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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식장의 포도주

운영자 2020.09.14 10: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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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식장의 포도주

 

요즈음은 책 대신 과거에 써놓았던 일기를 들출 때가 있다. 무심히 2006년 12월 23일의 있었던 내용이 내 앞에 나타났다. 겨울의 붉은 해가 대학로에 있는 함춘회관 유리창을 물들이며 서쪽으로 기울고 있던 토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손소희 문학상’의 시상식장인 회관 오층에 있었다. 시상식장은 소박한 걸 너머 궁색해 보였다. 테이블보가 구겨져 있었고 그 위에는 물 한 병에 종이컵 정도만 준비되어 있었다. 백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인 식장의 메인 테이블에는 상금을 내놓은 김평우 변호사와 그의 형이 앉아 있었다. 김평우 변호사는 문학계의 원로 김동리 선생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소설가 손소희는 그의 계모였다. 식장에는 여러명의 소설가들이 보였다. 앞이 새의 부리 같은 뾰족한 모자를 쓴 김병총씨가 보였고 구효서씨가 보였다. 내 옆에 있던 계간문학을 발행하는 소설가 백시종씨가 나에게 속삭였다.

“제가 손소희 문학상을 만들려고 김동리선생의 둘째아들인 김평우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얘기를 했더니 채 삼분도 지나지 않아 손소희 문학상의 상금을 내겠다고 승낙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내놓지 않구요.”

돈을 그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서 쓰고 그것만이 죽을 때 저 세상으로 가져 갈 수 있는 선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김평우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말을 했다.

“죄송한 마음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손소희는 제 어머니인데 어려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섭섭하셨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아버지가 그 쓸쓸한 중년을 그리고 노년을 보내셨겠습니까? 어머니는 세상에서 오직 아버지 한 분만 모셨죠. 아버지가 상을 엎고 화를 버럭 내며 수모를 줘도 어머니는 그때마다 참고 인내하시면서 언제 그랬느냐 싶게 행동하셨죠. 나중에야 그런 어머니가 큰 분 인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디 가면 아버지가 김동리인걸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육십이 훌쩍 넘은 이제야 김동리의 둘째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닙니다.”

그의 짧은 말의 행간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아버님의 이름이 날수록 재능있는 소설가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버려 손해를 보신 거죠. 그래서 돌아가신지 이십년이 지난 오늘에야 상이 나온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보다 크신 분이 어머니셨죠. 그래서 제가 그늘에 가려졌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문학상의 상금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나와 친하던 김평우 변호사는 이따금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집에 흐르는 냉기를 얘기했었다. 계모를 위한 돈을 내놓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수상자인 오인문씨의 수상소감이 이어졌다.

“오십년의 문학 생활이었고 그 반인 이십 오년의 언론인 생활을 해 왔습니다. 언론인으로 있으면서 유신때 ‘대통령 자격고시’라는 글을 써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문학의 제단에 제 글을 올려놓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죽은 후에야 제 작품이 재조명되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의 수상소감에는 진정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이미 이름을 얻은 소설가 구효서씨가 일어섰다.

“저는 천구백팔십칠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최종심에 이순원씨와 둘이서 남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선이 된 후 문학사상에 취직을 해서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작가의 작업실을 갔는데 컴퓨터 자판이 손가락 때로 반들거리는 걸 보고 저도 글에 모든 걸 바치자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최종심에 올랐다가 떨어진 듯한 이순원이라는 작가가 앞으로 나섰다. 그날의 문학상 수상자였다. 조금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제가 머리가 짧으니까 탈북 작가인줄 알아요. 강릉 사람인데 대관령을 넘으면서 모나미 볼펜 두 자루 가지고 와서 글만 썼어요. 잠시 취직을 했던 적도 있지만요. 하여튼 앞으로도 글 쪽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괜찮은 진짜 작가 같았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낀 게 있다. 성공을 서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성공을 추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성공하려고 조바심을 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소걸음 같이 걸어온 것 같았다. 그게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그날 잔치에서 앞에 놓인 것은 종이컵에 담긴 물 한잔이었지만 나는 그게 푸짐한 정신적인 말씀의 떡을 대접받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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