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체험으로 성경해석

운영자 2020.06.29 10:11:33
조회 147 추천 1 댓글 0
이십대 중반 장교로 전방의 눈 덮인 철책선을 순찰하고 막사로 돌아와 앉았을 때였다. 책상 위에 작은 성경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믿음이 없을 때였다. 내가 앞에 있는 김중사 에게 물었다.

“기드온이란 종교단체에서 군부대에 공짜로 보내주는 거예요. 종이가 얇아서 담배를 말아 피기가 아주 좋아요.”

그 시절은 담배가루를 신문지 조각에 말아서 피기도 했었다. 나는 호기심에 성경을 몇 장 뒤적거려봤다. 그중 한 페이지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묘사되어 있었다.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뚝배기 같은 막 쓰는 그릇도 있었다. 큰 그릇도 있고 간장 종지도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것 같았다. 자기가 어떤 그릇으로 쓰이는지는 만든 사람 마음이라는 것 같았다. 그냥 자기가 타고난 그릇에 타고난 자기 몫을 채워 잘 살라는 말로 해석이 됐다. 그 무렵 나는 세상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하고 열등감에 젖어있기도 했다. 돈이나 권력가의 아들들은 병역을 면제받았다. 조선조 오백년도 양반집 아들은 군역을 치르지 않았다. 돈 없고 힘없는 집 아들만 군대에 끌려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자식 귀한 건 다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그 무렵은 가장 빽 없는 집 자식들이 전방의 철책선 부대로 가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세상의 경쟁에서도 밀려난 상태였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입대를 미루다가 마지막에 장기 법무 장교시험으로 보고 끌려 들어온 것이다. 군대를 가기 싫던 놈이 평생의 직업군인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남들은 다 잘되고 행복한데 나만 깊은 산속 골짜기의 바라크 막사에 귀양을 온 듯 했다. 친구들은 다 성공해서 행복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래? 하고 울분이 터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성경속의 한 페이지의 내용이 물같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와 내 온 영혼을 적시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원래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니었어. 진흙으로 빚은 뚝배기같이 막 쓰는 그릇이었지. 피라미가 상어가 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주제를 몰랐던 거야. 뚝배기 같이 막 쓰는 그릇이라면 거기에 순응하고 살아야겠지. 주인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 운명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순응해야겠지.’

성경의 한 페이지가 삶을 다시 보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었다. 세상의 도기 장이는 자기가 만든 그릇을 바꿀 수 없어도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평생 직업장교로 살 각오를 했던 나를 하나님은 나를 성경 속 요나같이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오게 했다. 오년 만에 군 복무를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그 무렵은 변호보다 판사실을 뻔질나게 찾아다니면서 부탁을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판사들은 거들먹거리면서 앞에서 방아깨비같이 굽실거리며 부탁하는 변호사들을 보고 즐기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룸살롱에서의 질탕한 접대도 있었고 돈거래도 있을 때였다. 하루는 내가 맡은 사건의 담당 판사를 찾아갔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그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누운 것 같은 자세에 발은 책상 위쪽에 놓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심한 모멸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변호사는 잡상인보다도 못한 대접이었다. 전관예우가 심할 때였다. 그날 밤 성경을 들추다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곳을 보게 됐다. 과부가 교만하고 질 나쁜 재판관이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과정이 적혀 있었다. 그 방법은 별 게 아니었다. 집요하게 찾아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성경 속의 나쁜 재판관은 자기 귀가 닳아질까 봐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항복을 하는 광경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건방진 판사를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두 번 세 번 네 번 찾아갔다. 계속 무시하고 빈정거리셔도 괜찮다고 했다. 마침내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 나의 사건을 좋은 방향으로 결정해 주었다.

군 시절 처음 만났던 성경을 오랫동안 읽어왔다. 여러 해설서도 읽어봤다. 가장 좋은 성경 주석은 인생의 체험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학식과 수양을 많이 쌓아도 성경의 근본 교리를 탐구해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학식이 아닌 체험의 책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추천 비추천

1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3044 노년에 혼자 행복해지는 방법 운영자 23.07.10 99 4
3043 기름집 벽의 윤동주 시(詩) 운영자 23.07.10 75 2
3042 사교육 전쟁은 왜 일어날까? 운영자 23.07.10 95 1
3041 품위 있는 노인들 운영자 23.07.10 75 2
3040 밤바다의 주인 잃은 신발 운영자 23.07.10 69 2
3039 소년 시절의 부끄러운 고백 운영자 23.07.10 80 2
3038 고시 출신 노무현이 좋은 세상 만들었나? 운영자 23.07.10 91 6
3037 노인들의 자기소개서 [1] 운영자 23.07.03 98 3
3036 저는 3류작가 입니다 운영자 23.07.03 70 1
3035 저승행 터미널 대합실 운영자 23.07.03 65 1
3034 지리산 수필가 운영자 23.07.03 74 1
3033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이야기 운영자 23.07.03 81 2
3032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운영자 23.07.03 83 1
3031 고시 공부를 왜 했나 운영자 23.07.03 104 3
3030 하던 일과 즐거운 일 운영자 23.06.26 81 2
3029 좋은 사람 구분법 운영자 23.06.26 124 2
3028 내 엄마였어서 사랑해 운영자 23.06.26 68 3
3027 지팡이와 막대기 운영자 23.06.26 74 2
3026 참회한 악마 운영자 23.06.26 67 2
3025 대통령이 찾아간 국수집 운영자 23.06.26 76 4
3024 삼성가의 손자 운영자 23.06.26 80 2
3023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들 운영자 23.06.26 81 2
3022 빨간쟈켓에 백구두를 신은 수행자 운영자 23.06.19 69 2
3021 글쟁이 여행가이드 서현완 운영자 23.06.19 66 2
3020 냄새 운영자 23.06.19 70 2
3019 닷사이 술잔을 부딪치며 운영자 23.06.19 68 2
3018 선한 이웃 운영자 23.06.19 68 1
3017 진짜 군사 반란이었을까(2) 운영자 23.06.12 106 2
3016 전두환 심복의 고백(1) 운영자 23.06.12 108 2
3015 정치공작을 부인하는 그들 운영자 23.06.12 80 3
3014 마음이 넉넉한 사나이 운영자 23.06.12 68 1
3013 고문 운영자 23.06.12 69 1
3012 대학도 전문대도 다 떨어졌어요 운영자 23.06.12 92 1
3011 늙은 수사관의 고백 운영자 23.06.12 92 1
3010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운영자 23.06.05 94 1
3009 노인 왕따 운영자 23.06.05 79 0
3008 노랑 신문 운영자 23.06.05 66 1
3007 내가 몰랐던 그들의 시각 운영자 23.06.05 67 1
3006 어항 속 금붕어 같은 법조인 운영자 23.06.05 75 1
3005 남산 지하실의 철학 운영자 23.06.05 69 2
3004 북파 공작원의 얘기 운영자 23.05.29 97 3
3003 멀리서 찾아온 친구 운영자 23.05.29 71 1
3002 정보요원들의 따뜻한 내면 운영자 23.05.29 30 0
3001 먹는 물에 독이 들어간다면 운영자 23.05.29 79 1
3000 정보부의 탄생배경 운영자 23.05.29 83 1
2999 정보기관 변론에 앞서 운영자 23.05.29 22 0
2998 매 맞는 정보요원들 운영자 23.05.29 29 0
2997 권총 사격 운영자 23.05.22 88 1
2996 죽어야 할 사람들 운영자 23.05.22 96 2
2995 박쥐 사나이와의 대화 운영자 23.05.22 131 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