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어리석은 판사 고마운 판사

운영자 2023.09.11 11:24:17
조회 109 추천 1 댓글 0


요즈음 ‘동네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주변의 소소한 일들을 맡아 직접 처리한다. 사무실도 없다. 직원도 없다. 칠십 노인이 직접 모든 일을 한다. 그는 법원장이었다. 대형 로펌의 대표도 했었다. 그가 ‘동네 변호사’가 된 건 노년의 겸손과 봉사의 모습이었다. 서울에 올라간 길에 그를 만났더니 대뜸 이런 하소연을 했다. ​

“어쩌다 법정에 나가 봤더니 젊은 판사의 태도가 가관인거야. 사람들에게 온통 호통을 치고 변호사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천방지축인 거야. 내 경력을 대충 눈치챘을텐데 나한테도 그러더라구.”​

그도 임자를 만나 당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라는 목적을 성취하면 그런 식으로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걸 견뎌 내야 변호사가 둥글둥글해지고 익어간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알려지고 일찍 판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더러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버릇들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내면이 성숙하지 못해 하는 그런 행동을 딱 꼬집어 교만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나도 그런 성격을 가진 판사를 만나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 변론서의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법조사회에서 전해내려오는 판에 박은 문장들이 싫었다. 어려운 한자어에 정서도 생명력도 철학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를 봐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 언론인 생활을 한 선배가 한글로 된 판결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내게 해석을 부탁한 적도 있다. 논설위원을 지낸 그는 문장이라면 대가급이었다. 차라리 단편소설 같은 영어로 된 미국의 판결문을 읽으라면 사람들이 더 빨리 이해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드는 변론서만이라도 문장들을 나의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보통사람들이면 누구나 한편의 쉬운 에세이를 읽듯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글을 풀어서 썼다. 기존의 전형적인 법률문서의 문투를 깨어버렸다고 할까. 물론 법리를 거푸집으로 했다. 법의 핵심을 소설의 주제같이 너무 튀어나오게 하지 않고 사실 속에 녹였다. 주제를 너무 강조하면 철근이 흉칙하게 드러난 건축물 같기 때문이었다. ​

한 형사 법정에서였다. 변호사들을 괴롭히기로 소문난 판사가 재판장이었다. 그와 같은 방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나와 변호사가 된 사람이 분노하는 걸 봤다. 어제까지도 동료로 같이 점심을 먹곤 하던 사람이 법정에서 그렇게 모멸감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앉은 채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쓴 변론서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법률문서 맞습니까?”​

그가 이번에는 방청석을 향해 시선을 던지면서 소리쳤다.​

“이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긴 의뢰인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봐요.” ​

그 말에 나의 의뢰인이 겁먹은 얼굴에서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재판장이 그에게 말했다.​

“이 변론서를 보니까 말이요 당신이 직접 써도 되겠어. 이런 변론서라면 돈을 주고 변호사를 선임할 필요가 없을거요.” ​

그 사건의 결정권을 쥔 재판장의 말 한마디는 나의 밥줄을 끊어놓았다. 요즈음 말로 나는 폭 망했다.​

그런 종류의 판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북부법원에서 열린 어린아이 유괴범의 변론을 맡았었다. 시사 프로그램에도 그 내막이 방영되면서 그 범인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어차피 중형이 예상되는 사건이었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 변론서 안에 한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원고지 이백장 정도의 분량에 유괴범의 고달픈 삶과 범죄 현장에서의 긴장감이나 아이들과의 관계들을 밀도있게 묘사하려고 애썼다. 특히 마지막까지 칭얼거리는 일곱살짜리 여자아이 두명의 생명을 존중했던 유괴범의 내면을 강조했다. 재판장은 그 유괴범을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그에게 담당변호사에게 감사하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 재판장은 내게 정말 변론서를 잘 쓰셨다고 칭찬해 주었다. 판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반대편의 리얼한 진실을 알아야 바른 판단이 나온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의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법률문서만으로는 진실이 파악될 수 없다고 했다. 그 판사가 고마웠다. ​


세월이 흐르고 이년 전 초겨울 저녁 무렵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의 한 커피숍에서 나는 친구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창가에 낡은 점퍼를 입은 초라한 남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법정에서 나를 모욕하면서 밥줄을 끊어놓았던 판사였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해서 대법관이 됐었다. 나와 대화를 하던 친구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가 암에 걸려 외국에 가서 수술을 하기 위해 대기중이라고 했다. 그는 어두운 창밖의 허공에 뜬 달을 무심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예전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영원히 남보다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평생동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죽어지내는 사람도 없는 게 세상의 섭리다. 인간이란 어떤 자리에 있든 물처럼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그게 겸손이다. 그래도 약해 보이는 물 한 방울에 진리가 숨어있다. 한 방울 한방울 조용히 떨어지는 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으니까. 나는 바위같이 단단한 세상을 향해 매일 물방울 같은 글한편씩을 쓰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


추천 비추천

1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3137 학교폭력의 흉터치유법 운영자 23.10.16 75 1
3136 무기수와 권력가의 용서 운영자 23.10.16 77 1
3135 달팽이 인간의 마지막 도착지 운영자 23.10.16 67 1
3134 이 정도 쯤이야 운영자 23.10.09 117 1
3133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운영자 23.10.09 99 1
3132 그들이 남긴 향기 운영자 23.10.09 77 1
3131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운영자 23.10.09 110 2
3130 내가 있을 자리 운영자 23.10.09 84 1
3129 영원한 가치를 가진 화폐 [50] 운영자 23.10.04 6553 19
3128 지구별 나그네 운영자 23.10.04 116 3
3127 벗들과의 정담(情談) 운영자 23.10.04 106 2
3126 누워서 빈둥거리기 [1] 운영자 23.10.04 127 1
3125 그래 그럴 수 있어 운영자 23.10.04 80 1
3124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죠 운영자 23.10.04 108 1
3123 대통령들의 좋은 꿈 [1] 운영자 23.10.04 140 2
3122 노동은 행복인가? 운영자 23.10.04 107 1
3121 억울함에 대하여 [17] 운영자 23.09.25 3916 25
3120 한 끗 차이 운영자 23.09.25 141 4
3119 혼자 노는 능력 [1] 운영자 23.09.25 150 4
3118 청춘은 인생소설의 후반부를 모른다 운영자 23.09.25 150 3
3117 가난의 옹졸함 운영자 23.09.25 126 2
3116 노인들의 세 가지 공통된 후회 운영자 23.09.25 231 3
3115 그의 할아버지는 노비였다. 운영자 23.09.25 111 2
3114 천사를 만났다 운영자 23.09.19 106 3
3113 백합조개를 줏는 노인 운영자 23.09.19 81 2
3112 돈 잘 쓰는 법 운영자 23.09.19 111 2
3111 논다는 걸 잊어버린 사람들 운영자 23.09.19 87 2
3110 긴급할 때 내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운영자 23.09.19 129 4
3109 사백년전 선비가 보내온 메시지 운영자 23.09.19 84 2
3108 인생은 즐거워야 운영자 23.09.19 103 2
3107 삶을 사랑하는 노인들 운영자 23.09.19 108 2
3106 중간 정도의 삶 운영자 23.09.11 124 2
어리석은 판사 고마운 판사 운영자 23.09.11 109 1
3104 인생무대의 배역 [1] 운영자 23.09.11 111 2
3103 6급 공무원의 댓글 운영자 23.09.11 125 5
3102 맑은 사람, 흐린 사람 운영자 23.09.11 97 2
3101 함경도 보따리 장사꾼 운영자 23.09.11 75 2
3100 노년의 수행처 운영자 23.09.11 69 1
3099 명작 노년 만들기 운영자 23.09.04 80 2
3098 죽음 대합실의 속살 이야기 운영자 23.09.04 96 2
3097 어른들의 병정놀이 운영자 23.09.04 89 3
3096 나는 위선자다 운영자 23.09.04 81 2
3095 아름다운 인생 운영자 23.09.04 82 3
3094 노년의 마음 리모델링 운영자 23.09.04 73 2
3093 걷는 행복 운영자 23.08.28 99 2
3092 행복한 청소부 운영자 23.08.28 78 2
3091 진국 운영자 23.08.28 91 3
3090 안개와 함께 춤을 운영자 23.08.28 61 2
3089 한 승려의 떠나간 자리 운영자 23.08.28 89 2
3088 ‘이게 나다’ 운영자 23.08.28 75 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