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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고수

운영자 2021.04.05 1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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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고수




나는 서초동 언덕 위에 있는 소액심판 법정 문 앞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높은 톤의 싸우는 듯한 목소리가 홍수 때 터진 둑으로 쏟아져 나오는 물같이 흘러나왔다. 당사자끼리 싸우는 줄 알았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재판장이 흥분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소액심판은 작은 다툼을 처리하는 원님 재판 비슷한 법정이었다. 판결 이유도 쓰지 않고 재판장이 즉석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다혈질의 가난한 노인인 김목사를 돕기 위해 오랜만에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법정에 나왔다. 돈은 받지 않더라도 노년에 그래도 억울한 사람을 위해 한마디 해주는 변호사라는 직업은 좋은 것 같았다. 이제는 일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는 나이가 됐다. 이윽고 내가 재판을 받을 차례가 됐다. 김목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뒤늦게 법정에 들어서서 나와 나란히 피고석에 앉았다. 그와 잘 알던 기자가 김 목사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를 한 사건이었다. 재판장이 기록을 보면서 김목사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데 기자보고 ‘너 돈 먹고 기사 썼지?’하고 소리치셔서 명예훼손이 됐네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시면 안 되죠.”

다혈질인 김 목사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아는 기자들이 편파적인 기사를 쓴 걸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가 소송을 제기당한 것이다.

“뭐 하실 말씀 있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할 말 없습니다.”

그렇게 재판이 단 한 번에 간단하게 끝났다. 다혈질의 김목사는 여러 번 그런 재판에 회부 된 경우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입주민 대표가 관리사무소 행정을 장악하고 뒷돈을 받아먹는 비리를 눈치챘다. 그렇게 하면 못쓴다고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쳤다가 재판에 회부 되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철역에서 한 여성이 법 규정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고발을 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 여성은 늙은 남자가 자기를 불법촬영을 했다면서 성추행으로 오히려 고소를 했었다.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김 목사는 형사에게 불려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곤혹을 겪기도 했다. 그는 수시로 억울한 벌금형을 받고도 담담했다. 한번은 벌금을 내지 말고 몸으로 때워 보겠다고 하면서 징역을 살겠다고 신청했다. 그 얼마후 그는 감옥에 가서 하루에 십 만원씩으로 쳐서 사흘을 징역을 살고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토요일 날 오후에 들어갔는데 그냥 자라고 하더라구요. 일요일 날이 되니까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바둑이나 두자고 해서 하루종일 바둑만 뒀어요. 월요일에는 제대로 징역을 살아볼까 했더니 새벽 네 시가 되니까 가라고 내쫓더라구요.”

그는 보통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재판이 끝난 후 법원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그와 차를 나누면서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감옥 구경을 하고 싶었어요?”

“예수님도 사흘간 감옥에 있다가 십자가에 매달리셨어요.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성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부터 다른 제자들도 모두 감옥 경험을 했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런 고난의 불 속을 통과해야 해요. 그래야 불을 통과한 도자기 같이 단단해지고 색이 짙어지는 겁니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여러 번 단식을 해 봤어요. 열흘쯤 굶으면 뇌에 영양분이 공급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몸이 전혀 아프지 않은 거예요. 이미 칠 십대가 넘었는데 어느 날 조용한 곳에 가서 음식을 끊으면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겠더라구요. 왜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외진 곳에 가서 굶는다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이 되면 다른 포식자가 와서 살을 뜯어 먹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요. 인간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그 방법을 통해 천국으로 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참고하세요.”

아무런 야망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언제 죽어도 좋다는 사람이 싸움의 최고 고수다. 상대방이 김목사를 잘 못 건드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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