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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유일하게 1910년까지 저항한 구한말 호남의병

2006.12.20 16: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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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일어선 을미년 의병   동학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을 독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하였다. 국제 정세를 주시하던 민씨 정권도 친러 정책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수단을 써서 명성황후를 죽이고 친일 정권을 내세워 중단된 개혁(을미개혁)을 실시했다.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근대적 우편 사무를 실시했으며,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일제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제천의 유인석과 춘천의 이소응, 여주의 박준영 등에 의해 의병이 시작되었다. 나라의 국모가 왜적들에게 시해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백성의 분노가 물끓듯하였다. 배달 겨레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 일이었기에 최익현같은 이는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특히 유인석의 제천 의병은 충주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한말 의병의 기본 정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서 그 주창자는 기정진과 이항로였다. 이들은 나라를 내집같이 지키고 임금을 어버이처럼 여겨 국모의 시해와 단발령에 반기를 들었다.   동학혁명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이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하나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의병이고 다른 하나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아전들의 의병이었다. 장성 의병은 기우만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문인들인 기삼연, 정의림, 고광순, 김익중 등이 앞장섰다.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했다. 기우만은 2월에 장성부의 향교에 들어가 뜻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주로 달려갔다. 그는 나주 관찰부 참서관 안종수를 죽이고, 불안해하는 나주 의병을 격려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은 광주 향교에 본부를 두어 기삼연을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그가 거느린 장성 의병은 300여 명으로 기세를 떨쳤다. 여기에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렬이 합세하여 전라도 13개 고을을 휩쓸었다.   그런데 친위대 중대장 이겸제가 진주 의병을 진압하고 전라도에 들어와 해남군수 정석진을 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체포하여 의병을 위협했다. 또 남로선유사 신기선은 기우만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종용하였다. 이때 기삼연은 의병의 해산 종용은 임금의 뜻이 아니며 여기에서 군대를 해산하면 모두 화를 당한다고 반대했으나, 기우만은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호남의 초기 의병은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으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에 다시 봉기하여 민족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호남 지역의 호응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1905년 11월 일제 침략자들은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망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여 민족 정기를 발휘했다. 상소 활동, 죽음으로써 항거한 자결, 언론에 의한 규탄, 밀사 파견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 을사오적 암살 활동,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등이 있었으나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인 투쟁은 의병 항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06년 6월 최익현의 봉기였다. 전직 관료 최익현은 당시 척사파의 우두머리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을사조약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중 송병선의 순절 소식을 듣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보성의 백경인, 이백래 등 뜻 있는 선비들과 함께 나라를 걱정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는 정의롭고 충성심이 강한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태인으로 출발하여 임병찬을 만났다.   최익현은 4월 8일 담양 용추사에서 기우만과 이 지역 선비 50명을 만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모두가 힘을 합하여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순천, 낙안, 고흥,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전달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어 일본이 저지른 죄 16가지를 성토했다. 그 중요 내용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 동학농민전쟁 때 궁궐을 침입한 죄, 을미년의 국모 시해, 이권 침탈, 토지 점령과 친일 분자 추천 죄, 한일의정서의 강요, 충신과 공론을 막은 죄, 일진회 협조와 애국 단체 탄압, 한국인의 매매, 통신 기관 장악, 고문 정치, 차관 제공과 한국 재정 소비, 을사조약 강요, 통감의 정치 간여, 이민 규정 제정 등이었다. 이후 그들은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에서 거병하였다. 그러자 흥덕의 고용진이 포수 30여 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 4월 15일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고를 접수하였다. 16일에는 순창을 점령해서 부서를 새로 정하고 왜병 10여 명을 성밖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4월 21일 최익현 부대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과 순창에서 대치했는데'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하여 싸움을 중단하고 무장을 해제하고 말았다. 최익현 자신은 임병찬 등 12명과 함께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결국 일본군에 의하여 쓰시마 섬에 끌려가 순절하였다.   최익현의 봉기는 당초 기대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 당시 최익현 등이 전남 11개 군에 발송한 격문과 태인, 정읍, 순창 방면 등으로의 행군은 호남의 의병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호남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 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06년 11월 백낙구가 고광순, 이광선 등과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 순천에 진출하였다. 1907년 3월 화순에서 양회일, 이백래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 능주, 동복을 휩쓸었다. 남원의 양한규는 고광순과 합심해서 남원을 점령했다.   담양의 고광순은 창평 출신으로 고경명의 후손이며 을미사변 때 기우만, 기삼연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창평에서 봉기했다. 그는 최익현이 체포되어 의병이 흩어지자 남원의 양한규와 연합 전선을 펴 남원읍을 점령했다. 양한규가 순국하자 흩어진 병사를 수습해 화순으로 돌아왔다. 고광순은 화순의 능주, 동복, 구례, 광양, 순천을 무대로 활약하다가 세력이 약해지자 군대를 해산하고 창평에 은거했다. 그는 1907년 8월 고제량, 고광훈, 신덕균, 윤영기 등과 함께 창평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동복의 순사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후 구례의 연곡사에 머무르면서 각지의 의병을 불러모으니, 동복, 순천, 곡성, 광양, 구례 등지에서 호응하여 의병이 1천 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정찰대가 기습해 9월 17일 구례 연곡사에서 고광순 등 13명이 전사했다.   백낙구는 광양에 은거 중인 이항선, 노원집, 채상순, 유병우 등과 의병을 일으켜 1906년 9월 20일 순천읍을 기습하려고 출동했다. 그런데 각지의 응원 부대가 연락 착오로 도착하지 못해 기다리던 중 체포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1907년 봄 석방되어 의병에 가담했다가 태인에서 전사했다. 이처럼 최익현 이후에도 호남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의병 운동에서 의병 전쟁으로   을사조약 이후로 의병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에서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이를 문제삼아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강압적인 양위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억누르면서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 정부가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법령의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고등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를 받을 것,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정부의 관리로 임명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통감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분명해졌다. 또한 각부의 차관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일신협약에는 5개항의 비밀 각서가 있었다. 그 안에 한국의 군비 감축, 재판권과 징세권의 탈취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한국을 합병하는데 방해가 되는 군사력을 없애려고 그들은 비밀리에 군대 해산을 추진했다. 이에, 1907년 8월1일 제1연대 제1 대대장 박승환은 자결로 항거하였다. 이를 신호로 제1연대 제1대대 병력과 그 소식을 들은 제2연대 제1대대 병력 전원을 비롯하여 1,629명의 군인들이 해산식에 참석을 거부하고 항쟁을 계속했다.   해산 군인의 봉기는 즉시 전국 각 지방의 진위대로 파급되었다. 군대 해산 이후 의병운동은 전례 없이 강화되고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일본군과의 교전에 참여한 의병 수가 약 1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12월에는 이처럼 강화된 전력을 배경으로 이인영을 중심으로 한 '13도 의병연합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은, 1907년 9월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과 거의 같은 시점을 이룬다. 이때부터 의병은 전국에 흩어져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각 지방의 의병은 지리적 이점과 민간인들의 협조로 일제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응징하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지역은 한말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고, 전 주민이 의병으로 활약하였거나 그 배후 지원 세력이었다. 특히 서북 지역 의병들은 노령산맥과 그 지맥이 연결된 담양, 장성, 광주, 영광, 함평, 나주 등지에서 활약했다. 큰 맥은 기삼연, 김용구, 김태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와 그 뒤를 계승한 전해산 의병, 그리고 많은 독립 부대의 활동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1907년 9월 기삼연 부대의 장성 봉기라 할 수 있다.   성재 기삼연(奇參衍)은 장성군 황룡면 하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위정척사론의 일가를 이룬 기정진의 조카로 기우만의 삼종숙(아버지의 8촌 형제)이었다. 기삼연은 1895년 기우만이 나주에서 봉기했을 때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이 국왕의 해산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자 크게 실망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라고 개탄하였다.   기삼연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1907년 8월 9일 장성의 수록산에서 봉기하였다. 부대의 명칭을 '호남창의회맹소'라 하였고, 병력은 약 5백 명에 이르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아래와 같이 부서를 정했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 기삼연 통령 : 김용구 선봉 : 김태원 참모 : 김엽중, 김봉수 종사 : 김익중, 이석용, 전해산, 김치곤, 박영건, 정원숙, 박도경, 성철수 중군 : 이철형, 김봉규 후군 : 이남규 군량 : 김태수 총독 : 김효인 감기 : 이영화 좌익 : 김창복 우익 : 허경화 포대 : 김기순 기삼연 부대는, 단일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독립 부대의 연합 조직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조직이 독자적으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기삼연 봉기 이후 호남 지역에서는 새로운 의병들이 봉기했는데, 대부분 기삼연 부대와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제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김태원, 김율 형제를 비롯하여 김용구, 이석용, 오성술 등은 독립 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기삼연의 참모나 부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보다 뒤늦게 독립 부대를 형성한 박도경, 조경환, 김공삼, 전해산 등의 의병장들도 기삼연 봉기에 참가한 인물들이었다. 또한 1908년 새롭게 출현한 의병 부대의 상당수가 이들로부터 다시 분화되었다. 기삼연의 봉기 이후 호남의 의병 부대는 시위적 성격을 탈피하여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립하기보다는 그들의 배후를 기습 공격하는 유격전의 형태로 바꾸면서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9월 10일 장성읍을 습격하였다. 부대의 활동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는 1907년 12월 7일 영광군 법성포의 공격이었다. 약 100여 명의 의병들은 영광군 법성포를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습격하였다. 그들은 순사 주재소와 일본인 가옥 6호를 불태운 후 철수했다. 법성포에는 총 400호 가운데 7호의 일본인 가옥이 있었다.   기삼연 부대는 1908년 1월에도 계속 담양, 장성, 함평 등 여러 읍과 광주의 일본인 농장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일부 일본 군경이 주둔한 시읍을 제외하고는 전남·북 경계 지역 일대는 완전히 의병의 세력권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순사 분파소, 세무서, 관청, 일진 회원, 일본인 상점, 그리고 우편 취급소 등을 공격하였다. 의병들의 공격 목표는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확대되었고 싸움 방법도 훨씬 다양해졌다.   기삼연은 담양의 추월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통령 김용구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순창 복흥산에 들어갔다.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에서 요양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는 가마에 실려 광주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이튿날 재판없이 사살되었다.   같은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김태원 부대는 나주 부근을 본거지로 하여 함평, 장성, 영광, 담양 등 각지에서 투쟁을 벌였다. 김태원은 1909년 1월 3일과 22일 4백여 명을 이끌고 함평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 1명을 살해하였다. 또 26일에는 장성군 비치에서 기삼연, 이철형 등과 연합하여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다시 2월 1일 광주 무등산에서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던 중, 일본 경찰과 수비대로 구성된 토벌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일본군 지휘관을 살해하였다. 일제는 김태원의 의병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기삼연이 폭거를 기도함에 그 아우 김율과 같이 투신하여 성대한 폭도를 합치고, 혹은 일진회원을 참살하고 폭행, 협박함으로써 민재(民財)를 약탈하며, 출몰이 자자하여 광주, 나주간에 발호하고, 기삼연이 죽은 뒤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여 군도를 차고 쌍안경을 가지고 다니며, 그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 실로 무시할 수 없어 군대와 경찰의 큰 두통거리라 할 수 있다.   김율은 문필에 능하여 박사라고 칭하였다. 기삼연, 형 김태원 등과 호응하여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그 규모가 한창일 때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형제의 의병 활동은 1908년 3월 김율이 체포되고 그해 4월에 김태원이 전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김용구는 1907년 8월 11일 영광에서 봉기하였다. 그해 9월 16일에는 기삼연 부대에 합세하여 통령으로 활약하였다. 기삼연이 부상을 당하자 그의 후임을 부탁받았다. 기삼연이 체포되어 총살당한 뒤 이 연합 부대는 김용구, 김태원, 김율, 이대극, 이철형 등 여러 부대로 분리되었다. 김용구 부대는 주로 영광과 무장 등 전남·북 접경의 서부 해안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4월 17일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다 총상을 입었다. 이후 김용구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 박도경에게 병력을 인계하고 장성의 백암산에 은신하였다. 1908년 봄을 전후로 기삼연, 김태원 등이 이끌던 의병 부대의 나머지 세력은 그들 휘하의 부장급 간부였던 박도경, 조경환 등 의병장들에 의해 재편성되었다.   박도경은 본래 기삼연 부대의 한 분파였던 김공삼의 포사장(砲士將)으로 있으면서 1908년 3월경부터 독립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 해 5월경 김용구로부터 의병 부대를 인계받아 세력을 더욱 확대하여 전북 부안, 고창을 무대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도경 부대의 형성 과정은, 의병 운동의 주도권이 명망 유생에서 몰락 양반 또는 농촌의 소지식인 층으로, 다시 평민 의병장으로 이어져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호남 의병의 새로운 양상이었다.   조경환은 본래 김태원의 부장이었는데 김태원이 죽은 뒤 1908년 5월 함평 용진산에서 봉기하였다. 그는 주로 나주와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에 걸친 격전을 벌이면서 이 지역 일대의 의병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09년 1월 광주 운수동에서 전사하였다. 기삼연 봉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라북도에서는 이석용, 문태수, 김동신 등이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동부의 산악 지대인 덕유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인근의 전라도, 충청도와 경상남도 지방을 넘나들며 일제를 위협하였다. 익산의 유생 이규홍은 유지명 등과 함께 1907년 11월 익산에서 봉기하였다. 이듬해 4월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익산, 금산, 진안, 장수, 용담 등 전라북도 북부의 산간 지방에서 일본군과 빈번히 전투를 벌였다.   전라북도 내륙의 평야 지대에서는 이석용이 기삼연과 호응하여 임실, 진안, 전주 등지에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석용은 1909년 봄까지 소수의 부대를 이끌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의 부대는 지리적으로 문태수 부대와 인접해 있어 때로는 서로 연합하여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의 봉기와 관계가 있었던 양윤숙도 1907년 10월경부터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라북도 지역의 의병 투쟁도 조금씩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끝까지 유일하게 저항한 전남 남부 지역에서의 의병 항쟁   1907년 가을 이후 호남 지역에서의 의병 운동이 계속 확대되었다. 그러자 일제의 진주 파견대가 지리산 부근의 김동신과 고광순의 의병 부대를 진압하였다. 또한 광주 수비대대는 광주, 장성, 영광, 함평 등 전남 서부의 기삼연 등의 의병 부대를 토벌하였다. 급기야 1908년 2월 일본군 국지대좌를 대장으로 대규모의 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토벌대는 한국 주차군 보병 제 12여단 산하의 제 14연대를 주력으로 하고 여기에 광주 수비대 병력과 조치원 주둔의 기병 약 70기를 배속시킨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이 토벌 작전은 2월 한달 동안 실시되었는데, 여기에는 수비대 병력 외에 헌병, 경찰, 특설 순사대 등도 함께 참가하였다. 진압 과정에서 민가에 대한 방화와 살육 등 온갖 잔혹한 수법을 다 동원하였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150여 회에 걸친 토벌을 통하여 이 기간 동안 의병이 입은 피해는 사망 756명, 부상 수백 명, 포로 700여 명에 이르렀다.   1908년에 들어서 일제의 계속된 토벌로 호남 지역의 의병 세력은 전력 손실을 입었다. 기삼연을 비롯하여 김태원, 김율, 김용구 등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은신함으로써 호남의 의병 조직 자체가 사실상 무너졌다. 이에 따라 이 해 4∼5월경에는 호남 지역 의병 운동도 전반적으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는 일제의 가혹한 토벌 작전 때문이었다. 또한 의병 구성원의 다수가 농민으로, 시기적으로 마침 농번기에 접어들었던 것도 의병 투쟁이 약화된 원인의 하나였다.   이리하여 1907년 창설된 기삼연의 연합 부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의병 투쟁이 중단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1908년 2∼3월을 전후로 새로운 의병 부대가 봉기하면서 의병 운동은 다시 한 번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해 2월 심남일이 남평에서 봉기하여 호남 지역 서남부를 중심으로 의병 투쟁의 새 장을 열었다.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 부른 심남일      심남일 부대는 빠른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형성하여 함평을 근거지로 나주, 영암, 무안, 강진 등 전남 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 일대를 장악하며 일제를 위협하였다. 심남일은 함평군 월야면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심수택이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김태원 형제가 죽자 잔여 의병을 수습하고 새로 의병을 모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남일(南一)이라 불렀다. 이 부대에는 권택, 안찬재 같은 유생이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농민, 상인, 목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심남일 의병은 전해산, 조경환, 안규홍 의병대와 연합 작전을 하기도 하였다.   심남일 의병장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일제의 앞잡이로 양민을 괴롭히거나 수탈한 사람들을 응징하였다. 그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될 때까지 전해산, 임창모와 같이 가장 늦게까지 활동한 의병장이었다. 1909년 9월 화순군 청풍면 풍치 산 속의 암굴에서 선봉장 강무경과 같이 체포되었다. 평민 의병장 안규홍   심남일에 이어 3월경에는 안규홍이 보성 동소산에서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여 봉기하였다. 안규홍 부대는 대원사를 중심으로 보성 일대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리고 능주, 순천, 광양 등 전남 동남부 지역을 무대로 과감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안규홍은 본래 머슴 출신으로 자신의 동료인 머슴과 빈농 세력을 주축으로 하고 일부 해산된 군대를 흡수하였다. 부대의 신분 구성은 기삼연 등의 유생 의병장 부대와는 다른 특색과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안규홍은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출생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글을 배우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의탁할 곳이 없어 고용살이를 하여 편모를 봉양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안담살이(머슴살이를 칭하는 말)라 불러, 뒤에 호를 담산이라 했다.   그는 배운 것은 없지만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나 강자의 오만을 보면 참지 못했다. 체구는 작지만 용감하여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다. 세상이 날로 어려워지고 나라의 명이 기울자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 동지 몇 사람과 맹세하기를 "왜적은 옛날부터 우리 나라의 원수이며 임진년 이후부터는 하늘을 같이하고 살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를 삼켜버리고 우리 임금을 욕보이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들었다. 우리들은 선왕의 신민이요, 선조의 자손으로 이 광경을 차마 보고만 있겠느냐. 한 도둑놈만 죽이더라도 실로 이것이 나의 일이다." 하니 사람들이 이 말에 모두 순응했다.   다른 의병 부대들이 일제의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토벌되어 시들어가는 가운데서도 안규홍 부대는 끈질기게 투쟁하여 더욱 그 활동이 부각되었다. 그의 부대가 크게 명성을 떨친 전투는 파청 전투와 대원사 전투, 동복 운월치 전투, 그리고 진산 전투 등이다.   파청 전투에서는 1908년 4월 26일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의 비들 고개에서 안규홍 의병 150여명이 매복해 보성 분견소를 습격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908년 5월 1일 대원사 전투에서 일본인 순사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동복 운월치(지금의 순천시 주암면)에 수시로 출몰하여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했다. 또한 1909년 8월 진산(지금의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물리쳤다.   안규홍 의병은 일본 경찰과 헌병들을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체인, 세무인, 관료, 일진회원, 그리고 악질 부호들을 처단하여 민족의 분노를 풀었다. 그런데 일본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전개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양민의 피해 또한 커서 더 이상 의병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안규홍은 의병을 해산하고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려다 일본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어 순국했다.   심남일과 안규홍의 의병 투쟁은, 호남 전역으로 의병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다와 산을 누비던 의병장 전해산   1908년 하반기에 들어 호남 지역 의병 운동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전해산의 봉기였다. 본명은 전수용이었으나, 바다와 산을 누비며 투쟁하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전해산(全海山)으로 고쳤다. 그는 이석용의 진안 봉기 때 참모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이석용과 상의한 뒤 남하하여, 조경환의 함평 봉기에 가담하였다가 7월부터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다.   전해산 부대의 주력은 전남·북 각지의 농민들이 주축이었다. 이밖에도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 출신인 정원집을 비롯해 해산된 군대의 일부 병력이 가담하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전해산 부대는 지금까지의 다른 어느 부대보다도 강력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정원집에 대해서는 그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전해산은 "오늘 모인 군사는 모두 일등 산포수인데 만약 정공(鄭公)이 있어서 군사를 조직한다면 어찌 강적을 근심하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전해산은 조경환, 심남일 부대와 연계하여 투쟁을 벌이다가 1909년 1월 조경환이 전사한 뒤에는 나머지 세력을 자신의 휘하에 흡수하여 병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장성, 광주, 담양, 나주 등 전남 북부의 내륙 지방과 영광, 무장, 고창 등 전남·북 접경의 서부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해산은 휘하에 여러 개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각지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또 인근의 여러 부대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연합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말에서 1909년 초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요즘) 군의 형세가 차츰 떨치고 의로운 깃발이 날로 날리어 김죽봉, 김치재는 산간 고을에 출입하고, 이순식 박도경은 바다 연변에 연락하고, 신화산 조대천은 서북에서 경영하고, 심남일 안덕봉은 동남에서 치달리고 나도 정원집과 더불어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로 횡행하고 있다.   위 인용문과 {해산창의록}에 실린 [호남동의단]의 진용을 비교해 보면 대체로 1909년초를 전후하여 호남 지역 의병들 사이에 전해산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공동 투쟁 전선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호남동의단]은 모두 10진(陣)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대동의병대장 전기홍과 제 1진 의병장 심남일을 비롯하여 박도경, 김영엽, 조대천, 신화산, 이순식, 이기손, 오성술, 권택, 안덕봉 등 전북 남부와 전남 각지의 주요 의병장들이 가담하고 있다.   1907년 가을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일제에 의해 실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때까지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08년의 경우 전투 횟수에서 전국의 25%, 의병 수에서 전국의 24.7%를 차지하였다. 1909년 상반기의 전황은, 전투 횟수에서는 전국의 47.3%, 의병 수에서는 전국의 60.1%에 이르렀다. 자기 몸을 불살라 밤을 밝힌 의병장들   임창모는 보성 출신으로, 일제가 침략하자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회일을 만나 1907년 3월 능주에서 이광선, 이백래 등과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 되었다. 그는 화순, 능주, 동복을 휩쓸고 광주로 향하다가 도마치 전투에서 체포당해 15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가 풀린 후 이백래의 호남창의소에서 중군 도통장으로 편제되었으나, 독립 부대를 이끌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뒤에 안규홍 부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안규홍 부대가 해산되자 그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여 나머지 부대를 수습하였다. 108인의 정예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대항하다가 1909년 10월 13일 아들 임학규와 함께 묵석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병기는 구례군 마산면 출신으로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후 김태원, 김율 형제가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그 참모장이 되었다. 뒤에 양상기 부대에도 참여하여 중군장이 되었으며, 그가 지휘하는 의병이 많을 때는 700여 명이나 되었다. 창평, 광주, 동복 등지에서 일본인 가옥을 불태우고 1907년 12월 동복 신평에서 토벌대와 격전하여 일본군 3명을 죽였다. 1909년 11월 8일 구례에서 광주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자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동지들에게 수치스럽다"고 하였다.   곡성 출신으로 신정우와 노인선이 있는데 주로 구례, 곡성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신정우는 곡성군 죽곡면 출신으로 1907년 3월 의병을 일으켰고, 노인선은 1907년 11월 김동신 의병에 참가했다가 독립했다. 나주 출신 임동규는 순천 조계산을 중심으로 순천, 보성 등지에서 활약하다 체포되어 순국했고, 능주 출신 김병도는 화순에서 활약하다 순국했다. 해안, 섬 지방의 의병 투쟁   전남 남해안에서 의병 투쟁이 일어난 것은 조선 어민과 일본 어민의 갈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본래부터 목포는 군산항과 더불어 일제의 경제 침략의 제1차 관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 근처의 여러 지역에서, 일본 상인에 대한 의병들의 공격이 의병 전쟁 전 기간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1908년 11월에 발효된 어업법과 일본 어민의 진출은 이 지역 어민의 경제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의병들의 해상 투쟁이 강화되었다.   해안 및 도서 지역의 의병 투쟁은 주로 심남일 부대와 안규홍 의병 부대가 합세하여 활동 범위가 완도 연안까지 이르렀다. 특히 심남일 부대의 기군장이었던 이덕삼을 비롯한 황준성, 황두일, 추기엽 등의 인물이 이 일대 의병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이들뿐 아니라 호남 내륙의 의병들까지 해안 지역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있어 해안과 섬 지역의 의병 투쟁은 한층 격화되었다. '남한폭도대토벌 작전'― 전라도 의병을 섬멸하라   1909년 여름에 들어서도 의병 투쟁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일제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실시했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었다. 1909년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종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전남 지역에서는 의병들의 활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전남 의병을 놔두고는 한·일합방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제는, 전남 전 지역을 완전 포위하여 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실시했다. 의병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벌인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일제가 저지른 군사적 만행이었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수뢰정대 그리고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전북 남부로부터 경남 하동 서쪽의 전남 전지역을 토끼몰이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대구에 있는 일본군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관 에 의해서 지휘되었다.   제1 경비 부대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제2 행동 부대는 포위선 안에서 수색, 토벌, 검거하기 위해 미리 명부를 작성하여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조사하였다. 그야말로 물샐틈없는 철저한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잔인 무도하고 포악한 야만성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당시의 상황을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 의병을 수색하니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으로부터 동으로 진주, 하동, 남은 목포로부터 사방을 포위한 것이 그물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순찰병을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니 집집마다 모조리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해도 문득 죽이니 이에 행인들은 자연적으로 끊어지고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못하니 의병들은 셋, 다섯 도망하여 사방에 흩어지며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한 자는 꾸물거리다가 칼을 받았으며 점차 쫓겨 강진, 해남 땅에 이르러 갈 곳이 다하니 죽는 자가 무려 수 천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전남 의병에 대한 대 토벌 작전은 예정보다 15일을 연장하여 10월 25일에야 끝났으니, 9월 1일부터 55일간의 대 살육이 진행되었다. 이 작전의 결과 일본은 420명의 의병을 사살하고 1687명을 체포하였으며 455정의 총기를 노획하였다. 이로 인해 전남지역은 의병 운동에 가담한 사람은 물론, 무고한 양민을 포함하여 인명과 재산상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의인들의 피가 이 지역을 물들였으며, 수천 명의 의병들이 강제 노동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때까지 활동하였던 주요 의병장들과 수많은 의병들이 살육 당하거나 체포됨으로써,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것은 다른 지역의 의병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의 전반적인 퇴조를 가져왔다.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당시 전국적으로 드높아진 의병 운동의 발전과 기본적으로는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지만, 역사적·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다른 지역의 의병 운동과 구별되는 독특한 발전 과정을 겪었다. 첫째,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의병 운동이 쇠퇴하거나 또는 침체 국면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고조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직후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북, 경북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불붙었던 의병 투쟁은 1908년에 들어서서 일제의 토벌 공세에 밀려 쇠퇴하였다. 반면에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은 오히려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908년 하반기 이후는 전남·북 전역이 전국 의병 활동의 중심지로 되어 명실상부한 '의병 전쟁'의 격전장으로 변하였다. 둘째,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발전하게 된 계기와 관련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당시 호남 지역의 경제적 특수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호남 지역은 쌀과 면화를 중심으로 한 일제의 식량 및 원료의 공급 기지이면서 동시에 일본 면제품 판매 시장으로 변모되어 갔다. 이로 인해 호남 지역의 농촌 경제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또한 러·일 전쟁 이후에는 토지 침탈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 터전을 잠식해 갔다. 그 결과 1905년을 전후하여 불붙기 시작한 의병 투쟁은 1907년부터 호남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셋째, 의병 전쟁 기간 동안 호남 의병들은 매우 다양한 내용의 투쟁을 벌였다. 일제의 침략에 치열하게 대항함은 물론, 어업권 침탈에 대한 조선 어민의 생존권 옹호와 지주들의 지대 수탈을 저지하는 등 반침략·반봉건 운동을 전개했다. 넷째, 호남 지역 의병 운동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망있는 유생 부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는 점이다. 안규홍, 김동신, 문태수, 양진여·양상기 부자와 같이 비교적 이름이 잘 알려진 의병장이 있는가 하면 최산홍, 임세묵, 김영백, 강사과, 조정인, 정성운 등 상당수의 평민 출신 의병장도 있었다. 한말 호남 의병의 역사적 의미      심남일은 의병의 본 뜻을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말의 구국 운동인 의병 전쟁은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초들이 맨주먹 하나로 일으킨 것이다. 그것의 승패는 처음부터 불 보듯 뻔했다. 그 점은 의병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털끝만치도 굴복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 이 아니라, 역사의 계승 발전이라는 깊은 뿌리를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충절과 의리를 소중하게 지켜온 호남인들은 임진왜란 때에도 빈사 상태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출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 대열에 앞장섰다. 또한 1894년에는 이 나라의 자주 독립과 봉건 질서 타파를 위해 동학농민전쟁을 전개했다. 새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동학혁명이 일본의 신무기 때문에 좌절된 뒤로도, 날로 더해 가는 일제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한말 의병 운동의 선두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충절과 의리를 기본 정신으로 삼는 호남인들, 그들은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지탱해주는 지주로서, 역사 발전의 견인차로서 그 소임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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