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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이웃

운영자 2022.10.28 18: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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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타운에서 그 동안 말을 건네며 가까워진 노의사가 있다. 여든 아홉살의 그가 동해의 실버타운을 떠난다고 하면서 자신의 방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실버타운에 묵는 노인들의 다음 코스는 대형병원이나 그 근처인 것 같았다. 아침 일곱시 반쯤 그의 방으로 갔다. 창가 탁자 위에 빵과 잼, 버터 그리고 에그스크램블이 담긴 흰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 옆의 창을 통해 회색 바다 저쪽 수평선 위로 해가 떠 오르고 있었다. 노의사와는 몇 달 동안 실버타운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지만 은은한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실버타운 내에는 사회와는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다. 노인들은 지금 여기 오늘 하루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의사인 노인은 실버타운 내에서 일주일이면 한 두 번씩 다른 노인들의 무료진료를 했다. 마지막까지 이웃에게 좋은 향기를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된 노의사는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실버타운의 노인들은 그곳을 나가는 사람들과 말로는 다시 봅시다라고 하지만 영원한 이별인지를 다 안다. 노의사가 내게 빵을 자르고 버터를 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대구 출신인데 바다가 보이는 부산에서 개업을 했었죠. 툭 터져나간 청담색 바다가 너무 자유로워 보였어요. 밤에는 검은 바다 위에서 고깃배가 불을 반짝이는 모습도 좋았구요.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오십년 동안 살았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의원문을 닫게 되니까 하얀 파도가 일직선으로 밀려오는 여기 동해의 실버타운으로 옮긴 거죠. 같은 바다라도 순간순간 표정이 다르고 색이 달라요. 그러다가 이제 여생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숲에서 살아보기 위해 옮겨가는 겁니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맡아보고 싶어요. 오랫동안 바다 옆에 살았는데 바다가 부담스러워 질 때가 있었어요. 비바람치고 흐린 날 어두운 바다를 보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는 거예요.”

노인의 말에 공감했다. 며칠 전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먹구름 덮인 검은 바다에서 건너오는 암울한 기운이 가슴에 들어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사람 하나 없는 비오는 넓은 해변에 있을 때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파도 소리와 모래 언덕 사이를 걷다 보면 어떤 죽음이 연상되기도 했다. 노인에게는 꽃비가 내리고 목련이 등불로 피어나는 봄날 안개가 흐르는 산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빨강 노랑 단풍들이 융단같이 깔린 가을을 한번 더 보고 싶을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이 빵을 씹고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계속했다.

“어제는 목욕탕에 갔더니 그동안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던 임기장이 내게 다가와 마지막으로 등을 밀어드리겠다고 합디다. 내가 사양해도 굳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등을 맡겼죠. 그런데 그렇게 정성 들여 등을 밀어줄 수 없어요. 겨드랑이까지 비누칠을 해서 정성스럽게 닦아주고요. 그 양반 같이 있어 보니까 칠십대 중반이라도 어린애 같이 순수하고 참 정이 많은 사람이예요.”

노인끼리 서로 깃을 부비며 온기를 나누는 모습같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따뜻한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을 밀어주는 건 밀도높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나의 상념은 까까머리에 검정 교복을 입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소년으로 건너갔다. 칠십대 중반이었던 할아버지와 마당의 수돗가에서 함께 목욕을 했었다. 할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기쁨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헤어지는 노의사가 이런말을 덧붙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중간경유지에서 한 두 시간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우연히 만난 통과 승객과 친해지는 수가 있어요. 실버타운에서 우리들의 만남이 그런 것 같아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밀도가 깊기도 하죠.”

몇 달의 만남이지만 그 노 의사는 참 따뜻한 정이 넘치는 이웃이었다.

오래전 저 세상으로 건너간 앞집 할머니가 문득 생각 속으로 쳐들어 왔다. 내 기억의 서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 고마움이 있다. 고등학교 삼학년때였다. 앞집 할머니는 고기 한 근을 싼 신문지를 우리집 대문 아래 슬쩍 밀어놓고 갔었다. 입시공부를 하는 내게 국을 끓여주라고 그렇게 놓고 간 것이다. 사람은 저세상으로 옮겨가도 사랑의 기억은 그걸 받은 사람의 마음에 보관되어 있는 것 같다. 뒷집 새댁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해방 후 시집왔을 때 앞집 꼬마였던 그 할머니의 아들을 찾아 약간의 돈을 전해주라고 유언을 했다. 부엌으로 놀러 오던 앞집 꼬마하고 정이 들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앞집 꼬마였던 칠십대 중반의 그 노인을 찾아 어머니의 선물을 전했다. 그 노인의 메마른 눈에서 하얀 눈물이 흘렀다. 따뜻한 이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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