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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장사

운영자 2020.09.28 09: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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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장사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건을 가지고 찾아오는 의뢰인이 없었다. 나는 무료하게 혼자 앉아 책상 위에 놓여 진 나의 명패를 보면서 변호사는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에게 물어보았다. 변호사란 시간을 파는 지식노동자였다. 죽치고 한 달을 기다려도 사건이 오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면 나는 사실상 실업자였다. 그런데 다른 장사들 보다 더 불리한 점이 있었다. 책 장사는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그대로 그 책이 남아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은 밤이 오면 그대로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제과점에서 팔다 남은 빵을 거리의 노숙자에게라도 주듯이 손가락 사이로 의미없이 흘러가는 변호사의 시간을 그냥 시간의 하수도 속으로 떠내려 보내기가 아까웠다. 공짜 일이라도 하겠다고 주위에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초라한 모습으로 중국에 살던 사십대 쯤의 중년 여성인 동포 한 사람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녀는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아직 반공의 기운이 짙던 그 시절 적성 국가인 중공에 살던 사람들은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다. 바늘구멍 정도의 틈은 있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판단하면 입국을 허가한다는 것이다. 나는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이 많은 미국이나 일본교포는 당연한 권리로 들어왔다. 가난하다고 중국에 살던 교포가 들어오는 걸 막는다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녀는 중국 국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한에 어떤 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헌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일 뿐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장은 법리적으로나 정의상으로는 내 말이 맞지만 방파제의 구멍을 넓게 하면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있다면서 내가 제기한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 이유는 전부 나의 주장을 인정하고 결론은 반대인 판결문이었다. 나는 그 내용들을 월간 시사잡지에 기고했다. 남쪽도 북쪽도 그렇다고 중국도 아니고 바다속 아니면 갈 곳이 없는 그녀의 사정을 호소했다. 방송이 그 사실을 받아주었다. 얼마 후 출입국 자격에 관한 규정을 만드는 실무자인 외무부 사무관이 나를 보자고 했다.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고정 관념을 가진 상관들이나 장차관이라는 벽을 뚫기가 불가능했었다고 했다. 그는 나보고 주요일간지나 시사잡지에 한 두번 더 그 문제가 제기되면 보수적인 상관들이 마지못해 움직일 게 틀림 없다고 귀뜸 해 주었다. 나는 평소에 친했던 조갑제 기자에게 부탁을 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얼마후 외무부의 규정 자체가 바뀌었다. 중국 동포들이 폭넓게 들어올 수 있는 성문 빗장이 풀린 것이다. 높은 담벽의 성은 사법부라는 동쪽문이 아니더라도 뚫고 들어갈 다른 문들이 있었다. 시간을 돈으로 바꾸지는 못 했지만 더 귀한 것을 댓가로 얻게 된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내게 시간을 주셨고 이 시간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본전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한해 한해를 보내면서 많은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시간을 소홀히 해서 장사꾼이 본전을 손해 본 것과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팔지 못하는 재고품의 시간들을 값을 받지 않고 계속 팔아보았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노숙자인 내 나이 또래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학대를 받았다. 술 취한 아버지는 여덟살인 그녀를 혁대로 갈기고 발가벗겨서 문 밖으로 쫓아냈었다. 커가면서 집에서 도망을 친 그녀가 사는 방법은 도둑질이었다.운명같이 감옥을 드나들면서 늙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해 지면서 그녀는 노숙자가 됐다. 빌딩 모퉁이에서 잠을 자다가 주먹으로 얻어맞고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법의 보호 밖에 있는 투명인간이었다. 여성 교도관도 그녀를 때린다고 했다. 그녀는 인간 사이에서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을 내서 감옥으로 찾아간 것 만으로도 마치 얼어붙은 강물에서 나와 따뜻한 담요를 얻어 쓴 소녀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무 것도 갚을 게 없는 그녀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고 철창 안에서 말했다.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그녀가 기도해 주겠다고 했다.변호사에게 주는 엄청나게 큰 보수였다. 시간 장사를 하면서 세월의 강을 건너다 보니 이제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다. 요즈음은 남은 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귀하게 쓸까 생각하고 있다. 시간은 잘 팔면 돈보다 훨씬 귀한 걸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무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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