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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석달 남았다면

운영자 2022.08.15 09:49:19
조회 158 추천 1 댓글 0

얼마 전 암에 걸린 친구가 있다. 항암 주사를 맞고 심한 부작용과 염증으로 심한 고통 속에 있다. 그가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것 같다. 자기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어떤 만남도 거절하고 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주변을 보면 이제 그런 초대장을 받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사십대 중반쯤이었다. 사무실 앞에 있는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있었다. 씨티 촬영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의사가 갑자기 “암이네”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이 화살촉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설마요 그럴 리가”​

검사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갔다. ​

“아닙니다. 암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오진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의사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최고명문 의과대학을 나온 실력있는 의사였다. 그 얼마 전에 폐암에 걸린 사촌형의 엑스레이를 받아 전했었다. 그 의사는 죽음의 날까지 정확히 예고했었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주변이 온통 짙은 회색으로 변한 것 같아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 드러누웠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바닥이 없는 절벽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키워야 할 자식들이 있고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 행복은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매일을 개미같이 일만하며 재미없게 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죽어서는 안됐다. 의사가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울대 병원의 교수를 하는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 역시 암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면서 수술로 몸을 열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내 인생이 마치 나선형 계단을 딛고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이빨 빠진 계단의 허공을 밟고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겁쟁이인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어 있었다. 절망해서 이틀을 방에 쳐 박혀 있다보니 허리가 뒤틀리고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인생의 현실적인 목적이 없어진 나는 할 게 없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마음으로는 가족과 식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도 만나기 싫었다. 관성 대로 움직이듯이 평소에 하던 일들을 계속 하기로 했다. 변호사니까 구치소에 가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은 조폭 두목을 만났다. 가련해 보이던 그의 신세가 나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감옥 안이지만 그는 삶이 있으니까. 길을 가다가 높은 빌딩들을 보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몸속에서 자라나는 작은 독버섯이 있으면 의미가 없을 거라는 실감이 들었다. 퇴계로 거리를 지나가다가 벽에 붙어 있는 이런 글을 봤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축복입니다.’​

평소 같으면 비웃었을 것 같은 글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이 맞는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비참해도 존재한다는 건 축복인 것 같았다. 수술날짜가 잡혔다. 여섯 시간의 긴 수술을 했다. 뱃속을 지나는 동맥과 정맥을 잘라내고 쓸개를 적출 했다. 쓸개를 절개해서 암세포를 확인해 본 의사가 내게 말했다.​

“암이 아니라 커다란 폴립 덩어리였어요.”​

나는 억울하게 간을 잃어버린 동화속의 토끼같은 신세가 됐다. ‘쓸개 빠진 놈’이 되고 말았다. 불쌍한 내 쓸개. 억울하게 오장육부에서 퇴출당한 셈이었다. 산다는 게 뭔지를 느낀 한판의 임종 연습이었다. 회복이 되고 다시 활동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시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연을 자가 사람들에게 유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연자는 앞으로 남은 시간이 삼개월이라고 하면 그동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남은 시간 동안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같이 바닷가도 가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얘기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겁쟁이인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바다를 본 게 언제지? 별을 본 건 언제더라하는 생각은 했었다. 여행을 하고 사랑을 하고 매듭을 진 사람들과 화해하고 싶었다. 죽음이 닥쳐왔을 때 하고 싶은 일을 바로 못할 이유가 없었다. 수술 후 나는 여행을 하고 바다를 보고 별을 보고 하고 싶은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으로 놀러 온 대학 후배에게 물었다. 중견 언론인 출신인 그는 마음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죽음이 세 달 앞으로 다가 왔다면 뭘 할래?”​

“내 경우는 하던 명상을 끝까지 할 거예요. 그리고 작은 사랑의 씨를 하나 심어두고 가고 싶네요. 예를 들면 보육원에 가서 한 아이에게 교육비를 남겨주고 가던지 그런 종류 말이죠. 그렇게 사랑을 심어놓고 담담하게 가는 게 억울하다고 저항하면서 저승사자에게 뒷머리채 잡혀 끌려 가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세상이 무너져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 같이 죽기 전에 사랑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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