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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밥상

운영자 2022.02.21 1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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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밥상




대망이라는 일본의 대하소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한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전쟁 중 장군의 밥상이었다. 팥밥 한 그릇에 생선 한 토막을 말 위에서 먹어 치웠다.

몇 년 전 가고시마 근처의 박물관에 전시된 명치 시대의 표준식단을 봤다. 옻 칠을 한 사각의 식판 위에 네 개의 공기가 놓여 있었다. 밥과 국 그리고 작은 양의 두 가지 반찬이었다. 그걸 천황부터 백성까지 똑같이 먹는 식단으로 정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일본인들 삶의 소박함이 잔잔한 감동이 되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백살이 넘은 김형석 교수의 아침밥상이 소개되는 걸 봤다. 하얀 접시 위에 소량의 생야채와 삶은 계란이 놓여 있었다. 비슷하게 오래 살았던 수필가 피천득씨의 인터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한 세기를 살았어. 인간이 사는 데 먹는 게 중요한 데 막상 살아보니까 평생 먹은 양이 얼마 안 돼. 작은 돈을 가지고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런데 왜 들 아귀다툼하고 사는지 몰라. 나는 먹는 양이 아주 작아. 소식(小食)을 하니까 이렇게 오래 사나 봐.”

조선 시대의 퇴계 선생은 평생 반찬으로 가지무침과 무말랭이 그 외 나물 한 가지를 놓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손님이 오면 간고등어를 추가했다고 한다. 선비같은 사람들만 음식을 절제한 건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의 명문가를 추적한 적이 있다. 조선말부터 부자이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으로 최초로 재벌 소리를 들은 경성방직의 김연수 회장의 집안을 살핀적이 있다. 김연수 회장은 식구들의 밥상에 반찬이 세 가지 이상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못하도록 했다. 그 손주며느리였던 금융그룹의 회장 부인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자집에 시집을 왔는데 배가 고팠었다고 했다.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지키느라고 밥과 반찬을 조금씩 하다 보니까 막상 며느리가 먹을 게 없더라고 했다. 광을 열어보면 육포가 가득 쌓였는데 배가 고프니까 더 화가 났었다고 했다.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집안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점심 무렵 그 재벌가의 종손이 되는 분의 연구실에 들린 적이 있다.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다. 사업보다는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한 분이었다. 그의 탁자에 깔린 신문지 위에는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배달한 콩국수가 놓여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 오는 사람들에게 칼국수 한 그릇을 대접했었다. 청와대에서 오랫동안 주방장으로 일했던 사람은 주말이면 노무현 대통령은 영부인과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소박한 음식을 대하는 걸 할아버지한테서 배웠다. 할아버지는 강원도 깊은 시골 마을을 다니는 보따리 장사였다. 할아버지의 복장은 평생 한 가지였다. 빡빡깍은 머리에 광목으로 만든 한복 바지와 저고리에 회색의 조끼 차림이었다. 이불보만한 흰 광목 보자기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칠십년대초 죽음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는 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쁜 음식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는 새벽 장사 길에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났었다. 할아버지가 시골 장터의 좌판 앞으로 간 적이 있었다. 거친 판대기 위에 놓인 찌그러진 냄비에는 퉁퉁 불은 밀가루국수가 수북이 담겨있었고 그 위에 파를 썰어 넣은 민간장이 한숟가락 정도 뿌려져 있었다. 나는 볼만이 가득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중국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을 사달라고 떼를 썼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에게 배에 차고 있는 전대를 만지게 하면서 가르쳤다. 음식은 배만 적당히 채우면 된다고 . 혓바닥을 지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음식은 다 똑같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전대 안에는 지폐뭉치들이 가득했었다.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내게 말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어도 주머니는 텅텅 비었을 거라고. 그런 껍데기 인생은 되지 말라고 했다. 함경도 출신 할아버지에게 나는 철저히 세뇌된 것 같았다. 변호사를 하면 고급음식점에서 접대할 때가 많았다. 더러 좋은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음식은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시장의 좌판에서 파는 순대와 김밥이 훨씬 식성에 맞았다. 지하철역 코너에서 파는 오뎅 꼬치와 떡볶이를 좋아했다. 오늘 아침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아침은 잡곡밥에 시래기와 방풍나물 두부조림이 반찬이었다. 소박한 밥상은 겸허한 인격과 통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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