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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물경제는 언제 시작되고 어떻게 작동할까?

lemie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3.13 09:20:01
조회 11883 추천 58 댓글 148




 이전 연재글에서 현물을 조세로 수취하는 공납제도가 고려와 조선의 시장경제 발전을 어떻게 지연시켰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 제도를 유지했는지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풀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죠. 국가가 필요한 현물을 직접 수취한다고 해서,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가 없어지지 않는데 시장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는거죠.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경우, 중앙집권화된 현물수취와 부역제도를 활용해 기득권층의 민간수요를 충족시키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다고 소개한바 있습니다. 바로 선물경제(膳物經濟, Gift Economy)죠.


 대체 선물경제가 뭘까요?


 선물경제(膳物經濟, Gift Economy)란 재화를 선물함으로서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는 경제를 말합니다. 필요한 재화를 서로가 교환하하는 물물교환이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가격에 따라 거래하는 시장경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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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북서부 해안 원주민들이 축제에서 선물을 증정하는 포틀래치 축제를 묘사한 그림, 선물경제의 좋은 사례중 하나다.----


 생일선물 주는거하고 뭐가 다르냐고 물으신다면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는 일반적인 방법, 즉 경제생활의 기초가 될 정도로 중요한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주로 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사회,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남태평양 원주민들에게서 동일가치의 거래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 받음으로서 수요를 충족하는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바 있습니다. 


 아니 고대부터 국가를 만들고 관료제와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켜온 고려와 조선에 무슨 원시 부족사회의 선물교환 경제가 있었냐고 물으실 수 있을겁니다. 맞습니다.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긴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는 이런 부족사회와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기득권층이 시장에서 재화를 거래를 통해 구하기보다 17세기까지 선물이라는 명목하에 필요한 수요의 상당부분을 만족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친인척이나 인적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서로간의 예물을 주고받는 수준을 떠나서 자신의 농지나 녹봉보다 더 많은 양을 선물에 의존했다면 선물경제라고 불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이 선물경제가 한반도에서 시작된걸까요?



한반도에서 선물경제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고대부터 중세까지 한반도에서 시장은 수도에나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지역간, 지역내 교역은 도보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행상(行商)이나 배를 사용하는 선상(船商)의 방문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졌겠죠. 


 이러한 요인으로 선물경제가 발달했다면 언제부터였을까요? 학계에서 선물경제의 존재를 확인한건 16~17세기 조선의 일기 자료를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 선물은 한국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선물경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선물이 민간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사료는 고려시대부터 등장합니다. 


 이자겸은 풍채[風貌]가 단정하고 거동이 온화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겼다.(생략)

 사방에서 선물[饋遺]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인물(人物) 1123년경 기록


윤종양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고 선물[饋遺]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

고려사 열전, 윤인첨(尹鱗瞻, 1110~1176)


 이미 고려 전기부터 권력자들이 선물을 무상으로 받는다(饋遺)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은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받는 일반적인 뇌물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선물은 권력자에게만 제공되는것은 아니며, 보다 일반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기득권층은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고려 중기 이후 관료의 물적기반이었던 전시과와 녹봉이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심화됩니다. 현직 또는 전직 관료들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혜택보다는 친인척, 동료, 친구들로부터 주고받는 선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된 원인이 되었겠죠.


 무신정권기의 문신이었던 이규보(1168~1241)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공식적 사료 이외에 고려중기의 시대적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인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겼습니다. 오치훈의 "이규보를 통해 본 고려 관인의 경제생활"은 그의 문집을 조사해 고려시대 관인의 경제생활에서 선물의 중요성을 탐색해나갑니다. 


 여기에는 그가 받은 다수의 선물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죠. 특히 이규보가 이자겸과 같은 강력한 권력자가 아니었고, 그가 하급관료 시절이나 파직당했을때의 기록들은 선물이 당시 지식인층의 경제생활에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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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누비옷, 영릉 참봉 한준민 일가묘 출토, 뉴시스 기사 참조----

 

 이제 이처럼 곤궁하다 보니, 집에 한 섬의 양식도 없어, 굶은 입에 늘 침만 흘리면서 부질없이 꾸르륵거리는 배만 어루만지네. 구월에 서리오자 하늘은 높은데 하룻밤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니 홑이불은 쇠보다 더 차가워 몸은 언 자라처럼 움츠러드네. 

 갑자기 한 장 서신을 받으니 나에게 갖고 싶은 물건을 보내왔구나. 썰렁한 부엌에 저녁밥 지으니 파란 연기가 이제야 집에서 솟고 엷은 옷 속에 솜 놓아 입으니 겨울날 따뜻한 볕 등에 진 듯 어진이의 마음이 하도 고마워 감사하는 눈물이 줄줄 흐르네

동국이상국집 10권, 古律詩, 문 선로(文禪老)가 쌀과 솜을 보내준 것에 사례하다

 

 이규보가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 야옹(野翁)이란 인물이 홍시 1000개를 보냈다는 기록을 비롯해 그는 그의 문집에 많은 이들이 보내온 다양한 선물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는 1207년 40세가 되어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하급관료이거나 무직상태였을 때에도 쌀, 의류, 육류와 같은 다양한 생필품을 주변에서 선물로 받아서 생계에 보탰습니다.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그는 숯, 맷돌, 미나리, 능금과 참외, 비단, 복숭아, 술, 먹이나 부채등의 선물을 받았고, 몽골과의 전쟁 시기로 생활이 피폐해졌을때 당대의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최우(崔瑀)로부터 쌀을 선물받아 생계를 유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가 70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후 4년간 총 26건의 선물로 차(茶), 귤, 꿩, 복숭아, 술, 채소, 홍시, 곶감, 쌀등 다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관직의 유무나 고하와 완전히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만, 고려시대 기득권층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고, 이는 14세기 여말선초 시기까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규보뿐만 아니라 여말선초 시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색(李穡) 역시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이규보와 유사하게 수많은 선물기록을 남기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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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寧海)는 경북 영덕을 말한다. 영덕군 해안에서 말리는 과메기들, 월간 중앙 참조----


단양의 소식이 근래에 드물었는데, 갑자기 말린 생선을 얻으니 성의가 작지 않네

목은시고 12권, 영해(寧海) 김 좌윤(金左尹)의 서신을 받다.

 

동쪽 바다는 하도 커서 가이없고, 말린 고기는 바늘같이 가는데, 천리 먼 길을 부쳐왔기에 깊이 싼 봉함을 뜯고 보니 밥을 도와 맛을 냄은 물론이요. 시를 쓰매 읊조림도 안 막혀라 

목은시고 13권, 말린 작은 물고기를 보내 준 김 삼사(金三司)에게 사례하다.

 

 고려 전기부터 고려가 망하기 직전까지 고려의 관인이나 지식인층에게 있어서 경제생활에서 선물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게다가 이 자료는 일기가 아닌 시(詩)라는걸 고려하면 실제 받았던 선물의 수량이나 횟수는 훨씬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17세기까지 선물경제는 이규보나 이색과 같은 대표적인 문인이 아니라도 재지사족들에게 비교적 일반적이었습니다. 사족의 가계경제에서 자급자족하는 부분을 제외한 상품수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시장에서 대가를 치르는 거래 위주로 전환되는 건 18세기가 되어서였죠. 

 

 고려나 조선의 기득권층이 필요한 민간수요를 서로간의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서 충족하는건 시장경제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보는 근대중심적인 관점(Moderno-Centrism)으로 보면 원시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근대주의(Post-modernism)는 이런 관점에 도전하죠.


 수요를 시장에서 충족하던 선물로 충족하던 충족하기만 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시장경제가 무슨 완벽한 이상적 답안이라고 보는 건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불과합니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은 뒤로 하고..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가 어떻게 상공업 발달을 지연시켰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므로 거기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사실 인류학자들이 관측한 부족사회의 선물경제하고,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는 굉장히 다릅니다. 고려나 조선의 선물경제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수취제도 없이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거든요.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물경제는 불공정한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물경제의 특징 : 지방재정의 사적 이용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가 기득권층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농장이나, 고기잡는 어량(漁梁)에서 나오거나 직접, 또는 노비를 사역해서 나온 물품을 서로 간에 선물함으로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有無相通)하는 것이었다면 불공정하다고 할 수 없겠죠.


 오히려 이런 선물의 주고받음은 지배계층내 바람직한 인적관계를 형성해서 서로간의 분쟁을 줄이는 사회적인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근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없는 걸 받고, 내가 남는 걸 너한테 선물한다고 하면 굳이 선물로 수요를 충족하는 것 보다 직접적으로 교환하거나 가격을 매겨 매매하는게 효율적입니다. 선물 주는 사람이 내가 필요한 걸 준다는 보장이 없고, 내가 선물한 이후 꼭 선물을 되돌려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필요할 때 필요한 걸 못 구하면 얼마나 짜증나고 불편하겠습니까?


 즉 사회가 발전할 수록 보다 수요를 충족하기에 보다 용이한 거래를 하게되고, 직접 거래하면 불편하니까, 이 거래를 매개하는 유통업자, 상인이 출현하고 정기적으로 시장을 열어서 거래를 보다 쉽고 광범위하게 할 수 있도록 변화합니다.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분업화와 시장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거죠.


 선물경제가 사회가 발전한 후 유지되지 않고 교역과 거래로 전환되기 쉬운 건 이 때문이겠죠?


 하지만 부족사회보다 훨씬 발전한 고려와 조선에서 선물경제가 장기간 유지된 건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층은 단순히 자기가 남는 걸 선물하는게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수취된 현물을 서로 선물함으로서 각자의 수요를 충족하는 방법을 사용했거든요. 


 즉 선물경제의 구조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남을 만큼의 이익이 고려와 조선 기득권층에게 존재했다는 겁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나라에서 수취한 나라의 재화를 가지고 기득권층끼리 주고 받으면서 필요한 것을 획득 할 수 있거든요. 언젠가 답례를 해야하니 공짜는 아니지만 매우 저렴하죠!


이런 면에서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부족사회의 선물경제와 달리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는 국가권력에 의한 재분배경제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고려와 조선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을 살펴봅시다.


 매월(每月)의 상선(常膳)과 별선(別膳)을 바칠 때 피폐한 백성들로부터 과도하게 거두어들여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라.

고려사, 충렬왕 11년, 1285년 3월 19일


 구제(舊制)에 외관(外官)은 예(例)에 따라 삭선(朔膳)을 바치는 것 외에 모두 별선(別膳)이 없었는데, 지금의 대소관(大小官)은 별선이라고 이름하면서 민에게서 땅에서 나오는 것[土宜]과 술, 고기 등의 물건을 거두어 권귀에게 보내어 먹도록 하니 그 폐단이 매우 심합니다. 

고려사, 형법1, 공민왕 11년, 1362년 6월


 고려 후기의 사료들에서는 지방에서 왕실에 바치는 식료품인 진선(進膳)을 수취할 때 지방관들이 추가로 별도로 거두어서 이를 사적인 선물(私膳)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는 식료품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민으로부터 능라(綾羅)를 거두어[賦] 저장하는 곳으로 갑방(甲坊)이라고 불렀다. 공납으로 바치는 양을 채우고 남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모두 유수(留守)가 되면 사사로이 소유하고자 하였다.

고려사, 권단(權㫜, 1228년 ~ 1311년) 열전


 공물로 바치는 직물의 경우에도 조정에 바치는 것 이외에 추가적으로 거두어서 지방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각종 특산물인 공물의 수취 기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내내 불명확했고, 추가적인 수취와 사적인 이용이 발생하기 쉬웠습니다. 


 즉 고려와 조선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인 선물은 지방관들에 의해 피지배층에게 수취된 공물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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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감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감귤 공납은 제주도민을 괴롭혔다.----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동국이상국집 2권, 제주 태수(濟州太守) 최안(崔安)이 동정귤(洞庭橘)을 보내왔기에, 시로 사례하다


숯 조금 보내 준다면, 천금보다 더 값지리. 생전에 그 은공 못 갚으면 죽어서도 잊지 않으리라.

동국이상국집 7권, 춘주수(春州守) 강 장원(姜壯元) 힐(頡) 에게 숯을 빌면서 희롱삼아 주다


 이규보 역시 제주도에 지방관으로 가 있던 최안(崔安)에게 공물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귤을 선물받거나, 또는 현재의 춘천(春州)에 지방관으로 있던 친구에게 숯을 선물로 보내달라 요청하는 시를 남겼죠. 


 이렇게 지방관이 해당 지역에서 수취한 공물의 일부를 선물로 중앙의 고관이나 인적관계를 형성한 다른 사족에게 보내는 행위는 고려시대에 이미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변성아의 "고려말 李穡이 받은 선물의 특징"에서는 목은시고를 조사하여 이색이 각지의 지방관으로부터 57건의 선물을 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이색이 친인척이나 승려들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많았습니다. 특히 이색은 지방관들에게 수산물을 많이 선물로 받아서 이색이 받은 수산물 중 74%는 지방관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미역, 전복, 붕어, 김, 말린 생선, 은어, 문어등 종류도 매우 다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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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전복, 이색이 받은 수산물은 아마 대부분 말리거나 염장해서 운송되었을겁니다.----


 이색이 생활하던 고려 말기에는 소금과 생선은 행상(行商)이 짊어지거나 말에 실어서 유통하는 대표적인 품목이었습니다. 피지배층들은 이런 행상을 통해서 해산물을 구했지만, 이색과 같은 사족층들은 지방관들이 보내주는 선물을 통해 이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지방관의 선물은 어떻게 수령자에게 배송되었을까요?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노경륜(盧景綸)이 역에서 내선(內膳, 왕의 식사용 특산물)을 도성까지 수송하는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사선(私膳)이 거의 반이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1년, 1275년 11월


 각 도의 안렴사가 별함과 함께 백성을 침어(侵漁)하고 사사로이 선물[私膳]이라 하여 역(驛)에 전달하여 실어 나르고 있으니 그 폐단이 심히 크다.

고려사, 형법1, 충렬왕 24년, 1298년 1월


 지방관은 왕실에 바치는 식품을 올릴 때 자신의 사적인 선물을 공적인 운송체계인 역참을 사용해 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참만 사용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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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1호선의 항로와 침몰지점, 차가운 물속에서 다시 태어난 고려의 생활 참조 https://www.koreanart21.com ----


 1208년 침몰한 마도 1호선은 2009년에 발굴되었습니다. 마도1호선의 죽간을 통해 당시 배에서 대량의 곡물과 건어물, 메주, 젓갈류를 수송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마도 1호선에는 이와 함께 836점의 비교적 저렴한 생활자기를 싣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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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년경 침몰한 마도 1호선의 죽간, 최낭중 댁에 보내는 고등어 젓갈 항아리라고 적혀있다.----


 마도 1호선을 포함해 마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1~3호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죽간을 통해 확인된 것은 발송자들이 주로 지방의 향리들이고, 수취자가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중세사 연구자 박종진 교수는 마도1호선이 개인화물을 운송하는 선박으로 조운선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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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1호선의 잔존 선체----


 다만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지방관들은 개경의 권력자에게 선물을 보낼 때 공적인 운송체계를 활용했습니다. 박종진 교수는 마도1호선에 실린 화물이 지방의 향리들이 중앙 무관들에게 보낸 지대나 선물,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는데, 고려시대 선물이 역참을 통해 운송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운선도 사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즉 마도 1호선의 죽간을 통해 볼 수 있는 곡물이나 젓갈, 자기들은 이규보나 이색이 받았던 지방관으로부터의 선물과 유사한 성격이고, 조운선인 마도 1호선을 통해 운송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말 이색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교주도, 동북면, 서북면에서 지방관들이 보낸 수산물 선물을 받았습니다. 유통망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의 조운 및 역참체계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선물을 이색에게 전달하는건 운송비 문제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방관들이 보내는 선물은 역참과 조운망, 즉 공적인 운송망을 통해서 중앙의 고관이나 각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운송비 부담 없이 무료로 보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역참에서 무급으로 봉사하는 역졸(驛卒)과 조운선의 선원인 수수(水手)나 조졸(漕卒)들의 부담을 증가시켰을 겁니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임정(林整)은 성품이 본래 거칠고 사나운데, 도필(刀筆)로 출신(出身)하여 외람하게 재상(宰相)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생략)

 전곡을 조운하는 이외에 무릇 해산물(海産物)·어곽(魚藿)·포해(脯醢)·죽목(竹木) 등물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무겁게 실어다가 공사처(公私處)에 널리 뇌물을 행하여 사사로이 은혜[私恩]를 샀으니...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21일(1403년)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집니다. 지방관이나 지방군 지휘관은 조운선을 사용해서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여 사적으로 서울로 보내서 중앙조정의 세력자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정언(右正言) 우계번(禹繼蕃)이 아뢰기를, "충청도 감사가 사사로이 증여하였고 수가한 조관들이 모두 안연히 이를 받았으므로 문초(問招)하기를 명하셨다가 곧 석방하셨으니, 장차 어떻게 징계되겠습니까. 다시 추문(推問)하여 죄를 매기기를 원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예전 예이니 죄줄 수 없다. 더군다나 대신으로서 간범(干犯)된 자가 많은데, 이런 자질구레한 허물을 모두 죄주면 이것은 조정(朝廷)에 있는 사람을 죄다 바꾸게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4월 7일(1443년


 지방관이 지방재정을 유용하여 중앙조정의 관료나 권력자에게 선물하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관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재정의 유용 자체는 폐단과 관행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존재했고, 때로는 탄핵의 대상이 되지만 때로는 관행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공사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애매함이야말로 고려와 조선의 선물경제가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선물의 증여가 한양에 거주하는 전현직 관료나 세력가에게만 한정된다면 선물경제, 즉 민간수요를 선물을 통해 충족한다고 보기보다는 제한적인 뇌물의 존재에 불과하겠죠. 이색(李穡)과 같은 경우는 고려 말기 성리학의 대부격인 인물이고 대부분의 신진사대부는 그와 학맥으로 얽혀있을 정도였으니 이런 전국적인 선물 증여가 가능했을 겁니다. 조선시대 일부 고위 관료들만이 이색과 같이 전국에서 선물을 받을 수 있었겠죠. 


 일부 권력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족층들도 선물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조선 사대부는 어떻게 선물경제의 혜택을 누렸을까?





조선시대 선물경제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은 1990년대 조선시대 일기 자료를 조사한 이성임의 연구 덕택입니다. 이성임은 조선 중기 일기자료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의 경제생활이 장시(場市)에서의 거래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량의 선물에 상당부분 의존함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조선 경제사 연구에 큰 변화를 일으켰죠.


16~17세기 3인의 조선 사대부들의 일기인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瑣尾錄)이 바로 그 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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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96호, 오희문의 쇄미록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중이던 사족의 경제생활을 잘 알려준다.-----


이 일기들은 비교적 높은 직위의 권력자부터, 어중간한 입지의 전직 관료와 관직에는 나가본 적이 없었던 양반까지 사족층들이 지방관으로부터 광범위한 선물을 받고 이를 통해 수요를 충족시켜왔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료입니다.


이 중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3명 중 중앙정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서 지방관들에게 선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방관으로서 선물을 주는 입장에도 서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정6품 사헌부 정언까지 달했다가 1546년 유배되었다가 19년이 지난 1565년 유배가 해제되어 중앙 관직으로는 종2품 대사헌과 이조참판에, 외직으로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유배가 해제된 다음해인 1567년부터 1577년 죽을때까지 10년간 일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그가 선물을 받은 것과 보낸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죠.


이성임의 "조선중기 양반의 경제생활과 재부관"에 의하면 그가 10년동안 받은 선물은 총 2,855회였고 이 중 평균적으로 55%가 지방관에 의해서 제공되었습니다. 거래를 통해 물건을 구매한 횟수는 10년동안 66회에 불과했으며, 제값을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관아에 값을 대신 치르게 하거나 염가에 거래했습니다.


유희춘이 하위직에 있었던 1567년 10월부터 1568년 9월까지 그가 받은 선물 중 쌀이 187섬이었고, 면포가 49필이었습니다. 그가 1568년에 받은 녹봉은 백미 32섬, 콩 14섬, 보리 6섬, 명주 4필, 포 12필이었는데, 당시 물가로 합계해서 백미 51섬 정도였습니다. 해남과 담양에 있는 그의 사유지에서의 수확량이 83여섬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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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유희춘의 곡물 수입 도표----


유희춘의 1568년 수입에서 선물의 비중은 곡물과 면포만 고려해서 58%에 달합니다. 녹봉으로는 중앙관료로서 체면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기에 충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게다가 선물은 곡물뿐이 아닙니다. 생활용구, 육류, 해산물, 과일류와 야채류까지 감안하면 유희춘의 경제생활에서 선물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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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숭어----


미암일기에 10년간 기록된 선물기록에서 유희춘이 받은 해산물 선물은 총 1,132회에 달했습니다. 1년에 많게는 200회, 적을 때는 50회 정도의 해산물 선물을 받았습니다. 1568년에 받은 해산물 종류 중 수가 많은 것만 쳐도 숭어 80마리, 말린 생선이 200마리 이상, 청어 110마리, 생전복 185마리등 종류도 다양하고 그 양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해산물은 대부분 지방관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유희춘은 장시에서 거래할 필요 없이 제수용품이나 식품용으로 풍부한 해산물을 구할 수 있었죠. 유희춘은 지방관에게 선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동원하도록 해서 자신의 집을 짓도록 하거나 첩과 딸들을 위한 살림살이인 유기, 수저, 가구, 접시, 옹기, 가마솥과 각종 식품을 선물받기도 했습니다.


해산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려운 약재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유희춘이 한양에서 관료로 있을 때는 조정의 관청에 있는 약방에서 약재를 공급받았는데,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인척에게 제공하기 위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약재는 관청에서 얻거나 지인에게서 선물로 획득했고, 지방관에게 고급약재를 선물받기도 했습니다. 약값을 쌀로 치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고, 타인의 요청을 받아 약재구매를 중개하는 경우에 한정되었죠.


1571년 2월 4일 유희춘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데 이 때부터 선물의 수령자가 아니라 지방관으로서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일기에서 선물을 받기보다는 보내는 사례 위주가 관찰사 재임기간에 두드러집니다.


유희춘이 전라도에서 머물 때에도 약재의 부족함을 겪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약재의 청탁을 받으면 이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약재는 한양으로부터 왔는데 아마도 중앙관청에서 진상받은 약재들로 추정됩니다.


중앙관료나 지방관으로서의 유희춘은 각지에서 약재가 공물로 진상되는 한양과 달리 약재가 부족한 지방에 약재를 수급하고 유통시키는 선물경제의 중간고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희춘이 고위 관료로서 국가권력에 가까운데다 이를 기반으로 광범위한 인적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고려와 조선의 독특한 선물경제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인물이죠.

나중에 소개할 오희문의 사례는 이러한 선물경제가 지방의 약재유통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죠.

유희춘의 사례가 중앙권력에 가장 가깝고 광범위한 인적관계를 지닌 경우를 보여준다면, 그보다 살짝 앞 세대인 이문건은 어느 정도 권력과 연계를 가지고 있지만 인적관계망이 보다 제한적이었던 사족의 선물경제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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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건은 손자를 키운 양아록으로 유명하다.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의 이혁 그림 참조---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조광조의 문하로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은 후 눈치보지 않고 조문을 갔었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해 이조좌랑에 정3품 승문원 판교까지 올랐지만 1546년 을사사화 당시 조카 이휘가 역모죄로 처형당한데 연좌되어 경상도 성주(星州, 현재의 대구 옆의 성주군)로 유배된 이후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유배기간에 작성한 일기 덕에 전직관료가 권력과 멀어진 후 점차 다 포기하고 지방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선물경제를 영위했는지 알 수 있죠.


이문건이 유배된 시점부터 지방관들은 호의적이었습니다. 목사와 판관은 거처를 마련해주고, 관노비를 지급했습니다. 목사 남궁숙(南宮淑)은 이문건과 승문원에서 함께 근무한 인적관계가 있었죠. 유배 중임에도 이문건은 성주 지방관아에서 삭료(朔料)로 쌀를 받았는데 부정기적이었습니다.


사실 삭료 자체는 이문건의 경제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양도 평균적으로 6~12말 정도가 일반적으로 많은 양도 아니었죠. 이문건의 경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물이었습니다.


경상도 성주는 내륙지방이지만 이문건 역시 유희춘처럼 어류, 전복, 낙지, 게, 굴, 젓갈, 김, 미역등의 해산물을 선물받았습니다. 워낙 다양한 생활물자를 선물받았기 때문에 지방의 발달하지 못한 장시(場市)에서 동일한 물품을 구하는게 오히려 더 까다로왔을겁니다.


곡물만 따져도 그가 자신의 보유 토지에서의 연 수확량인 30~70여석의 곡물은 동시기 선물받은 곡물에 비해서 약간 적은 양이었습니다. 면포와 다른 각종 식품, 생활용품을 고려하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문건의 경제생활이 선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이문권은 일기를 작성한 226개월동안 6,294회의 선물을 받아서 월평균 27.8회에 달했습니다. 유배기간은 1545년~1567년 사이에 5,989회의 선물을 받아 월평균 30.1회로 거의 매일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그는 선물로 매년 수십석의 쌀과 콩, 보리와 수십필의 면포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방구, 육류, 반찬도 받았죠. 선물의 증여자 중 40.1%가 지방관이었고, 그중 성주 지방관의 비중이 56.4%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이색이나 동시기의 유희춘과 달리 그는 고향이자 유배지인 성주 지방관 위주로 선물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역량, 친족과 친구들과의 교유관계가 이색이나 유희춘에 비해서 협소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전직 관료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죠.


이는 성주 지방관과의 불화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인적관계를 가진 남궁숙과 달리 새로 부임한 성주목사 나사훤(羅士愃), 이원손(李元孫)등은 이문건이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관노비를 회수하는 등 까다롭게 대응하였습니다. 이는 지방관으로부터의 선물 감소로 나타나게 되죠.


그는 지방 사족과 향리들과 인적관계망을 구축하면서 성주 지방에서의 방납(防納)에 참여하여 4~5배에 달하는 폭리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지방관에게서 3배만 받으라는 지적을 받기도 하죠. 중앙권력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지방에서의 인적관계망 강화로 대체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한 셈이죠.


이문건의 사례는 지방 사족의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국가의 현물수취와 지방재정에서 재분배받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는걸 알려줍니다.


그럼 아예 관직에도 나가보지 못한 사족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쇄미록(瑣尾錄)을 통해 임진왜란의 시기에 피난생활을 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유희춘이나 이문건과는 또 다른 입장에서 사족의 경제생활을 엿볼 수 있죠.


오희문은 대과는 커녕 소과도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유희춘은 커녕 이문건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사족집단의 인적 네트워크는 오희문 역시 지방관에게서 수수하는 선물을 통해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오희문의 임진왜란 당시 피난 당시 경제생활은 크게 1593~1594년도의 충청도 임천에서와 1597~1598년의 평안도 평강에서의 피난 시기가 이성임에 의해 조사되어 있습니다.


충청도 임천에서의 1년 동안 오희문은 총 153회의 선물을 받았고, 월 13회에 해당합니다. 오희문은 임천에 거의 연고가 없었으나 아들 오윤겸의 친구인 신응구가 근방에 있는 함열의 현감으로 있었습니다.


오희문은 신응구에게 딸을 후처로 보내서 인적관계를 강화해서 선물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사위인 함열 현감 신용구는 장인인 오희문에게 2년여동안 40여차례의 공식적인 선물로 곡식과 생선, 미역, 고기, 소주등을 보냈으며 명절, 생신, 제사등 특별할 행사때 마다 곡식, 해산물, 간장등 각종 식품을 보냈습니다. 오희문은 이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일기에 기록했죠.


하지만 이 시기 오희문의 경제생활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근 지방관에게 선물을 요청할 때 냉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가솔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죠.


반면 평강에서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평안도 평강에서의 1년 동안 오희문은 총 407회의 선물을 받았고, 월 34회로 거의 1일당 1회의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아들 오윤겸이 평강의 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선물을 수취할 수 있었으며, 관아 인근에서 필요한 물품을 언제든 가져다 사용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보낼 때 아들인 오윤겸에게 이를 보내도록 했죠.


오희문은 임천에서 피란하던 시기 선물로 61섬 9말 3되의 곡물을 수령했습니다. 반면에 평강에서 피란하던 시기에는 64섬 4말 5홉이었죠. 임천에서의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선물에서 곡물의 양이 비슷한 것은 가계가 넉넉하지 못할 때 선물이 주로 곡물이었기 때문이죠.


오희문 역시 선물을 통해서 소, 돼지, 사슴, 노루, 꿩고기등 다양한 육류와 가자미, 갈치, 고등어, 광어와 어란과 같은 다양한 해산물을 임진왜란 도중에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물의 제공자는 항상 지방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오윤겸이 관직에 나아감으로서 오희문을 통해 오윤겸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이들의 선물이 제공되었죠.


아마도 이는 성공적이었을겁니다. 오희문과 달리 아들 오윤겸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격 인물이 되었고 1628년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니까요.


유희춘과 오희문의 사례는 중앙조정과 지방관과 연결되는 정치적 영향력의 유무와 인적 네트워크의 넓이에 따라서 조선의 사족집단의 경제생활과 필요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는 걸 알려줍니다.




선물경제는 부정부패인가? 정치행위인가?



조선의 선물경제는 조선만의 특별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최소한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진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전근대 한국의 전통적인 경제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는 부족사회에서 관측되는 선물경제와 달리, 국가권력에 의한 수취체계와 지방재정을 기득권층인 사족에게 선물이라는 명목 하에 재분배하는 독특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물경제는 부정부패일까요? 너무 현대적인 관점으로 선물경제를 판단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졸하였다.(생략)

천성이 온화하고 후하여 모나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검소하여 마치 빈한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선조실록 10년 5월 1일 (1577년)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의 졸기


유희춘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이 당시 선물경제에 대해서 사족들이 심각한 폐단이나 부정부패로 여기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국가재정이나 지방재정을 전용해서 자신과 친인척, 인적관계망에 있는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는 것은 크게 문제시 되는 일이 아니란 거죠.


유희춘은 무장현감으로 부임했던 경험을 살려 1559년 치현수지(治縣須知)라는 목민관의 지침서를 남깁니다. 이를 통해서 당시 그가 어떤 생각으로 선물을 받거나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렴하게 현지를 감독한다. 청탁하는 일이 통하지 않게 하고, 음식대접을 받지 말며, 수령의 몫으로 주는 식물을 사용하지 말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생략)

무릇 친척과 옛 친구로 나에게 은덕이 있는 사람은 고루 구제할 것을 기약한다. 비록 사소한 물건일지라도 고루 나누어 주어 혹시 빠트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지기(知己)에게는 반드시 융숭하고 후하게 해야 한다

유희춘의 미암집, 治縣須知


지방재정의 유용과 사적인 선물은 조선시대 "청렴"의 기준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는 친척과 옛친구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 역시 목민관의 의무로 인식했기 때문이죠. 아마도 탐관오리와 청백리 사이의 차이는 지방재정의 유용 자체보다는 그 정도가 얼마나 과도한가에 달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전시과의 해체와 녹봉지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현상과 그리고 이를 계승한 조선 역시 과전 및 직전을 비롯한 수조권이 해체되고 녹봉이 유명무실해졌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관료의 공식적이고 규정화된 급료체제가 아니라 재량적이고 비공식적인 선물지급이 전현직 관료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더 중요해진 결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헌창 교수는 한국경제통사에서 선물경제라는 명칭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민간에서 상호 부조를 위해서 선물을 했다면 선물경제라 부르는게 맞지만, 조선의 선물 수수는 지방관에 의한 정치적 성격의 선물로서, 재원이 지방관 개인이 아닌 국가재정으로부터 나오므로 이를 재분배로 정의하는게 합리적이라고 규정했죠.


그는 그런면에서 당시의 선물이 국가권력에 의해 피지배층의 잉여를 유력 사족에게 재분배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선물경제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서 정치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국가의 권력체계와 연결되어 뻣어나가는 선물의 수수는 사족 집단간의 친족 및 친구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중앙관료나 재지사족은 지방관에게서 선물을 수수하고, 지방관이 중앙관료가 되거나 은퇴하면 다시 선물을 받는 입장이 됩니다.


중앙관료나 지방관은 친족과 친구들에게 선물을 통해 국가가 수취한 각종 현물을 유통시키는 중간고리 역할을 함으로서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다양한 상품들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는 사족집단이 긴밀한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이익을 공유함으로서 조선의 장기적 지속이 가능하도록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하게 됩니다. 정치적 안정성을 해칠 만큼 과도한 부패는 탄핵의 대상이 됨으로서 사족이 과도하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 제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건 선물경제의 안정성을 보장해 줍니다.


청백리와 탐관오리의 사이에서의 애매함이야말로 조선의 선물경제의 묘미였던 걸까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장점만 있는건 아닙니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수백년간 계속된 선물경제는 아마도 시장경제 발전에 굉장히 커다란 장애물이었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냐구요?


바로 다음글(링크)로 이어집니다.




출처: 대체역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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