는 먹물로 공히 덮어 버릴 위인이었다. 큰 붓을 휘둘러, 굵은 먹선으로 화폭을 메워 버리는 화가…. 그 농묵 속에는 또 바다가 들어 있고, 산이 들어 있으며, 하늘이 들어 있었다. 그 속에서는, 내가 있을 새로운 세상이 또 피어났다.
 

 “표정이 볼 만하네요, 가발 씨.” 유치는 가만히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입술이 마구 닿아 간지러웠다. 아니, 닿았을 턱이 없다.
 

 “웃기지… 마….” 목소리를 잘 낼 수 없었다.
 

 나는 가발에 도로 숨었다. 된바람이 일어서 양초 두 자루에 붙들려 있던 불이 일시에 꺼졌다. 유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후후 웃더니, 상을 치우고 이불에 들어가 버렸다. 분명 닿았지만 아무래도 닿지 않은 입술이 애타게 가려웠다.
 


 

 입술은 얼얼한 채로 사흘을 갔다. 유치가 색 있는 가발을 쓰는 날이면 나는 조급해졌다.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은 조금 어린애 같았지만 끝내는 통했다. 그러나 아무리 유치가 어리광을 들어 주는 성격이었기로서니, 가방 구석에 고이 모셔지는 꼴을 면키는 어려웠다.

 한 번은 쏘가리가 가발을 벗는 것을 보았다. 어깨 위에서 넘실대는 갈색 단발이었다. 햇살을 흠뻑 적신 나무껍질처럼 건강하고 따뜻해 보였다. 유치가 머릿결을 칭찬하며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가을걷이하듯이 모조리 뽑아 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잘 되지 않았다. 버둥대는 것을 보고 유치는 또 웃었다. 흑단 머리카락이 기우뚱하게 내렸다.

 유치의 뒤통수에 코를 박고 지내느라 잘 보지는 못했지만 끝내 느낀 바로, 유치의 단발머리는 섬세했다. 올이 굵어 윤기가 돌지만, 어째선지 빛을 받아서 나는 백색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치의 머리 위로 엎드리면 백 년간 미루었던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꿈도 없이 잘 잤으나 요사이 부쩍 꿈이 잦아졌다. 영이와, 그 누이의 꿈이었다. 옛 길을 도로 걷듯이 나는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고는 그리운 얼굴에 다가가 맞부딪쳤다. 이는, 유치가 나에게 입맞췄듯, 닿지 않았다. 귀신보다도 더욱 실체가 없는 꿈은 도무지 껴안을 수 없었다. 꿈은 스러지고 또 다음 밤을 기다리는 것이라, 나는 차마 더 이상 영이와 그 누이를 마주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유치의 머리에 올라 있지 않았다. 오늘은 다른 녀석 차례였다. 가방에 틀어박혀 있자니 쏘가리와 유치가 떠드는 것이 들려 왔다. 멀리서 유치의 머리를 바라보며 생각하자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유치의 머리에 매달리면 계집종 자매 꿈을 꾸는 것은, 단지 밀린 꿈이 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인지, 유치의 머리카락이 지닌 색채 때문인지.

 “명작 만화를 찾아보기 어려우면 서글퍼요.” 쏘가리는 더없이 쾌활했다. “망할 출판사 놈들이 정발을 해 주어야 할 텐데. 아니면 제가 역이랑 식자를 해서라도 말이죠!”

 “맞아요. 바쿠바쿠도 터졌고….” 유치는 말했다. “요즘은 웹툰도 괜찮은 게 많더라고요. 영어가 되면 라인 웹툰에 〈슈퍼소닉 걸〉이라던가?”

 쏘가리는 유치의 손을 부여잡고 걸었다. 겉보기에는 좋은 백합 콤비였다. 깍지낀 손 때문이 아니고, 서로 단란하게 코스프레와 덕질을 해서도 아니라, 단지 웃음이 찬란해서… 그렇게 보였다. 유치의 눈웃음은 누구와 닮아 있었다. 그것이 누구였는지 나는 짐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날 유치와 쏘가리는 서로 가발을 벗고 돌아가 지하철을 타고 헤어졌다. 지하철에서 유치는, 가방에서 나를 꺼내서는 말도 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집 근처로 와서 보는 눈이 없어졌을 때야 유치는 가발을 썼다. 나는 나서지 않았지만, 잠든 게 아니라는 걸 용케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루가 길었죠? 수고했어요.” 유치는 나를 가발걸이에 걸어 놓고, 욕실로 향했다.

 꺼풀꺼풀 벗어던지는 옷가지를, 나는 물끄러미 보았다. 때가 늦어서 이미 밤하늘이 방 깊숙이 들어왔다. 달과 조수의 원리. 바닷물이 빠지면 밤하늘이 든다…. 당연한 섭리다. 곧 유치는 나를 머리맡으로 하고 이불에 들어가 누웠다. 보송보송한 향기가 풍겼다. 유치의 머리 위에서 잠들지 않는 밤이면, 나는 항상 창고에 갇혀 지내던 때같이 고독하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줄을 잡아당겨 불을 끄면 세상은 현유치로 가득 찼다. 그러나 진짜 현유치는 한 뼘 떨어져 있어 닿을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깨어 있었다. 달빛이 밝아 성가셨다.

 “가발 씨,” 유치는 한참을 조용히 누워 있다가 말했다. “제가 쏘가리 씨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유치가 잠든 줄로만 알았다. 짐짓 놀라서 힉 하는 소리를 냈다. 분명 현유치와 쏘가리는 다정한 연인의 꼴이었다. 하지만 유치의 마음은 바닥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듯 아리송했다. 어떤 연애상담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추궁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이는 좋아 보이던데,” 나는 천 년만에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거야, 뭐야.”

 “나는 가발 씨를 사랑해요.” 유치가 팔을 쑥 뻗어, 가발걸이에 걸린 나를 몸으로 당겼다. “쏘가리 씨랑은 사이가 좋고, 또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건 가발 씨야.”

 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동안 멍청하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유치는… 닮았다…. 먹 같은 머릿결도, 차분한 눈웃음도. 영이였는지, 아니면 그 여종의 누이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둘을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귀신의 입으로도 차마 담아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

 “너, 누군가…. 환생한 거니?” 산 사람인 유치가 알 턱이 없는데도 나는 물었다. “엄청 닮은 사람이 있어, 너하고…. 너는, 누구였니?”

 유치는 말없이 잠옷의 앞섶을 열었다. 침묵은 모른다는 대답과는 달랐고, 부정과는 더욱 달랐다. 작은 단추가 하나씩 빠졌다. 나는 유치의 부드러운 가슴팍에 파묻혔다. 있을 리 없는 심장이 두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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