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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28 - 응답하라 1930년대

운영자 2019.11.11 15:10:17
조회 129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128


응답하라 1930년대


1934년 6월호의 <신동아> 기사 중 허연(許然)이란 사람이 기고한 ‘일영면업경쟁(日英綿業競爭)’이라는 글을 찾았다. 깨알만 한 글씨의 조악(粗惡)한 인쇄였다. 그것도 세로쓰기로 줄과 줄 사이의 간격이 거의 붙어 있는 상태였다. 한두 장만 봐도 벌써 눈이 쓰리고 충혈됐다. 그 대략의 내용은 이랬다. 

일본과 영국의 면업자 회의가 열렸다. 영국은 일본 섬유제품의 수출을 영국 식민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제한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이 섬유제품을 덤핑하는 바람에 손해가 많았다. 일본은 영국 식민지에서만 일본 면제품의 수입을 제한하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만주의 싼 임금으로 면제품을 만들고, 영국은 인도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했다. 일본과 영국 둘 다 값싼 노동력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두 나라 면제품의 승부는 기술에 있었다. 기술력에서 영국을 누른 일본이 상승세에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의회는 관세법안을 통과시켜 일본 상품의 수입을 제한했다. 영국 편인 이집트도 마찬가지 정책을 취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면포(綿布)의 상당부분이 인도로 수출되고 있었다. 영연방(英聯邦) 전체가 일본제품에 대해 수입제한 조치를 취했다. 일본은 인도의 면화에 대해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산업혁명 이후 거의 독점적으로 세계시장을 지배하던 영국이 일본의 추격에 흔들리게 되자 전 세계가 일본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전쟁 덕을 톡톡히 본 일본은 자본과 기술에서 이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1920년대 이래로 신(新)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산업의 발달과 함께 외국무역과 해운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나 캐나다에서도 일본제품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자 노골적으로 영국·미국과 무역충돌이 일고 있었다.

기사는 이어서 경성의 모습을 알리고 있었다. 외국영화들이 수입되어 대중에게 선보였다. ‘아메리카의 비극’과 게리 쿠퍼 주연의 ‘모로코’가 상영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파리의 지붕밑’이 들어와 흥행되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도 인기를 얻고 있었다. 조선 영화로는 ‘방아타령’,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이 상영되고, 이규환(李圭煥) 감독이 만든 ‘임자 없는 나룻배’ 는 과거 나운규(羅雲奎) 식의 모션을 어느 정도 없앴고 촬영에서도 특출한 재주가 나타났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신흥 청년부자 박흥식(朴興植)의 화신빌딩이 지어진 지 1년이 되면서 건물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쓴 글이 보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의 아이 때 이름은 동아빌딩이다. 새 이름은 화신백화점 동관이다. 내가 태어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민규식(閔奎植) 씨가 온 재산을 기울여 최첨단으로 건축한 나는 북촌에서 비교할 건물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편이다. 촌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엘리베이터로 몰려들어 타보고 이렇게 말한다.

“머리가 휭하고 어지럽네.”

그러면서도 벙긋 웃는다. 나는 종로 네거리에 딱 버티고 서서 번쩍거리는 유리창을 가슴에 붙이고 있다. 나의 뱃속으로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드는 건 보기만 해도 일대 장관이다. 4층 식당에는 250명의 점원이 일한다. 문간에는 유럽의 무사복장을 한 아이가 “어서옵쇼”를 연발하고 파란 양복에 앞치마를 입은 웨이트리스들이 왔다갔다 한다. 1층의 진열장은 철 따라 새록새록 잘도 장식이 된다. 봄철에는 비단옷감을 죽 늘어놓기도 하고 여름에는 수영복에 여행기구들이 즐비하다. 지나가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입이 그걸 보고 딱 벌어진다. 지난 8월이다. 백화점에서 굉장한 경품 행사를 했다. 금시계나 옷 정도가 아니었다. 성북동에 별장 한 채를 지어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손님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그 행운은 종로 삼성당약방에서 차지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헛물을 켰다.’ 

조선인 기업가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얘기였다. 시대상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여자 전화교환수의 일기도 보였다. 내용은 이랬다.

‘1932년 9월22일. 아침 6시30분에 일어났다. 머리가 무거웠다. 하루 쉬고 싶지만 직업여성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오전부터 번호를 잘못 연결해 야단을 맞았다. 불쾌했지만 나의 잘못이라 참았다. 다시 다른 번호에 불이 깜빡였다. 전화 가입자가 다짜고짜 욕을 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이 생활을 당장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진정한 후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상대방이 껄껄 웃었다. 

나는 여자 전화교환수였다. 매월 30원의 수입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어느새 오후도 가고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광화문통을 지났다. 아편중독자들이 누워 있었다. 전화교환수나마 일자리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흥미 있는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실업계의 거성(巨星)을 찾아서’라는 코너의 ‘박흥식 씨 방문기’라는 제목의 탐방 기사였다. 해방 전 그는 화신백화점의 주인이었다. 1935년 새해를 맞으면서 그는 <신동아> 기자와 어떤 얘기를 나누었을까? 나는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거기 박흥식 씨 댁이죠. 지금 댁에 계신가요?”

기자가 묻는다.

“안 계십니다. 아마 선일직물회사에 가셨을 거예요.”

집의 식모의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기자가 다른 곳으로 전화한다.

“거기가 선일직물회사죠,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지금 안 계십니다. 화신상회로 걸어보십시오.”

기자가 다시 전화를 건다.

“여보시오, 거기가 화신이오? 사장 나오거든 전화 좀 받으라고 하십시오.”

화가 난 어조다.

“안 계십니다.”

기자는 박흥식을 인터뷰하기 위해 20일간을 연락하다가 기진맥진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3일 화신백화점 사장실에서 <신동아> 기자가 박흥식을 만났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서른두 살입니다.”

그 말에 기자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아찔했다고 한다. 너무나 어린 성공한 청년실업가였다.

“취미가 무엇입니까?”

기자가 물었다.

“취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담배 한 모금, 술 한 잔 먹을 줄 모릅니다. 장기나 바둑도 둘 줄 모르고 화초를 키우거나 영화를 볼 줄도 모릅니다. 취미라고 하면 내 사업이라고 할까요?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사업이 오락도 되고 생명도 되는 거죠.”

박흥식의 대답이다.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확장하실 겁니까?”

기자가 묻는다.

“봄부터 공사비 150만 원으로 종로 네거리 서북쪽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을 신축하게 됐습니다. 아마 서울에 있는 백화점 중에서는 제일 크게 될 겁니다.”

“사업을 하시는 중에 곤란하던 일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많지요.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제가 처음 상경했을 때였습니다. 친구나 친척 하나 없는 스물세 살의 제가 회사를 만들려니 누가 신용해 주겠습니까?”

기자는 박흥식이 그때를 회상했는지 얼굴을 붉혔다고 묘사하고 있었다.

“외국에 직접 관계하는 나라는 몇 군데나 됩니까?”

기자가 물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핀란드, 캐나다, 미국 등 8개국과 직수입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종이류와 잡화를 수입합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신문 인쇄지는 동양의 독점판매권을 가지고 있어 칭다오나 텐진, 난징 등 중국 각지까지 배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의 소장(少壯) 실업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고 기자는 쓰고 있었다. 

해방 후 박흥식은 친일파 제1호로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체포됐다.

1935년 2월호 <신동아>에서 모윤숙(毛允淑)의 수필 한 편을 찾았다. 그녀는 이 땅의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이미 죽은 모윤숙의 80년 전 젊은 시절 삶은 어땠을까? 이화여전을 졸업한 모윤숙은 북간도에 있는 학교에 취업이 됐다. 당시에도 여학생들에게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였나보다. 모윤숙은 졸업 전부터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취업만 된다면 북간도라도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가지를 등에 차고 가는 곳이 북간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거장에 친구들이 환송을 나왔다. 먼 곳으로 간다고 친구들이 교가(校歌)를 불러주고 선생님이 책 한 권을 선물해 줬다. 그녀를 태운 기차는 북(北)으로 북으로 달렸다. 함경도 회령의 두만강을 건너서부터는 중국인들이 모는 딸랑거리는 방울을 단 마차를 타고 갔다. 이국(異國) 풍경이 전개됐다. 석양을 받은 드넓은 들판 여기저기에 초가가 보였다. 흰 옷을 입은 조선 여인들이 갈구리를 들고 낙엽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황량한 만주벌판의 광경을 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관을 잡고 들어갔다. 허공에 초승달이 떴다. 점심도 저녁도 거른 그녀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윤숙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위원회가 결정했다. 그의 작품 중에 친일성향의 시가 있다는 이유였다. 

1939년 11월1일 동경에서 발행된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을 구해 읽었다. 당시 조선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글 사이에 조선인의 글도 실려 있었다. 김소월(金素月), 주요한(朱耀翰), 정지용(鄭芝溶), 백석(白石), 모윤숙(毛允淑)의 시(詩)가 보이고, 이효석(李孝石)의 메밀꽃 필 무렵과 이태준(李泰俊)의 까마귀, 이광수(李光洙)의 무명이 목차에 나와 있었다. 화장품과 약 선전 광고들이 보였다. 

일본의 한 잡지사 기자의 경성 기행문도 있었다. 일본인이 본 당시 경성의 모습이었다. 일본인들의 기행문들이 더 있었다. 나는 그 기행문들을 통해 시간 저편의 푸른 안개 속의 경성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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