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업무가 많은 일을 하기에 어둑해진 길을 나서면 더이상 후련한 감정도 들지 않는다.

오늘 미쳐 끝내지 못한 일, 그리고 이런저런 신경쓸 것들이 머릿속을 괴롭히기에

'될 대로 돼라.'라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곤 한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시간은 업무를 마치고 회사의 문밖을 나서는 순간이 아닌,

저렴하다는 핑계로 편의점에서 사온 푸석한 도시락과 한캔에 2천원도 안하는 싸구려 발포주를 반쯤 비웠을때다.

그렇게 허기가 가시고 적당히 아쉬운 취기가 오르면 나는 대항해시대를 켠다.

사실 잘 모른다.

왜 이런 게임을 아직 하고 있는지.

이따금 누군가 하는 게임이 있냐고 물으면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롤이라 답해버린 적도 많다.

그리 창피한 일도 아닌데 말이다.

"나도 그거 어릴 때 해봤어요! 그런데 아직도 서버가 살아있어요? " 따위의 호들갑이 듣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매일 바라보는 이 화면이 그들에겐 그냥 잠시 스쳐간 어린시절의 추억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낡아빠진 폴리곤 화면에는 어린시절의 내가, 20년이 지난 날의 내가 있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이 로딩되면 나는 가장 먼저 친구목록을 확인한다.

잠시 현생이 바쁘다는 이유로 접속을 뜸하게 하다 이내 스쳐간 사람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사람들.

이 사람은 곧 결혼한다하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은 이직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다 했다.

드르륵 드르륵 내려가는 스크롤에 100명 남짓한 친구목록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그리고 애환이 있다.

누군가의 레벨이 어떻고 배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까마득히 오래된 대화주제가 되었다.

오랜 세월의 인연은 게임을 넘어 그 사람의 현실과 맞닿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내 처지가 이러함은 저들도 안다.

무언가 의욕적으로 해보겠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무엇하나 진득하게 하지못하고 또래보다 조금 불안한 삶을 사는 나를.

그 사실에 창피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나도 그리고 너도.

살아온 인생만큼의 애환이 있을 테니까.

다만 내 처지가 조금 더 어두울 뿐이다.

그리고 이 투박한 게임에서는 너도 나와 같다.

다른 화려한 게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익숙함을 찾아 이곳으로 왔지 않은가?

별것아닌 그 동질감으로 나는 너와 같음을 느끼고 위안을 얻는다.

팍팍한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행복이다.

리스본 광장에서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는 너희들과 일면식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 저녁이 깊어간다.

밤늦게 누가 볼까 싶은 외치기가 뜸해지는 저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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