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테마로 하여 온 나라가 들썩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싶습니다.
실은 불과 몇 달 전에 EBS 라디오 채널에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고속도로 상에서 '제제' 어쩌구 하는 내용이 라디오로 나오길래 한 참 집중해서 듣고서야 어떤 책을 이야기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무척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고, 이미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버린지 오래여서 차츰 잊어가고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작년에는 브라질에서 만든 영화가 한국에서도 개봉하였지만, 영화 완성도가 괜찮다는 평가에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단계로 가 버린 작품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에 크게 논란이 된 것이 더 놀랍기도 합니다.
작년에 새로 영화가 개봉했어도 심드렁했고, 올해 라디오 드라마에 대해서도 심드렁했고,
대학로에서 무수히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어도 그저 그런 반응에 그칠 뿐이었는데,
오직 "아이유"의 노래와 앨범 자켓 디자인에 대해서만 이렇게 큰 반응이 나왔으니까요.
이번 논란으로 인하여... 가수도 출판사도 상업적으로는 이득을 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부작은 브라질의 소설가 바스콘셀로스가 나이 40 살이 넘어서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 사람이 처음 작가로 데뷔한 것은 1940 년대이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부작은 1960 년대에 썼습니다.
이미 20 년 넘는 세월 동안 계속 소설을 쓰고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량이 완숙기에 들어섰던 시기이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부작 발표 이전에도 다른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가장 먼저 쓴 책은 <광란자>였습니다 -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실은 <광란자>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학교 가기를 싫어하는 불량 청소년으로 등장하는 제제는, 부모가 손도 댈 수 없는 굉장한 반항아입니다.
첫 번째 챕터 20 여 페이지에서 제제의 청소년기를 짧게 묘사하고, 바로 3년 넘는 세월이 휙 지나가서 19살이 됩니다.
작가가 진짜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성인이 되는 입구에서 방황하며 꿈을 찾아다니는 불안정한 사내의 이야기였습니다.
정서적으로 반항기질을 타고 났지만 순수함과 호기심, 정열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은 대학에 다니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나름대로 연애를 경험하고, 한 명의 인간으로 자립하기 위해 자기가 벌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항구도시로 떠나죠.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는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합니다.
그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져나가기 위한 과정이 바로 반항기였던 것입니다 - 부모를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믿고 있죠.
주인공은 대학에 다니던 시절까지는 적게나마 아버지가 생활비를 송금하였고, 그것으로 하숙을 하고 먹고 살면서 지냈지만,
자립을 결심하고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그 때는 아버지에게 돈을 빌립니다 -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강단이 느껴지죠.
<광란자>는 분명 훌륭한 책이었고 당연히 작품 가치에 걸맞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작가는 주인공의 성격과 배경에 대해 보다 더 충실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주인공 제제가 그토록 심한 반항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했죠.
그래서 <광란자>의 속편은 어른이 되어 사회로 나간 제제의 인생 개척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보다는,
프리퀄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제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 것이... 전설의 베스트셀러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습니다.
작가가 처음 구상하고 쓰려고 했던 이야기는 줄거리 상으로 뒷 편 <광란자>인데,
왜 주인공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배경 설명을 위해 프리퀄로 앞 이야기를 썼더니...
오히려 그 앞 이야기가 진짜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뒷 편의 이야기를 압도해버리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작가가 뒷 편에 대한 배경과 설정을 설명하려고 프리퀄로 앞 이야기를 썼더니, 독자들이 프리퀄에 더 열광해버린 겁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올슨 스콧 카드가 <사자의 대변인>의 배경 설명을 위해 쓴 <엔더의 게임>에서도 발생한 바 있습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부작에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아버지와 제제"와의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광란자>에서 아버지와 제제는 서로 마음을 열지 않는 아주 불편한 관계로 등장하는데,
<광란자>에서 제제의 아버지는 지역의 "의사"로 일하고 있고 그래서 제제의 가정은 하녀도 쓰는 중산층입니다.
제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있고, 또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만, 항상 아버지와 어긋납니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곧잘하고, 얼굴도 잘 생긴 제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러 대학에 진학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을 때려치우고 방황하죠 - 그 뿌리에는 아버지와의 불화가 자리합니다.
그런데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등장하는 제제의 아버지는 몸을 쓰는 하층 노동자입니다.
제제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놀고 있고, 어머니와 누나가 공장에 나가 돈을 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쓰여진 <햇빛 사냥>에서 제제가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광란자>에서 제제의 가정 환경은 전혀 다르게 묘사되고,
<광란자>에서의 방황의 원인은 어린 시절 중간에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것에 있기도 합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광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브라질이라는 것과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하층 노동자로 일하는 제제의 친아버지가
그토록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1920 년대의 브라질은 다행히도 유럽에서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지만,
대지주와 자본가 계급이 결탁하여 공화제를 채택하고 나라를 지배하던 "콜로네레스"의 시대입니다.
"콜로네레스"의 시대는 포르투갈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다스리던 과거보다는 물론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본의 힘으로 하층 노동자들을 싼 값에 쥐어 짜면서 커피 농장을 경영하여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하층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인생에 대한 획기적인 도약 쉽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기호품인 커피 소비가 미국과 유럽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1930년대의 브라질은 국가 수입의 대부분이었던 커피 수출이 줄어들면서 심각한 불경기를 맞게 됩니다.
브라질에 대한 "콜로네레스"의 지배는 커피 농장주들이 파산하거나 힘이 약해지면서 비로소 끝나지만,
그 이상으로 세계 대공황의 여파 때문에 브라질 하층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집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제제의 아버지는 바로 1920년대 "콜로네레스"시대의 하층 노동자였고,
<광란자>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하여 의사였던 양아버지마저도 벌이가 시원찮게 된 시대였습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제제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하층 노동자 계급의 가부장적인 거친 사내였고,
그래서 제제의 어머니와 누나들은 아버지의 폭압적인 가정 지배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로지 사내인 제제만이 반항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를 응원하기도 하죠.
당시는 브라질에서 살고 있는 서민 계층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제제의 아버지만이 별종이어서 남달리 폭력적이고 삶을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광란자>에서의 제제는 양아버지가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원망스러운 감정을 갖습니다.
반대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의 제제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친아버지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제에게 있어 "아버지"는 양아버지든 친아버지는 모두 본 받고 따를만한 롤 모델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친아버지는 벌이도 별로 시원치 않으면서 주먹질이나 하는 가난한 가장일 뿐입니다.
친아버지는 당시 하층 노동자 중에서 딱히 더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바람직한 사람도 아닙니다.
한 명의 사내 아이가 가장 가깝게 접하는 아버지로부터 남자로서의 롤 모델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도 그 대상을 찾게 되죠.
그 사람이 바로 "뽀루뚜까" 아저씨입니다 - 이 사람은 멋진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포르투갈 출신의 자본가였죠.
"뽀루뚜까"는 브라질 사람들이 비꼬아 부르는 말이고, 한국인이 일본 사람을 "쪽발이"라고 부르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는 비록 "쪽발이"="뽀루뚜까"였지만, 삶에 찌든 아버지와는 달리 훌륭한 승용차의 주인이었고, 젊고 패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주먹질이나 하는 별볼일 없는 하층 노동자였지만, "뽀루뚜까"는 그와는 달리 멋진 사람입니다.
제제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닮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뽀루뚜까"로부터 발견합니다 - 그와 우정을 나누며 안정을 얻죠.
천하의 둘도 없는 말썽꾼이자 "마을 전체에서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는 식으로 대하는 악동 제제는
그 존재만으로 수 없이 많은 말썽을 피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순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란자>에서 제제의 반항기와 자립심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의 고집스러운 말썽꾼과 잘 연결됩니다.
그만한 말썽꾼이었으니 나중에 커서 그렇게 반항심 가득하면서도 자립심과 고집을 가진 젊은이가 되는구나,
그런 식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고 있죠 - 그런 면에서 당초의 집필 목적에 꽤 충실합니다.
제제는 자신의 친구였던 라임 오렌지 나무가 베어지고, "뽀루뚜까"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집니다.
의지하고 지냈던 존재를 모두 잃고, 의사가 틀림없이 죽는다고 진단한 큰 병을 앓지만, 누나의 극진한 간호로 간신히 살아나죠.
그 과정을 통해 제제는 유년기를 졸업합니다 - 여전히 어린 나이이지만, 분명한 자아를 지닌 한 명의 소년이 되어 버리죠.
<광란자>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독자의 감성에 대해 호소하는 방식"이 완전히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방황을 다루는 <광란자>는 의외로 상당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작품입니다.
성인이 되는 입구에서 어떠한 길을 가야할 지 모색하고 마음을 다져나가는 과정을 다루고자 하는 책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방황이 세밀하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광란자>라는 제목과는 달리 감정보다는 이성에 초점을 맞추죠.
하지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전적으로 어린 아이의 감정적인 흐름에 상당히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래서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영향도 굉장히 감정적입니다 - 작품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무너뜨릴 정도입니다.
세계적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이런 감정적인 호소 때문일 겁니다.
작가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테마는 <광란자>에서 다룬 자립심 강한 한 명의 사내로 성장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감정선을 두드리는 이야기에 열광하고 눈물지으며 감상에 빠져들었죠.
이제 청소년기와 성인이 되는 시절을 다룬 <광란자>와 그 프리퀄로 유년기를 다룬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사이에서,
중간에 Missing 의 시절로 남아버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연결해 주는 책을 쓰면 연대기적으로 아귀가 맞게 되고,
독자들도 그것을 원하니... 쓰기도 전에 성공은 보장된 것이었습니다 - 그래서 나온 책이 <햇빛 사냥>입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부작은 작가의 집필 순서에 따라 작품 분량이 점점 많아지는 게 특징입니다.
<광란자>가 가장 짧고, 그 다음에 쓰여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중간 분량이고, <햇빛 사냥>이 분량은 최대이죠.
하지만 책의 길이가 길어진 것과는 달리 작품의 완성도는 오히려 <햇빛 사냥> 쪽이 가장 뒤떨어집니다.
제제가 친부모, 누나, 형의 곁을 떠나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된 후 겪게되는 정신적인 방황을 다루고 있는데,
<광란자>에서처럼 이성적이지도 않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처럼 감정적이지도 않고 톤이 애매하다고 느껴지더군요.
앞 뒤의 <광란자>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아니라면... 딱히 읽을 가치가 별로 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한국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처음 번역하여 소개한 사람은 박동원씨이고,
한국외대에 포르투갈어과 학부생으로 재학하던 나이 만 22살 시절 여름방학에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학부생이 연습삼아 번역한 원고가 2년 후 책으로 나왔고, 얼마 안되어 절판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출판사가 이름을 바꾸고 다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재출간하였는데,
이 때도 "번역 원고를 거의 다듬지 못하고 오탈자 교정만 했다"고 역자가 밝히고 있죠.
포루투갈어를 전공한 사람이 원서를 직역한 것 만큼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프로 번역자나 학자가 번역한 게 아니라 일개 학부생이 번역한 원고를 계속 사용한 겁니다.
이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책을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 초판 번역본이 1987년 무렵 백 만 부가 훌쩍 넘게 팔리는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역자가 처음 책을 번역한 지 10 년이 넘어서였죠 - 책 나오고 무려 9년 만에 베스트셀러가 된 겁니다.
그 때는 베른 조약 발효 이전이어서 원작자 허락도 안받고 저작권 계약도 안하고 책을 찍던 시절이어서,
온갖 출판사들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다투어 출간했습니다 - 일어, 영어 중역본이 대부분이었죠.
한국에서 베른 조약이 발효된 것은 20세기가 끝나고 2000 년대로 넘어가던 시절부터였고,
이미 1990 년대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열풍은 잦아들었고 베스트셀러의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동녘'출판사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체결한 것은 2003 년의 일이었습니다.
원작자 바스콘셀로스는 벌써 1984년에 64세를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에,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거의 20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저작권 계약을 한 겁니다.
한국에서 한 창 잘 나갈 때 "일년에 백 만 부씩 팔아서 거의 3 백만부를 팔았다"는 것은 1990 년대 이전의 일이므로,
2000 년대 이후 정식으로 작가의 유족과 저작권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태풍은 이미 다 잦아 든 후였습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첫 번째 번역자 박동원씨는 훗날 브라질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되고,
브라질에서 체류하면서 파울로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를 번역하는 등
공무원으로 일하는 와중에도 간간히 문학작품 번역물도 조금씩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학자로 풀리지 않았고, 프로 번역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생전의 바스콘셀로스와 만나 대담하고 또 이후 브라질에서 오래 살면서 얻은 지식으로
2000 년대 들어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전면 재번역판을 내 놓기에 이르죠.
'동녘' 출판사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진행한 이유 중 하나가,
첫 번역 후 20 여 년 만에 역자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전면 재번역본을 들고 왔던 것 때문인데...
베른 조약 이전에 나온 책은 내용을 전혀 다듬지 않고 그냥 출간하는 것은 가능하게 되어 있지만
내용을 손보거나 바꿀 경우에는 반드시 저작권 계약을 해야만 출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역자가 대학 학부생이었던 시절 연습삼아 번역한 원고를 가지고 책을 출간해 오다가,
그 사람이 브라질 현지에 오래 살면서 비교도 안되는 정성을 다한 번역 원고를 들고 왔는데...
그것을 마다할 수 없었던 겁니다 - 마다했다가는 원고 들고 다른 출판사로 가버릴 게 뻔하죠.
이번 논란에서... 출판사가 어쩌고 저쩌고 훈수를 놓다가 오히려 사과를 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는데,
과거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도 안하고 학부생이 연습삼아 번역한 원고로 3백만부를 팔아먹은 출판사가
마치 온갖 정성을 다해 작가를 분석하고 책을 출간한 것처럼 포장되는 모습도 있어서, 그게 꽤 웃기더군요.
2000 년대 이후 나온 재번역본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해도 됩니다 - 번역자가 진짜 열과 성을 다한 것이었죠.
하지만 처음 책을 만들어서 신나게 팔던 시절에 대해서는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작권 계약 제대로 안하고, 학부생이 번역한 연습용 원고 그냥 대충 출간한 것은...
과거 한국 출판계의 부끄러운 행위를 빠짐없이 다 저질렀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그래놓고 작품에 대해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놔라 감놔라 하고 있으니, 욕을 먹어 마땅하다고나 할까요.
이번에 논란을 일으킨 가수가 먼저 사과를 했고, 뒤를 이어 책을 출간한 출판사도 사과를 했습니다.
둘 다 얼마간이든 잘못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저는 사과를 했다는 그 자체가 아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조금 시끄러워지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무엇인가 단단한 지조가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 자기 주장이 있다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던가, 그럴 배짱이 없다면 아예 주장을 하지를 말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 뜻대로 살겠다"라면서 거친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던 <광란자> 제제의 단단한 소신과 배짱이 새삼 떠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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