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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갤문학] 내 삶은 언제나 너를 향하고 있었다 [1]

Medeo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1.23 22: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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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m622p

Medeok




[1] 조우


 피부를 꿰뚫는 듯 싸늘한 냉기와 겨울 특유의 건조한 공기가 연을 괴롭혔다. 연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얇은 이불을 걷어찼다. 겨울임에도 얇은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은 그의 결심이었다.-소설가는 자고로 춥고 배고파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추위에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덜덜 떨며 책상에 시선을 둔 그가 방금 막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머그컵을 발견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율무차를 마시며 건조한 목을 축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판단하건대 분명 오후였다. 연은 허기를 느끼며 추운 방을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난방 중이던 복도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덕분에 그의 기분이 아까보단 좋아졌다. 그가 얇은 옷을 입고 피곤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느릿느릿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빛이 새어나오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어떤 종이를 들고 있던 여동생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했다. 여동생이 쓰고 있는 부엌 식탁 위의 접시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뭐야? 요즘에도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말을 마친 직후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여동생이 그를 쳐다봤다.


 “증조할머니, 알지?”


 연의 질문은 무시하며 정이 되물었다. 연은 한참 생각하더니, 기억이 난 듯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증조할머니에 대해 떠올렸다. 노르웨이에 살며, 한국에는 정이 없는 듯 자주 오지 않던 분. 언뜻 할아버지의 방에서 본 기억이 있다. 친척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젊었을 적 그녀보다 예쁜 여자는 본 적 없었다고 하셨다. 예쁘다는 말보다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여자. 뒤에서라도 감히 함부로 외모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여자. 증조할머니에 대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었다.


 그런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면서 본 적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둘 만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형적으로도 그는 증조할머니에 대해 피로 이어진 혈통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노르웨이 유전자를 받지 못했는지 다른 한국인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혼혈보다는 한국인 쪽에 가까웠다. 다만 체격만큼은 남달랐다. 아마 체격은 노르웨이 유전자를 받은 게 맞을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굉장히 작으셨으니.


 연은 어느 새 자기 방에 앉아서 편지를 들고 있었다. 지금껏 연락 없던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내가 이걸 꼭 가야만 하나? 연은 자신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봄까진 시간이 비어있고, 예전부터 해외여행을 단기간 가보고 싶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증조할머니의 존재덕분에 노르웨이어를 배운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곧바로 노르웨이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연의 꿈은 작가였다. 이제 22살인 그는 여전히 작가를 꿈꾸고 있었다. 강원도 시골마을에 태어나 한 번도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는, 항상 남들과 다르기를 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언제나 남들과 달랐다. 생각의 방향이 남들과는 달랐다.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과 마찬가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꿈을 제쳐두고 그는 이과를 선택했다. 남들에게는 진정한 남자는 이과로 가야한다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실제 이유는 달랐다. 문과이면서 글 잘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과이면서 글까지 잘 쓰는 사람은 적다. 그것이 이유였다. 어디서든 남들과는 다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그는 그가 당초 계획한대로 나름대로 서울 내의 있는 공과대학의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애초에 기계공학과 맞지 않던 그는 얼마 후 결국 휴학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의 친구는 배부른 놈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고향 홍천에서 펜을 잡았을 때, 주위엔 고등학생인 여동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타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업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고향의 집에서 그의 빛나던 생각과 물렁하던 두뇌가 굳어가고 썩어가던 중 증조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노르웨이에 계시는. 그는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지만, 이후 계산에서 속으로 웃었다. 아, 이것으로 글을 써보자. 만약 입 밖에 내었다면 남이 듣고 그를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정도로 그 당시의 그는 굉장히 절박했다. 작가는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의 글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간 중간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다른 글에 대한 유혹이 솟았지만, 곧 머릿속에서 그럴 때 마다 지워버렸다.


 그는 인천공항에서 오후비행기를 타고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노르웨이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추운 나라였다. 그는 밤에 대충 숙소를 잡고 생에 첫 비행에 지친 몸의 피로를 풀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새벽에 눈을 떴다. 옆 침대의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그 순간 뭔가를 쓰고 싶었다. 아니, 진정으로 뭔가를 써야만 한다는 갑작스러운 갈망에 사로잡혔다. 다음 순간, 그는 가져 온 공책을 꺼내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가 약한 불을 켜고 연필로 글을 쓰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방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015년 1월 12일 노르웨이시간 새벽 3시 24분. (밤공기는 어디서든 차갑다.)


 이것은 분명 적기이다! 나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지금은 몽롱한 상태이며 내가 무슨 글을 쓰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나는 살면서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이야기를 기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쓸 내용은 아마 일기의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문법이 얼마나 틀리고 문장이 얼마나 더럽고 문단이 얼마나 유기적이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는 지금 이 순간 격정적으로 뭔가를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리고 내 오래된 생각 역시 같이 정리하려 한다.


 앞서 말했던 적기는 바로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대한 적기가 아니다. 그것은 글을 쓰기위한 적기이다. 나는 언제나 머릿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글은 언제나 내 역량보다 더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온전한 이야기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 자신이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통이 극심하다. 펜을 들고있기 힘들다. 오른손으로는 펜을 잡고 왼손으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지탱중이다. 우선, 내 생각에 대한 정리를 해야겠다. 비록 일기지만,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과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섞여 중간에서 말이 헛나가고 방향이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튀어나간다. 이 일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아마도 나는 이 일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전제로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충돌해 이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지라도 그 전부터 나 자신에게 하고 싶던 이야기, 혹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내 무의식이 나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게 하거나, 아예 떠올리지 않도록 할지도 모른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문장과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초등학생 수준의 일기로 변질되었다.


 아주 먼 오래 전부터 난 내 개인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절실했다. 이 또한 내가 너무 게을러 오랜 시간 생각의 저편으로 미루어놓고 있었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란 말이 있다. 보편적인 말과 많이 인용되는 말을 싫어하지만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난 비록 2015년인 올해 겨우 22세지만, 돌이켜 봤을 때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일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 까닭은 내 평생 혼자 힘으로 원대한 무언가를 쟁취 한 적이 없어서 그러리라.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이정도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은 지금까지도 다른 누구에게 털어놓아 본 적 없다. 기록되어지지 않은 생각은 무의미한 생각이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생각은 대개 곧 사라지고 마는 생각이다. 언제나 자신의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지 기록되어야 한다. 실로 늦은 깨달음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 일부러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이다. 내 인생은 왜 후회스러운가?


 나는 운이나 도움 없이 오로지 나의 힘과 의지로 정신적으로 높은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단 한순간도 어긋남 없이. 그래서 더더욱 난 내 지난 22년을 후회한다. 무척이나 나태했던 세월이다. 죽기 직전까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내 모든 인생 그 순간의 시점에 안주해 있었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우리 삶에 단 한순간도 안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을 나 스스로가 잘 깨닫고 있기에 더더욱 후회하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이 일기를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싶다. 비록 지금 심한 두통과 고등학생일적부터 시작된 점점 강해지는 허리통증을 겪는 중일지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생각을 내 의지로 바로 이 공책에 담겠다. 내 모든 생각을 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맨 정신일 때 천천히 해도 늦지 않는 것들이다. 다만 나는 내 생각에 대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밤공기가 차갑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몸살의 징후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졸음이 쏟아지나 몸이 아파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것은 분명 나의 운명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추운 내방에서 얇은 이불 속에서 마시는 따뜻한 율무차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율무차 생각이 강하게 난다. 한 번에 다 마시는 것이 아까워 마시고 싶을 때마다 냄새를 음미하고, 세 번 정도 그러했을 때 비로소 한입 홀짝였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해서 먹다보면 다 먹어갈 즈음엔 언제나 차가워져 있었다. 이것을 보면 율무차나 나나 다를 것이 없다. 처음엔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듯 타오르지만, 그 열기가 끝까지 가지 않는다. 최후엔 식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마시는 율무차는 최후에 식어 처음 마실 때보다 맛이 덜하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


 이제 시간은 한 시간 정도 흐른 것 같다. 손으로 글을 쓰는 게 오랜만인지라 중지손가락 끝부분 마디가 아프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겠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일과 생각을 담고 싶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야기로 샐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더라도 담아내고 싶은 뭔가가 오늘만큼은 존재한다.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일기인 만큼 일단 오늘의 이야기를 기록하려 한다. 사실 이미 자정을 지나 날짜가 지나갔기에 오늘은 아니지만, 오늘이라 기록하려 한다. 오늘은 다른 날과 같이 아무런 부담감도 가지지 않고 일어났다. 오히려 고등학생시절 해병대 캠프에 갔던 날 아침이 더 긴장됐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안도감과 함께 일어나고 싶진 않다. 항상 눈을 뜨면 확실한 위기감을 갖고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일어나길 희망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다만 장례식에 간다는 특수한 상황과는 달리 나는 들떠있었다. 선기네 집에 들러 평소와 다름없이 체스를 두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러나 이것이 나는 아쉽다. 입대를 하거나 전쟁지역을 가는 것도 아니지만, 조금 더 무거운 작별이라면 어땠을까 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그 전날까지도 캐리어를 싸두지 않았다. 그래서 여동생과 함께 간단히 짐을 싸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찰나에 머릿속에 ‘카메라’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장례식은 간단할 것이었다. 장례식을 찍을 것도 아니고,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기에 나는 장례식 외의 시간동안에는 노르웨이의 자연풍경을 찍을 요량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나는 빠른 발걸음과 이따금씩 짧게 뛰는 것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하늘은 회색이고 공기는 차가웠다. 나는 이 느낌과 홍천의 아침의 분위기를 가능한 한 잊지 않으려 빨리 걷는 와중에도 꽤 많은 것을 눈에 담고 기억에 각인시켰다. 내가 능력만 된다면 그때 당시의 풍경을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그려낼 자신이 있다. 카메라는 생각보다 작았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너무 추워 콧물이 흐르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와중에 난 거리에서 친구 두 명을 만났다. 한명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실내야구장 앞에서 봤고 다른 한명은 덕수네 삼겹살집 앞에서 봤다. 그 둘 모두 고향에 잠깐 놀러왔다고 했다. 머무르는 것은 나뿐이었다. 전날 점심을 친가와 소고기 갈비를 먹고 저녁으로는 가족과 한우를 먹은 것을 기억하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동생과 난 작별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이 난 어학원을 운영하시는 둘째삼촌과 집을 나왔다. 아버지께서 신혼여행 갈 때 쓰셨다는 것을 물려받은 나는 캐리어를 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캐리어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집 계단을 모두 내려가고 난 마지막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내 젊은 시절을 모두 저기서 보냈다. 오래 전 초등학생 때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넘어져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팬 것이 기억났다. 그때의 흉터는 아직 남아있다. 위험은 모든 순간 어느 방향으로든 올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둘째삼촌이 내 캐리어를 받아 자동차 트렁크에 넣으셨다. 겨울의 홍천은 시리도록 공허하고 소름끼치도록 눈부셨다. 홍천의 풍경은 사계 중 어느 순간이든 머릿속에 그려 낼 수 있었다. 고향의 거리엔 아침인 까닭인지 사람이 없었다. 우리 동네가 더더욱 시골처럼 보였다. 나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밖에 존재하는 홍천의 풍경을 눈으로 빨아들였다. 벌써부터 고향과 나는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 우린 가평휴게소에서 한번 섰다. 삼촌의 큰일이 이유였다. 나는 여유롭게 호두과자를 먹으며 삼촌을 기다렸다. 가는 동안 여유롭게 먹으려던 호두과자는 삼촌이 내 것까지 사 오신 탓에 먹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난 호두과자가 해산물보다 더 쉽게 질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난 호두과자가 아니라 바삭하게 구워진 땅콩과자가 먹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 서울의 풍경이 떠오른다. 겨울이라 그런지 풍성한 부산과는 다르게 어딘가 흉흉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은 회색 도시다하는 생각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내리는데 그제야 심장에서 작은 전류가 감지되었다.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났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서야 난 여동생에게 카톡이 아닌 전화를 걸었다. 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까보다 더 강하게 가슴이 찌릿했다. 갑작스레 큰 덩어리가 목에 걸린 느낌이었다. 표면상의 목적은 장례식, 실은 나 자신의 발전과 새로운 기회를 위해 떠나는데, 왜 나는 영영 떠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까? 통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의 목소리는 꽤 떨리고 있었다.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내 심장은 통화 당시 묵직하고 빠르게 뛰었다. 그 때의 내 감정은 슬픔이었을까. 이별이 아닌데도.


 캐리어를 맡기고 나는 다음 절차를 밟았다. 삼촌은 잘 다녀와 라는 말씀과 함께 다시 일하러 돌아가셨다. 나는 내 앞의 초등학생이 아끼는 단화를 밟아 조각조각 여러 감정에 나눠진 생각들을 짜증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만을 느끼게 해줘서 잠시나마 고마웠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여자들이 예뻐서 좋았다. 보안검사에서는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나빴다. 가뜩이나 못생긴 여자여서 화가 났었는데, 태도마저 짜증스러웠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더러웠다. 더럽다 이상의 단어를 써줄 가치조차 없다. 처음 하는 공항절차에 당황해 도움을 청하는데 인상을 팍 쓰고는 눈짓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그 직원의 얼굴은 몽롱한 지금에서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이라 당황하지만 안았어도 나는 머리채를 휘어잡아 패거나 꽤 큰 소리로 욕했을 것 같다. 내가 좀 더 조급하지만 않았어도 싸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본디 처음 보는 사람일수록 친절하게 대하고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난 이 직원이 왜 타인을 하루 종일 마주치는 공항에서 일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항 면세점엔 걸어 다니는 꽃들이라 불리는 스튜어디스들이 많았다. 예뻤으므로 내 마음은 누그러졌다. 면세점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쳐다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예쁜 금발의 서양 미녀를 보았다. 내 이상형이었기 때문에 내 시선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재빨리 얼굴을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빠르게 반복해서 그렸다. 그러나 고작 몇 시간 뒤인 지금은 그 미녀의 얼굴, 옷, 체형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의 미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내 본능이 일깨워 주는 것 같다.


 그 다음 나는 휴게실로 추정되는 장소에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동안 여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땐 이미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왜 내 마음이 요동치는가. 내 감성은 아직도 고등학생에 머물러있는가.


 시간이 되자 나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남기고 착석을 위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비행기와 건물을 연결하는 연결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내 몸은 꽤 긴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과는 다르게 신발을 벗고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좌석을 확인하는데 나는 꽤 어려움을 느꼈다. 좌석 찾는 법을 몰랐기에 그저 앞사람을 따라갔다. 다행히도 어떻게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출발이 지체되고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일어서도 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꽤 힘든 시간이었다.


 기체는 생각보다 꽤 많이 흔들렸다. 예전에 보았던 항공사고 관련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내 바로 앞줄 왼쪽 대각선에 앉은 여자 승객의 발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저렇게 아름다운 발은 정말 흔치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 취미로 소묘를 배워 관찰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나였다. 나는 그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얼굴도 예쁜 승객의 발을 계속 바라보며 이륙을 기다렸다. 아직도 갈색 구두를 신은 그 승객의 발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륙은 오래 지체되었다. 난 시간이 오래 경과됨에 따라 점점 더 불안함을 느꼈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내 비행기는 40분씩이나 지체되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옆 유리가 열린 것이었다. 저 멀리 주황색 불빛들로 빛나는 공항이 보였다. 저 광경이 꽤나 그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공항이긴 했지만. 난 양 대각선에 위치한 스튜어디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른쪽 대각선의 스튜어디스는 굉장히 예뻤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너무 기억에 잘 남아 지금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불안함에 잠겨있는 와중에 비행기는 안내방송과 함께 큰 소리의 엔진음으로 내 귀를 때리며 이륙했다.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난 한국에서 대체 무엇을 했어야 할까. 무엇을 남기고 왔기에 이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한가. 난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오래전에 봤던 시가 생각났다.




 창백한 푸른 별


칼 세이건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 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기체의 소음이 잦아들고 창문 밖으로 작게 빛나는 주황 점을 마지막으로 창밖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외딴 곳에 고립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서 가져온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문제가 있었다. 비행기 책상으로 추정되는 것을 내리는 방법을 몰라 그냥 들고 읽었다. 소설의 문장은 꽤 깔끔했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구절은 여러 번 다시 읽는 것으로 완전히 이해했다. 나는 기내식이 나오기 전 옆자리 부부에게 책상을 피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지만 중년 부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난 책상 펴는 법을 배웠지만 귀국할 땐 다시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 정신적 이상향과 완전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이 겪고 있는 고뇌와 생각은 내가 과거에 똑같이 겪었던 생각들이었기에 더더욱 즐겁게 읽었다. 마치 내가 학생일 때 일기를 썼다면 이렇게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유치하지도 않았으며 가볍지도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감성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오글거림과 감성의 마지노선은 과연 어디일까. 같은 문장일지언정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린 친구들에 의해 감성은 이미 오글거린다는 단어로 격하되었다. 나는 그런 가볍고 어린 생각들을 증오하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기내식이 도착했다.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산물이었다. 맛은 그저 그랬고, 이번에도 기내식을 먹는 법을 몰라 옆자리 중년 부부에게 또다시 물어봤다. 레드와인은 꽤나 맛없었다. 지난 번 아버지와 마셨던 것과는 굉장히 달라서 정말 저게 와인이라고 불리는 게 맞나 싶었다. 혀만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후 나온 아이스크림은 레드 와인으로 인한 혀의 통증을 가시게 하는 데 충분했다. 굉장히 달고 차가웠다. 문제는 바로 그 차가움이었다. 엄청난 배변욕을 느꼈지만 화장실에 가는 법을 몰라 참았다. 스튜어디스가 종이를 주었다. 대충 물어봐서 그것을 작성했다.


 그리고 난 노르웨이에 도착했음을 창밖에 비치는 불빛들로 알아차렸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나는 저 불빛이 그리웠다. 가슴이 찌릿했다.


 노르웨이 공항 통과는 순조로웠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인천공항에 비해 북적이지도 않았다. 통과 직원이 노르웨이어가 아니라 영어로 물어줘서 한결 쉽게 통과한 감이 있었다. 노르웨이어에는 사실 기초 노르웨이어를 제외하곤 자신이 없었다. 발음에 대한 검증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캐리어를 찾았다. 꽤 즐거운 과정이었다. 마치 어릴 적 아버지가 사주신 자석으로 된 낚시 장난감에서 물고기를 낚는 것 같았다. 짐을 잃어버린 것 같아 걱정하기도 했지만 결국 내 짐은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꽤 잘생긴 중년이었다. 노르웨이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겨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워낙에 춥게 살던 탓도 있겠지만. 나는 오는 법에 적혀있는 대로 일단 도착하자마자 중간지점의 숙소로 갔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 나는 그 택시기사와 악수를 나눴다. 그의 손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름을 묻진 못했다. 노르웨이인은 굉장히 친절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로 이것저것 대화한 기억은 나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는다. 산장처럼 생긴 숙소에 도착한 나는 실망했다. 2인실이었기 때문이다. 내부시설은 생각보다 좋았다. 북유럽 풍이 난다고 해야 하나. 다행히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남자는 먼저 잠이 들어있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냄새가 강한 빵과 따뜻한 우유였다. 따뜻한 우유를 양손에 들자마자 생각난 것은 우습게도 율무차였다. 그것을 먹고 곧바로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이 새벽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낯선 땅에서 낯선 공기를 마시며 낯선 달빛을 덮고 자는 기분은 묘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대한민국이 그리웠다. 노르웨이에서 분명 뭔가를 쟁취하고 돌아갈 것이다.


 지금 나는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같이 격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다. 단지 낯선 땅에서 잠을 잔다는 것에 흥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두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달빛을 보니 곧 아침이 온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나는 몇 초라도 더 빨리 잠에 들어야겠다.


 2014년 1월 12일 노르웨이 시간 새벽 6시 52분 

 (이렇게 오랫동안 연필을 잡고 있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손목이 아프고 내 의지와 달리 손가락이 떨리지만 굉장히 기분 좋은 떨림이다.)






 연이 그의 숙소에서 눈을 떴다. 모든 사물이 불확실하게 보였다. 이처럼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라식수술을 하기 전 안경을 끼지 않았을 때 뿐 이었는데. 그는 근 몇 년 중 가장 당황했다. 시야가 불확실하다. 추위가 온몸을 물어뜯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지워진 듯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의 황급히 침대로 달려왔다. 연은 그를 옆 침대 사람으로 판단했다.


 “눈이 와요!”


 연은 혼란스러웠다. 눈이 왜? 연이 몸을 일으켜 세워 전날 잠결에 봤을 때 보다 더 커진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을 때 그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사물이 불확실한 집 안과 달리 밖의 풍경은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거대한 흰 산, 모든 것을 날려버리려는 듯 거세게 부는 노르웨이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그에 반대하듯 꽃잎처럼 아름답게 흩날리는 눈덩이들과, 숙소 바로 앞부터 그가 살아생전 본 적 없을 정도의 크기의 거대한 흰 산까지 강이 생겨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은 강 위는 눈에 쌓여 예술가의 섬세하고도 힘 있는 손 같은 바람에 유동적으로 흐르며 불확실한 눈의 경계를 만들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난생 처음 보는 겨울의 아름다운 장관에 그의 정신은 아찔했다. 그러나 그의 깊고 진한 갈색 눈은 흔들리지 않고 그 풍경을 모두 빨아들이겠다는 의지로 확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에 산란되는 파란 빛과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의 하얀 빛 때문에 그는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찬란한 노르웨이의 낯선 아침햇살을 받으며 그가 눈을 떴다. 그는 향수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감각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꿈에서의 추위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 나타날 만큼 지독한 향수병. 그는 유년시절에 부모님과 살던 집을 떠올렸다. 꿈에서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산은……. 그가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꿈에서 그의 추억이 왜곡된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침햇살이 내부로 들어와 밝게 비추고 있었다. 짧은 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을 효율적으로 잤는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방문 입구 쪽에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영어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연이 인사를 받아주며 건너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지난밤 같은 방에서 잠을 잤던 남성이 현재 입구에 서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은 그의 존재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입구의 노르웨이 남자는 여전히 서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연이 먼저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누구 십니까?”


 노르웨이 남자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금발의 머리에 서양인다운 곧고 높은 코를 가지고 있었고 선이 굵은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연과 마찬가지로 운동을 한 듯 다부진 체격과 손등으로 보이는 굵고 푸른 핏줄이 눈에 띄었다. 그가 서 있는 자세는 그의 성격을 나타내주듯 단호했다. 그의 나이는 연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아보였다.


 “안녕하세요. 리안이라고 합니다. 저는 당신의 먼 친척입니다. 저는 당신과 만나 친척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 어젯밤 저는 당신을 기다렸지만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게 오셔서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노르웨이 남자는 연에게 다가오며 정중하게 악수를 건넸다. 앉아 있을 땐 몰랐지만 연이 일어나서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눈에 보이는 것만큼 키가 크지 않으며 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연은 악수를 하며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자신의 영어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적절한 이름은 곧 생각났다.


 “페리입니다.”


 ‘페리’ 그것은 연이 고등학생 때 사용하던 필명이었다. 오래 전 좋아했던 여자가 지어 준 별명이기도 했다. 그 이름을 말하면서 연은 여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페리. 우리는 점심을 먹고 어제 보셨을 근처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합니다.”


 페리는 기억을 더듬어 택시 안에서 언덕위에 작은 불빛들이 펼쳐진 것을 생각해냈다. 리안이 페리의 큰 여행가방-캐리어-을 발견하곤 말했다.


 “짐이 굉장히 많으시군요. 혹시 여행하러 가십니까?”


 리안이 가볍게 말을 걸었다. 페리는 이것이 농담인지 그를 질책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페리가 생각하기에 확실히 장례식에 여행용 가방은 어울리지 않았다. 페리는 리안에게 근처에 작은 가방을 살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리안은 역 근처에서 가방을 팔 곳이 분명 있을 거라고 말하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페리의 코에 연한 고기냄새가 스쳤다. 페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쭉 펴며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페리는 리안의 등을 바라보며 동시에 통나무로 된 복도도 바라보며 걸었다. 전날에는 너무 피곤해서 지나쳤던 것들이 많았다. 통나무의 색은 짙었고 숙소 내부의 주황색 조명과 잘 어울렸다. 따뜻한 분위기와 고요함 그리고 통나무의 결이 말해주는 노르웨이의 공기는 어딘지 페리에게 친숙했다. 둘은 전날 페리가 간단히 빵을 먹었던 장소로 도착했다. 나무를 잘라서 만든 탁자에 마찬가지로 나무를 잘라 만든 의자의 조합이 어울렸다. 리안이 먼저 자리에 앉고 그 뒤에 페리가 맞은편에 앉았다. 주황색의 나이테가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페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옅은 고기냄새와 함께 짙은 나무의 향기가 느껴졌다. 숙소 안의 많은 가구들은 노르웨이의 강건한 침엽수로 만들었을 것이다. 탁자의 한가운데에 놓인 촛대는 중앙이 높게 솟아있었고 양 옆으로 다시 갈래가 나뉘어 있어 삼지창을 연상하게 했다. 페리는 그것이 금이거나, 금을 도금한 것이라 추측했다. 페리가 전날 식사를 할 때와 달리 초에 불이 붙어있진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탁자에도 나이테가 살아있었다. 상아색에 수놓인 주황색의 나이테는 귀족과도 같은 우아함을 풍겼다. 


 “기차를 탄 뒤엔 얼마나 걸립니까?”


 페리가 여전히 실내를 감상하며 물었다.


 “반나절 정도가 걸립니다. 전날 많은 눈이 내려 얼마나 걸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리안이 페리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페리는 늘 그렇듯 타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리안의 눈썹은 검정색이었고 얼굴형에 걸맞게 짙었다. 마치 그의 생각을 대변하듯 의지를 담고 있었다. 눈 크기는 과하게 크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컸으며, 눈매는 날카로웠으나 날카로운 눈매 안에 정직함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눈매 때문에 그의 첫인상은 냉철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보면 볼수록 그가 따뜻한 사람임을 눈빛으로 알아챘다. 날카로운 눈매엔 배려, 정직과 공손함이 눈빛으로 녹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노르웨이의 바다를 담은 깊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노라니 고귀함과 위압감을 동시에 느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생물처럼 느껴졌다. 숙소의 직원이 그들 앞에 마른 호밀 빵을 따뜻하게 데운 버터와 함께 유리접시에 담아왔다. 몽롱한 상태에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직원이 리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직원의 눈동자는 리안처럼 깊은 에메랄드빛이 아니라 흔한 파란색이었다. 리안의 눈동자가 바다를 담은 노르웨이 귀족의 우아함이라면 직원의 눈동자는 평민의 푸른 낭만이었다. 리안이 직원에게 목례를 건네며 직원이 건네주는 하얀 도자기 잔에 들어있는 차를 받았다.


 “이 쪽도 역시 가문의 먼 친척입니다. 이 집은 우리 가문의 소유입니다.”


 직원이 페리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파울입니다.”


 깔끔한 갈색 정장바지에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흰 와이셔츠는 파울에게 어울렸다. 깔끔하다는 단어 그 자체가 어울리는 남성이었다.


 “아, 그럼 여긴 파울 씨의 집인가요?”


 리안이 가볍게 웃었다. 파울이 페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안과 마찬가지로 차를 건넸다. 페리는 파울이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페리가 생각했다. ‘가문의 먼 친척이고, 가문의 집이라니. 증조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떤 가문이기에 이렇게 부유한가?’ 페리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페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자 리안은 더 이상 페리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리안은 페리의 태도를 이해하는 듯 했다.


 순록 스테이크를 다 먹은 리안과 페리는 떠날 준비를 했다. 페리가 리안에게 물어 이곳에 짐을 두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만 들고 출발하는 것에 대해 제의하자 리안이 괜찮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페리는 돈과 카메라, 전날 썼던 공책만을 챙겼다. 페리와 리안이 파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페리는 귀국하거든 파울의 집이 그리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파울의 집 현관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오로라 사진이 걸린 액자를 떠올렸다.


 페리와 리안은 길을 따라 역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리안이 가방을 살 것이냐 물었지만 페리는 가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괜찮다고 대답했다. 걷는 도중 페리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돌아갈 때 까지 한국에 대한 생각을 끊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노르웨이에 있는 동안 한국에 대한 사고를 그만두고 오로지 현재 장소에 집중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 결심 이후 노르웨이는 페리에게 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기차에 올라탄 둘은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차의 진동이 기분 좋게 전달되었다. 노르웨이의 산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훗날 페리는 이 풍경에 대해 ‘격정적이고 감동적인 북유럽의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있는 초록의 빛나는 영광과 순백의 강인함을 지키고 있다.’고 표현했다. 기차는 멀리 있는 풍경을 감상하기에 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리안의 말대로 많은 눈이 내렸는지 땅에는 초록색보단 흰색이 많이 보였다. 둘 사이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리안이었다.


 “페리.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말을 굉장히 아끼는 분이시군요.”


 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멀리 새가 작은 점처럼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은 많고, 궁금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아침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리안이 상체를 페리 쪽으로 굽히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가문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동안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증조할머니와의 연락은 제 생에 있어서 아마 이것이 처음입니다.”


 리안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문이라…….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은 오래 전 작은 도시국가의 왕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가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살았으니까요. 그러나 왕족이었던 만큼 부는 남아있습니다. 파울 씨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 가문의 소유입니다. 순수 왕족혈통끼리는 해체 이후에도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가문 안에서도 순혈과 순혈이 아닌 핏줄로 계급이 나뉜 상태입니다. 저는 순혈 쪽입니다. 사실 요즘 순혈이란 게 존재할까 궁금합니다.”


 페리는 여전히 리안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증조할머니도 순혈이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가는 것을 보면. 저는 순혈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차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나누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낡고 썩어빠진 보수적인 것들은 없는 게 낫습니다.”


 리안의 단어선택이 감정적으로 바뀐 것에 페리가 놀랐다. 페리가 당황한 것을 알아 챈 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릴 때, 순혈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인연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 뿐입니다.”


 말을 마친 리안은 옛날 기억을 더듬듯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페리는 호기심과 흥분감을 느꼈다. 새롭고 참신한 이야기에 대한 흥분……. 페리는 그 즈음 자신의 글에 대한 굉장한 집착과 광기를 느꼈다. 글을 향한 갈망. 기차가 어느 정도 달리자 기차 여승무원이 그들에게 다가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건넸다. 둘은 만족스럽게 그것을 먹었다. 페리는 리안을 아침보다 더욱 친숙하게 느꼈다. 리안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와 점점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을 느꼈다. 페리는 이에 대해 간략하게 메모했다. ‘내가 타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릴 때 그 순간의 타인은 그 이전의 그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에게 참신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사귐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리안이 옛 생각을 마친 듯 페리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다른 공간에 살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먼 친척이라니 한편으론 놀랍습니다.”


 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페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한국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이야기, 한국에서는 군대가 의무라는 이야기, 자신의 증조할아버지는 키가 작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신 쪽의 유전자가 개입한 것 같다는 이야기,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리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며 페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페리는 입으로 말을 할 때 굉장히 지루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 리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에 있을 땐 항상 청중 중 누군가가 그의 말을 끊었기에 더더욱 고마웠다.


 “그래서, 당신은 새로운 경험과 사고의 환기를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군요?”


 리안이 물었다.


 “정확합니다. 저는 벌써부터 흥분해 있습니다.”


 페리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발언을 리안이 어떤 방식으로 판단할지 불안해하는 동시에 묘한 기대를 가졌다.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질책할까? 동의할까?


 “기회가 된다면, 당신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페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리안의 반응에 페리는 기분이 좋았다. 리안의 성격이 자신과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당신에게 우리 가문이 왕족일 때 사용했다는 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곳 근처에 위치해 있으니 아마 여유가 될 겁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말고는 가본 적 없습니다. 순혈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같이 간다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페리가 감사함을 얼굴에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둘의 이야기가 끝나자 해는 어느 새 저물고 있었다. 하늘은 동쪽에서부터 신비로운 검푸른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높은 겨울하늘에서 페리는 가슴이 뭉클 하는 것을 느꼈다. 진정으로 찾아 헤매던 것을 찾은 기분이었다. 리안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는 것 같았다. 페리는 오히려 경치를 오래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쓸쓸한 하늘이었다. 갈 곳 잃은 타오르는 불꽃들이 서쪽으로 밀려나며 그 자리를 어두운 긴 밤과 한여름의 반짝이는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별빛들이 잠식해갔다. 장엄한 산이 전설 속에 나오는 북유럽의 용과 같은 위엄을 흘리며 고고한 자태를 뿜었다. 기차 칸의 창문은 수십 년을 갈고 닦은 장인의 손에서 만든 우아한 공예품처럼 아름다운 유동적으로 바뀌는 모든 순간을 담아냈다. 아직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달은 자비를 베풀 듯 여전히 태양이 남긴 흔적을 품고 있었다.


 기차에서 졸고 있던 페리는 꿈을 꾸었다.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어린 리안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어린 리안은 친구와 놀고 있었다. 둘은 함께 거리를 뛰었다. 그러나 리안은 실수로 자기 발에 넘어져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본 리안의 부모님은 달려가서 친구를 폭행했다. 고급스러운 옷과 고급스러운 장신구를 찬 그들은 리안의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세련된 외형과 달리 천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리안은 울면서 그의 부모님을 말렸다. 이후 꿈에서 친구는 리안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페리가 자리에서 눈을 떴다. 리안은 팔짱을 낀 채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 페리가 꿈이기에 실제와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의 내용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에 페리는 훗날 그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페리는 예전부터 꿈에서 자기 글의 소재를 얻곤 했다. 소재에 대한 구상을 며칠, 몇 주 동안 하다보면 언제나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 생생하고도 긴 꿈을 꿔왔다. 페리가 졸린 눈을 반쯤 뜨고 밖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멈춰있었다. 눈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기차가 과도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리안이 눈을 떠서 상황을 물어봤다. 페리도 알 수 없었다. 기차 앞 칸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차 내부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타고 있던 칸에 승무원이 정신없이 뛰어 들어오며 다시 어딘가로 달려갔다. 리안이 승무원의 팔을 붙잡으며 단호하고 확실한 발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승무원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숨만 들이켰다. 리안이 다시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승무원이 크게 소리쳤다.


 “눈사태!”


 승무원이 리안의 손을 뿌리치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리안이 급히 일어나 열린 문으로 앞 칸을 보았다. 기차는 앞에서부터 꺾이며 아래 절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앞 칸의 열린 창문으로 기차 내부로 눈이 침범했다. 리안이 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승무원을 따라 갑시다. 어서요!”


 리안이 페리의 어깨를 잡아끌며 승무원이 향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 어딘가에 분명 안전한 장소가 있을 것이었다. 사람들이 뒤쪽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눈사태가 좀 전의 승무원과 사람들이 타고 있는 칸을 집어삼키며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둘은 동시에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사태가 그들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리안이 페리에게 달려들며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차가 있던 자리엔 눈사태의 굉음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페리가 눈을 떴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페리는 몸이 얼얼한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파묻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반사하는 빛 때문에 눈이 아팠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가져 온 카메라에 생각이 미쳤다. 카메라는 어디에 있을까. 휴대폰은 어디에 있을까.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눈에 휩쓸리는 와중에 주머니에서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는 막막하고 슬픈 감정을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민가가 보였다. 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늠 할 수 없었지만 당장 저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가 발을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몸으로 실행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리가 리안을 걱정했다. 괜히 노르웨이에 와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하고 생각하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노르웨이에 오지만 않았어도 리안에게도 아무 일 없었을 것이라고 페리는 생각했다. 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니 페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강한 슬픔이 그를 덮쳤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둘은 형제 같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페리는 슬픔에 먹혀 기계적으로 두 발을 떼고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육체의 피로는 점점 무감각해졌다.


 페리는 저 멀리 성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이 있는 마을이라니. 리안이 얼마 전 기차 안에서 말했던 순혈들이 거주중인 성임을 알아봤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태양의 위치와 그림자의 길이로 추측하건대 점심 즈음일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육체적 감각보다 슬픔이 그의 몸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더 컸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림자는 길어지고 하늘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입구에 도착한 페리는 그대로 쓰러졌다. 누군가가 페리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페리의 귀엔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페리의 마지막 기억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과 모든 인연들과의 단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틈도 없이 그 자리를 삶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이자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본능이 꿰차며 삶에 대한 의지를 매 순간 마지막처럼 사냥을 위해 떠나는 회색 늑대무리의 우두머리가 가진 굵게 박동하는 심장 동맥처럼 불태운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삶 전체에 책임을 전가하며 머릿속에서 삶에 대해 속삭이며 유혹한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책임이 있다.’ 심장은 다시 뛰고 우심실에서 출발한 피를 우리 몸의 기관에 전달하고 몸 끝까지 열기를 주고 끝내 식은 혈액이  우심방으로 돌아오며 긴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다시 뜨겁게 달아올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다. 우리는 그 옛날 유럽의 거대한 증기선처럼 타오르는 존재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심연의 정적이 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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