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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의 글 쓰던 방(9)

운영자 2021.02.01 10: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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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의 글 쓰던 방(9)



크고 작은 갈색의 구릉들이 파도치듯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바늘같이 따가운 태양이 광야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쿰란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먹만한 잡석들이 흙에 섞여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붉은 색을 띤 거대한 산봉우리가 하얀 태양을 도전하듯 마주보고 있었다. 산 허리의 중간쯤 벼랑 위에 구멍 뚫린 듯 동굴들이 보였다. 성경의 사본이 오랫동안 진흙 항아리 속에 보존되어 온 동굴이라고 했다. 나는 유대광야에서 에세네파 사람들이 수도하던 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철저한 계율 속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던 단체라고 했다. 무너진 돌더미 속에 그들이 수도하던 작은 장방형의 방의 흔적이 보였다. 그 방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필사하던 방이었다고 했다. 같이 간 성서고고학자 고양주씨가 말했다.

“그 옛날 여기서 수도하던 사람들이 양피지에 성경을 쓸 때는 먼저 물에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을 하고 펜에 검은 잉크를 묻혔죠. 성경을 쓰다가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다시 가서 몸을 깨끗이 하고 그 단어를 썼습니다. 감히 하나님이란 단어를 쓰지 못하고 점 네 개로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온 정성을 다 쏟아부은 거죠.”

정결한 마음으로 무엇을 쓴다는 것은 기도행위인 것 같다. 신문사 정치부 기자를 하던 고교선배는 아들이 대학입시가 가까워 오자 금가루를 푼 물을 붓에 묻혀 불경을 한 자 한자 썼다고 했다. 아버지의 정성이고 기도인 것이다. 그 아들이 그렇게 해서 대학을 가고 로스쿨을 마치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강남의 성모병원 입구에는 유리박스 안의 원고지 위에 필사한 성경이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다. 글자 한 자 한자에 쓴 사람의 정성이 배어있는 것 같다. 노년에 경전을 필사하는 모습은 경건한 기도 같다는 생각이다. 꼭 경전 만이 아닌 것 같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집안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소설을 필사해 보라고 권한다고 수필집에서 쓰고 있다. 시인인 류시화의 수필을 보면 음악을 들으면서 좋은 문장들을 베껴 써 보는 행위를 ‘퀘렌시아’라고 표현했다. 영혼이 쉬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무렵이었다. 짝으로 옆에 앉은 친구가 아주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그 형제들이 모두 천재로 소문이 나 있는 집안인 것 같았다. 그 친구가 내게 공부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옆에 하얀 백지를 놓고 연필로 핵심단어를 쓰면서 그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훨씬 공부가 잘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렇게 쓰면서 하는 공부방법을 배웠다. 중학교 시절 한국문학 전집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이 나오면 수첩에 베껴 써 보기도 했다.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랬다. 법대에 입학해 법서를 보게 되면서 모든 걸 망치는 위기가 다가왔다. 딱딱하고 관념적인 법률문장을 그냥 통째로 외워서 그대로 답안지에 써야만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독일의 문장이 일본의 번역을 통해 들어온 법률교과서 안의 문장들은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언어와 글을 잃어버렸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한문체 말을 하면 서민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듯 법률가들이 쓰는 글과 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법률문장들이 글에 대한 처절한 고민 끝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속에는 한문과 일본어의 관습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부터 나는 잃어버린 글과 말을 되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수필과 소설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이 있으면 공책에 베껴 썼다. 성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 담겨있는 전류 같은 기운이 필사하는 손이 전선이 되어 내게 흘러들어오기를 기원했다. 그 신비로운 기운으로 나의 영혼이 정화되기를 희망했다. 나는 쿰란 지역의 광야의 옛터에서 자신의 혼을 깃들여 양피지 위에 한 자 한 자 성경을 써가는 수도사의 환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마지막에 어떤 것을 얻었을까.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보지는 않았을까. 어떤 작가는 평생 자신이 메운 오 만장 원고지의 그물코 같은 네모칸들이 그의 삶이었다고 했다. 인생이란 무엇을 하던 그렇게 자신의 그물코를 메우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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