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웬만하면 타블렛 쓰지 마카로만 조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갤 보다 보면 마카 관련 질문이 가끔 올라와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써 봄. 전공자도 아닌 그붕이의 주관적인 느낌이 섞인 리뷰 비슷한 거고 좀 기니까 볼 사람만 보셈 짤은 최근에 그린 내 그림들이양

우선 나는 열네 살 때 사람 그림을 본격적으로 처음 그렸고, 집에 있던 색연필로 대충 색칠하다 몇 달 뒤 추석에 받은 용돈 조금 꽁쳐 놓은 걸로 신한마카를 15자루 정도 사서 그걸 가지고 채색을 하기 시작했어. 갤에서 '그림 N년차'라는 표현에 대해 말이 많은데 내 말은 일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림을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리기 시작한 지 11년 됐다는 말임.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는 패스하고...그렇게 계속 마카로만 그리다가 스물다섯이 됐다.ㅋㅋㅅㅂ

내가 처음 써 본 마카도 신한마카였고, 요즘은 저렴한 중국산 마카가 많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웬만한 사람들은 신한이나 알파로 마카에 입문하지 않을까 싶어. 여태껏 써 본 마카는 신한, 알파, 코픽, 쿠레타케, 네오피코, 프리즈마, 윈저앤뉴튼 정도고 지금 가지고 있는 마카의 비율은 대충 신한:코픽:알파:그 외 이렇게 5:2:2:1 정도 되겠네. 정확한 개수까지 세 보지는 않았는데 250자루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간 애들까지 합치면 더 많겠지? 어쨌든 화방이 아닌 알파 같은 일반 문구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카는 신한, 알파, 코픽 정도니까 이 3개를 써 보며 느낀 점 위주로 적어 보려고 함. 덤으로 마카 쓸 때 쓰는 소도구 같은 것도?

신한

요즘은 구형(각진 모양)을 파는 곳이 거의 없으니 신형 기준으로 설명함. 구형에서 신형으로 리뉴얼하고 브러시 마카도 출시한 지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바뀐 넘버링도 그렇고(기존에는 숫자만 있었는데 리뉴얼하면서 알파벳+숫자로 바뀌었음), 전체적인 발색이 약간 순한맛이 된 것도 그렇고 코픽을 의식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음. 욕 아님. 오히려 좋았음.

잉크 묻어남도 거의 없어졌고 작은 광택이나 무늬 등을 표현하려고 흰색 잉크를 올렸을 때 마카 잉크 색이 배어나는 현상이 눈에 띄게 줄어듦. 번지는 것도 많이 나아짐. 단 빨간색이 들어간 색 같은 경우는 안료 자체의 성질이 그런 건지 묻어남+배어남이 조금 있는 편이라 진한 빨강을 즐겨 쓴다면 코픽 본체 하나 사고 리필잉크 사 놓고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리뉴얼되면서 가격도 좀 양아치가 됐는데(오프라인 기준 3500원 언저리) 그래도 그 돈 내고 살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브로드닙(넓은 촉)은 특별할 것 없이 잘 나오는데 파인닙(얇은 촉)은 끝부분이 쉽게 뭉툭해짐. 그라데이션은 그냥 뭐 그럭저럭 잘 된다. 다른 브랜드 마카랑 섞어도 무난하게 잘 되기는 하는데 가끔 밝은 색들끼리 그라데이션을 하면 하얗게 뜨는 경우가 있더라. 근데 뭐 대충 중간 색으로 쓱 칠해 주면 해결되긴 한다. 색은 전체적으로 선명한 느낌이 강한데, 코픽이 파스텔톤을 예쁘게 뽑는다면 신한은 쨍한 색을 잘 뽑는다는 게 개인적인 느낌임. 안 좋게 말하면 코픽은 무슨 색을 써도 어쩐지 유치한 느낌이 있고 신한은 무슨 색을 써도 이상하게 쌈마이한 느낌이 있음. 뭐 어떤 느낌을 선호하는지는 개인 취향이니까 알아서 골라 쓰면 되긴 하겠지만 나는 여러 가지 편의성+취향 때문에 코픽을 선호하긴 함.

브러시 마카는 개인적으로 좀 별로였다. 일단 같은 넘버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마카와 브러시 마카의 색 차이가 눈에 띌 정도로 나는 경우가 많았고 브러시가 좀 조루다. 한 놈만 그런 게 아니라 단체로 조루였음. 어차피 브러시 마카를 잘 쓰지 않아서 걍 안 쓰면 그만이긴 하지만 좀 아쉽긴 했다. 최근 2년간 브러시 마카를 산 적이 없어서...요즘은 뭐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알파

쨍한 색은 신한만큼 쨍하고 파스텔톤도 코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잘 뽑아서 가성비로 종종 찾는다. 가격은 신한보다는 저렴함. 오프라인 기준 2500원 언저리였던 듯? 발색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손에 묻어남+번짐+흰색 잉크 올렸을 때 색 배어남+잉크 튐...이라는 단점들이다.

잉크 튀는 게 뭐냐면 종이에 마카를 쓱쓱 칠하면 엄청 작은...개미 더듬이만한 잉크 방울들이 주변에 튄다. 그림을 크게 그리는 사람이라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주로 A5사이즈 언저리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아주 거슬리고, 진한 색 잉크가 튀었는데 그 위에 연한 색을 칠하는 경우 이게 번지면서 티가 엄청나게 난다. 파인닙으로 칠해도 조금 튀고, 브로드닙으로 넓은 범위를 칠하면 벅벅 그을 때마다 옆에 스플뎀 오지게 박힌다.

다른 브랜드에서 이 거지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건 본 적이 없다. 비싸고 좋은 종이에 칠하든 장당 50원도 안 하는 켄트지에 칠하든 이 씨-발것은 평등하게 튄다. 천천히 칠하든가 종이 결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칠하면 그나마 좀 덜하긴 한데 그림 그릴 때 종이 눈치까지 봐야 한다는 점이 좆같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신한을 쓰다 보면 파인닙이 뭉툭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건 뭉툭해지면서 뭔가 물렁해지는 느낌...? 근데 잉크가 시원시원하게 잘 나오는 느낌이라 사용감은 나쁘지 않다. 원색 계열은 묻어남+배어남이 심해서 개인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데 파스텔톤 계열은 사 볼 만하다. 난 연노랑이랑 연보라 등등 연한 색 위주로 잘 쓰고 있음.

알파도 리필잉크를 파는 것 같은데 아직 써 보지는 않았다. 브러시 마카도 안 써 봄ㅈㅅ

코픽

돈만 있으면 그냥 이거 쓰라고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상술했듯 좀 파스텔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쨍한 색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좀 순한맛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묻어남 없고, 번짐 적고, 그라데이션 잘 돼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선호하는 마카다. 흰색 잉크 올렸을 때 색 배어남도 전혀 없다. 장점에 대해서는 딱히 더 말할 게 없네. 그냥 쓰기 아주 편함. 단점은 뭐 마카 쓰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좀 비싸다는 것...(오프라인 기준 5000원 언저리)그래서 나는 자주 쓰는 색은 리필잉크랑 리필닙을 사 두고 씀.

닙은 단단한 편이긴 한데 신한처럼 좀 뭉툭해지는 느낌이 있다. 사실 소모품인 마카 닙이 계속 뾰족하기를 바라는 것도 도둑놈 심보긴 하지만...다행히 리필닙도 따로 판다. 리필닙용 집게도 파는데 왜 파는지 모르겠음. 걍 물티슈로 잡고 뽑으셈. 리필닙 종류도 몇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닙도 있고 굵은 볼펜 정도로 얇게 나오는 딱딱한 닙도 있다. 후자는 세밀한 작업 할 때 편하긴 하지만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찔끔찔끔 나온다.

코픽 챠오, 코픽 스케치가 있는데 둘 다 브러시 마카임. 개인적으로 브러시 마카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 둘 다 몇 개밖에 안 써 봤는데 그냥 뭐...붓 달린 코픽이다. 코픽은 코픽이라 신한 브러시보다는 나은데 코픽 챠오는 잉크 용량이 적어서 그런지 가성비 십창인 느낌이 들긴 함. 가격은 챠오가 코픽 오리지널보다 1500원 정도 저렴했고 스케치는 그보다는 조금 더 비쌌던 것 같다. 체감상 스케치가 좀 더 잉크 양이 많았던 듯?

기타 도구

마카 쓰면서 필요한 기타 도구라고 해 봤자 펜이나 잉크 정도? 나는 시그노 0.28이랑 코픽 멀티라이너 0.03으로 선 따고 채색한 다음 시그노 0.5, 0.28, 코픽 멀티라이너 0.03 가지고 한 번 더 선 정리해 줌.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냐면 시그노는 지우면 선이 얼룩덜룩해지면서 옅어짐. 이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깔끔한 느낌이 좋아서 그냥 한 번 더 작업함. 개인적으로는 멀티라이너보다 볼펜을 선호하는데, 코픽 멀티라이너를 쓰는 건 지금 구할 수 있는 펜 중에서 코픽 멀티라이너 0.03보다 얇은 게 없어서 쓰는 것뿐임. 아 그리고 지우개질 안 한 시그노 선 위에 마카 쓰면 번짐. 마카 촉에 까만색 묻음...

작은 광택 같은 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쿠라 젤리롤을 주로 씀. 더 세밀하게 표현하고 싶으면 윈저앤뉴튼 화이트 잉크를 쓰는데 뚜껑 잘 닫아 놔도 맛이 가더라. 아무튼 섬세한 무늬 같은 걸 그릴 때는 펜촉에 잉크 찍어서 씀. 얼마 전에 세일러 잉크를 샀는데 좀 적응되고 나니 쓸 만하긴 하더라. 근데 그냥 무지성으로 막 쓰기에는 윈저앤뉴튼이 더 나은 것 같음. 윈저앤뉴튼 금분/은분 잉크가 있는데 잘 쓰면 예쁨. 예전에는 기본 선 작업할 때 G펜이나 스푼펜에 만화용 잉크 찍어서 하기도 했는데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 요즘은 그냥 볼펜 씀.

마카가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스킹테이프 쓰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는데 어차피 마카 벅벅 칠하면 번지는 게 종이 안쪽으로 번지는 거라 종이 겉에 붙이는 마스킹테이프는 번지는 것 자체를 막는 용도로 쓰기보다는 작거나 뾰족한 부분을 정확히 칠하기 위해 쓰는 게 더 적합한 것 같음. 에어브러시 같은 거 쓸 거면 무조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에어브러시 쓰는 사람...여태 한 명도 못 봄...

아 그리고 왜 굳이 손그림만 고집하냐면...원래는 부모님께서 내가 그림 그리는 거 정말 싫어하셔서 손그림도 눈치 봐 가면서 그리고 타블렛은 꿈도 못 꿨음. 그러다 나중에 대학 가고 알바 해서 돈 벌고, 기숙사-자취 테크 타면서 타블렛으로 그림 그려도 괜찮은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그냥 펜으로 세밀한 부분 하나까지 집중해서 그리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재밌어서 그냥 계속 손그림 그리게 되더라. 급식 때부터 좀 아팠고 지금도 계속 약 먹으면서 지내는데 이렇게 손으로 사각사각 그리는 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음. 그리고 타블렛을 사더라도 내가 도저히 적응을 못 할 것 같아 이제ㅋㅋㅋ

진짜 끝

전문가도 아니면서 내가 뭐라고 이렇게 주절주절 길게 써 놨는지 모르겠넹 그래도 한 명한테라도 도움 됐으면 좋게써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질문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