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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적 초월

운영자 2022.08.29 10:10:59
조회 134 추천 1 댓글 0

마음 깊이 박힌 두 개의 드라마 장면이 있다.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두 편의 드라마였다. 그중 하나의 마지막은 붓을 들고 동의보감을 쓰다가 서안 위에 엎드려 조용히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제작된 드라마에서는 최후의 장면이 환자를 돌보다가 그 옆에서 죽어 굳어있는 허준의 마지막이었다. 손에는 침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보면서 정말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평소의 삶을 똑같이 영위해 가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에서 얼마 전에 한 할머니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 우연히 내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잘못눌러 그 할머니가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오게 됐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자 그 할머니는 “제게 남은 건 시간뿐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백지 같은 노년을 묘사한 말 같았다.​

걷기가 힘들어 밀차를 밀고 다니는 그 할머니를 이따금 실버타운 내의 피씨방에서 봤다. 그 할머니는 칸막이 안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포커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모니터 옆에 쓰러져 있는 걸 직원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그 할머니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실버타운의 아무도 없는 피씨방이었다. 모니터 안의 포커패들만 점멸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말년이 공허한 것 같다. 직장에서의 퇴직은 일과의 단절이고 사회에서의 퇴출일 수도 있다. 그 다음 단계의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은수저를 만들던 친척 형이 있었다. 첫 번째 인생을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다가 퇴직을 했다. 두 번째 인생에서 그는 은수저를 만드는 기술자가 됐다. 조그만 공구인 망치로 은을 두드려 물건을 제작하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 형에게 폐암이라는 저세상에서 보낸 초대장이 비교적 빨리 왔다. 어느날 그 형이 내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여기는 지방의 병원이라 다시 한번 서울의 실력 있는 의사에게 확인하고 싶어. 내가 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보낼 테니까 내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줘.”​

나는 그 사진을 받아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져다 보였다.그 의사는 네 달 정도 남은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나는 친척 형에게 정직하게 알려주었다. 그 형은 나머지 기간을 가족과 평소같이 담담하게 지내면서 주문받은 은수저를 만들다가 죽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달리 특별한 일이 있을까? 나도 사십대 중반 암선고를 받고 절망해서 며칠 드러누웠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은 하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 아들이 되는 박성남씨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열 두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하나님께 밀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대요.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벌어먹여 살리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나중에 한쪽 눈이 실명된 상태에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죠. 그러다 간경화증이 왔는데 저보고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하면서 운명하셨죠.”​

마지막까지 평소의 자기 일을 하는 삶들이 많다. 도쿄올림픽 성화봉송주자인 하코이시 시쓰이 할머니는 백 네살인데 현역 이발사였다. 그녀는 실수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가위를 들고 싶다고 했다. 손님과 즐겁게 대화하는 게 건강의 비결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몰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아담스미스 연구로 유명한 백 두살의 일본인 미즈다 히로시 씨는 나고야대학의 명예교수였다. 그는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문의 깊이를 더 파고들고 싶어요. 저에게 연구는 삶이죠. 최후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

노년의 인생은 나이가 주는 장점이 있다. 노년은 물질적 풍요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고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 건강한 노인들을 보면 늙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면의 충실을 꾀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그걸 ‘노년적 초월’이라고 부른다던가. 나는 매일 글을 쓰면서 변호사의 일도 형태를 바꾸어 간간이 하고 있다. 어제는 제자격인 젊은 변호사가 피고인 신문 사항과 변론문을 검토해 달라고 카톡으로 보내왔다. 내일은 서울로 올라가 법정의 방청석에서 젊은 변호사의 변론을 연출해 주고 돌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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