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대회에 참여하고 싶기도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을 써보고 싶기도 해서 참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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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탄 겨울의 여인은 저물어가는 노을빛 숲을 눈으로 살포시 덮어나갔다. 정령들의 여왕이자 마법의 숲의 수호자인 아란델의 상왕 엘사였다. 그녀는 게일과 함께 자연의 순환을 지난번처럼 올해도 직접적으로 이어나가고 있었다. 34년간 가을의 시간에 갇혀있던 숲은 2년이 지났어도 아직 겨울이 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하루종일 하늘을 날면서 숲에 눈을 뿌린 엘사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아 아렌델에 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엘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소담하지만 아름다운 얼음집을 노덜드라 부족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가 만들어 두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브루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엘사를 맞이하러 뛰어나왔다. 엘사는 그런 브루니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고선 게일이 전해준 안나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언니,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어? 마법의 숲은 어때? 여기 아란델은 요새 많이 바빠지고 있어. 점점 항구도 넓어지고 있고 위즐타운과 무역도 다시 재개하게 되었지. 크리스토프는 얼음 판매 배달 책임자 일로 왕궁보다는 스벤과 함께 북쪽 호수에서 지내는 일이 많아지고 있고... 아 올라프는 잘 지내고 있어. 요새들어 책을 더 많이 읽어서 그런지 놀라울 정도로 성숙해진 느낌이야. 최근에는 서던 제도와의 무역 협상에도 뛰어난 외교적 수완으로 이바지 했다니깐! 지금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걸? 아무튼 이렇게 혼자 왕궁에 남아있을 때엔 가끔, 아니 자주 언니 생각이 들어. 언니가 지금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언니도 겨울이 되었으니까 많이 바쁘겠지? 나중에 크리스마스 때 꼭 만나자! 참, 언니 친구들인 정령들은 잘 지내지? 걔내들은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생기 넘치더라. 아무튼 나중에 왕국에 방문할 때 게일, 브루니, 녹크 말고도 바위 거인들 중 하나도 한 번 데리고 와줬으면 해. 다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좋겠어."
-언니를 무지무지 사랑하는 안나가
엘사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렁거리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매번 편지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고였지만 이젠 엘사도 안나도 다 컸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자리니 이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 허나 이미 게일과 브루니는 여왕의 슬픔을 감지하고선 저마다의 방식으로 엘사를 위로했다. 장난기 많은 게일은 엘사의 머리카락을 살짝 간지럽혔고 브루니는 돌욕조 안에 담긴 엘사의 목욕물을 자신의 불꽃으로 덥혔다. 아 참고로 엘사의 욕조는 바위거인들이 대리석으로 조각해서 만들어준 것이고 물을 항상 녹크가 1급수로 준비해준다. 엘사는 목욕물이 다 되었다면서 옷깃을 잡아끄는 브루니를 가볍게 안아들고선 목욕할 준비를 하였다
.
마음씨 좋은 도마뱀이 덥힌 더운 물은 차가운 겨울의 여왕의 근심걱정을 차분히 녹여주었다. 욕조 안에서 엘사는 그간 쌓인 피로를 풀고 가벼운 사색에 잠겼다. 그러자 아까 읽었던 안나의 편지에 쓰인 구절이 다시금 머리속에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안 먹는다..."
엘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생각하였다. 확실히 정령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불이나 물이 나이를 먹고 늙어서 죽는 일 같은건 없으니까. 그리고 엘사 자신도 정령으로 각성한 뒤로는 매일하는 일에 몸은 지쳐도 왠지 나이는 조금도 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령들이 영원한 것일까? 비록 느리긴 하지만 자연은 끊이지 않는 변함의 세계라는 것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정령들도 언젠간 변하거나 사라지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의문들만 낳은 채 엘사는 목욕을 마치고 얼음비단으로 된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입고 침대에 앉은 엘사는 브루니랑 놀고 있는 게일을 바라보다가 문득 질문이 하나 생각났다.
"게일, 이리 가까이 와 봐."
게일은 휘파람 같은 즐거운 소리를 내면서 엘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선 무슨 일이냐며 여왕한테 물었다.
"너는 언제부터 이곳에, 아니 이 세상에 존재했니? 처음 존재했을 때가 기억나니?"
게일은 그 질문을 듣자 잠깐 당황했다는 듯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는 헛기침 같은 소리를 몇 번 낸 뒤 게일 특유의 노랫소리로 화답했다.
-아아 어린 여왕님. 바람의 줄기가 어디서, 언제로부터 흘러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머나먼 모래의 땅에서? 지나간 고요함의 시대로부터?
끝없는 바다의 저편에서? 맹렬한 고함의 시기로부터?
태초의 나무가 굳건히 서있는 산맥에서? 활발한 생명의 때로부터?
그렇지 않답니다 어린 여왕님. 저는 그렇게 어리지 않답니다.
저는 태초의 외로운 숨결이 평생 함께해줄 친구를 바라며 무의 평야를 부드럽게 어루만졌을 때,
그 숨결이 실어나른 미약한 먼지에서 태어났답니다.
허나 저를 낳은 숨결은 제가 나자마자 흩어져 사라졌죠.
먼지가 눈송이로
눈송이가 꽃잎으로
꽃잎이 풀잎으로
풀잎이 낙엽으로
그리고 낙엽은 다시 눈송이로
그렇게 저는 계속 무언가를 실어나르지만 홀로 여행합니다.
저는 평생 세상 곳곳을 외롭게 떠돌았고 이 숲에도 그저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영원한 인연을 바라며 태어난 존재지만 끝없는 고독에 시달린답니다
그저 찰나의 인연들로 영원한 고독을 버틴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왕님 역시 영원을 살아나가실 운명이랍니다.
장난기 넘치는 게일답지 않게 그 노래소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들렸다. 허나 엘사는 그 노래를 듣고선 아름다움이나 슬픔을 느끼기 전에 불안을 느꼈다. 마지막 구절 때문이었다. 영원이라니, 그것은 싫었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다.
엘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브루니를 불러 같은 질문을 물었다. 그러자 브루니는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집 안의 모닥불에다가 자신의 불꽃을 불어넣었다.
엘사가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브루니의 과거가 보여졌다. 거대한 파충류들과 무시무시한 새들이 돌아다니는 숲이었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 한 가운데 브루니가 몰래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브루니 뒤에는 다른 작은 도마뱀들이랑 큼직한 도마뱀이 있었다. 브루니의 어미 같았다.
"브루니 너... 가족이 있었니?"
브루니는 대답 없이 불꽃을 더 강하게 피워냈다. 그러자 장면이 전환했다. 브루니가 형제들과 함께 큼직한 벌레를 물고선 자랑스럽게 둥지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천진난만한 브루니의 모습을 보며 엘사는 웃음지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내 장면은 브루니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거대한 불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불길이 땅으로 떨어지자 장면은 암전되었고 그 뒤 보이는 장면들은 싸그리 불타버린 세상과 검게 타버린 둥지, 그리고 가족을 모두 잃은 채 방황하는 브루니였다. 엘사는 그 충격적인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혹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마음을 불태우며 홀로 돌아다니는 장면 속 브루니는 마음 속 불꽃이 등 위에서까지 피어난 것을 보았다. 얄궂게도 불길을 떨어뜨려 브루니의 행복을 앗아간 하늘은 아이러니하게도 브루니한테 불의 힘을 선사한 것이다. 살아있는 불길이 된 브루니의 모습이 나오고 난 뒤 모닥불이 꺼졌다.
브루니와 엘사는 꺼진 모닥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 뒤 엘사는 혼이 나간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홀로 얼음집을 나갔다. 그러고선 녹크를 불러냈다. 그러나 엘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녹크는 이미 여왕이 자신에게 무엇을 물어볼지 짐작했다. 그렇게 엘사를 태운 채 녹크는 어둠의 바다를 달려나갔다. 잔잔하지만 어두운 바다에는 별빛 하늘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친 상 아래에는 녹크의 생전 모습이 드러났다. 엘사는 바다가 보여주는 물, 녹크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수천마리의 야생마들이 장대하게 펼쳐진 얼음판 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 중 선두는 흑마의 모습을 한 녹크였다. 녹크는 무리를 이끌며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굶주린 무리를 위해 풀이 가득한 약속의 새 땅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벌써 몇시간의 행진 동안 얼음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녹크는 지친 무리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하고선 무리가 쉬는 동안 자신의 짝과 붙어있었다. 잠시나마나 리더로서의 책임감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보내는 시간. 녹크는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그렇게 녹크는 자신을 부르는 짝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잠깐의 선잠에서 깨어났다. 감각이 예민하던 짝은 불안한 느낌이 든다면서 다들 다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녹크는 아직 무리가 지쳐있다면서 더 쉬자고 말한 뒤 다시 잠에 들었다.
바다에 비친 과거의 모습을 슬쩍 본 녹크의 눈에서는 물방울이 흘러나와 흩어졌다.
흑마 녹크가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얼음판이 갈라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야생마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공포에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얼음의 다리가 녹아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녹크는 무리를 불러모아 다급하게 얼음판 위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이미 약해진 얼음판은 수천의 말발굽이 망치질을 시작하자 더 빠르고 무작위적으로 거세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야생마들이 하나 둘씩 부서진 얼음 밑의 바다로 빠져버렸다. 허나 이미 안전하게 대피할 시기를 놓친 녹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리를 이끌고 달리는 것 뿐이었다. 짝의 말을 듣고 더 일찍 나섰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후회하던 녹크는...
바로 옆에서 달리던 자신의 짝마저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눈 쌓인 얼음판에 미끄러지면서 달리는 것을 애써 멈춘 녹크가 뒤를 돌아보자 이미 다리는 모조리 무너졌고 무리는 사라져있었다. 절망한 녹크는 뒷걸음질 치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서. 그렇게 물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녹크는 물 속에서 물의 정령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만! 제발... 그만해..."
정령들의 과거를 들여다 본 엘사는 무너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령으로서의 삶이 이런거면, 사랑하는 소중한 이를 잃고 홀로 남아 영원히 의무만을 다 하는 삶이라면 살기 싫었다. 게일은 평생을 홀로 살았고 브루니는 가족을 잃었으며 녹크는 짝을 잃었다. 그러면 자신도 사랑하는 안나를 잃게되는 날이 온다는 얘기 아닌가.
영원.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선고다. 아니, 한번 죽고 나서 받는 선고다. 늘 장난기 넘치고 밝아보이던 게일은 영원한 죽음과도 같은 고독의 슬픔을 견디는 존재였다. 마음씨 좋은 브루니는 분노로 한 번 불타오른 존재였다. 침착하고 근엄한 녹크는 후회의 눈물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모두가 혼자인 정령들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도 언젠간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인가?
"13년 만에 만났고... 3년간 있었다가... 다시 헤어졌는데... 영원이라니..."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어째서 세상은 자신과 여동생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영원이라는 세월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다. 기나긴 고독 끝에 다시 만났고 의무에 의해 잠시 헤어지기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찰나의 재회를 대가로 세상은 평생의 고독이라는 짐을 지우려고 하고 있었다. 엘사는 수많은 감정들이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 긍정적인 감정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혹한 세상에 대한 분노, 안나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 이런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어 겪는 슬픔, 이런 운명을 짊어지고도 안일하게 생각해오던 자신에 대한 증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
어둠의 바다는 거칠어졌고 비쳐있던 별빛들은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푸르륵-
녹크는 눈물 흘리면서 좌절한 여왕한테 말했다. 아직 한 정령과는 만나서 얘기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정령들은 혼자가 아니라고.
"아...!"
땅의 정령인 바위거인들. 그렇다. 그들만은 정령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다수로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그들이라면 자신에게 답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엘사는 녹크의 고삐를 잡고 바다를 넘어 산으로 다급하게 달려나갔다. 바위거인들은 밤에 깨어있다는 점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산에 도착한 엘사는 바위거인들을 불렀다.
쿵- 쿵- 쿠웅-
거대한 산과도 같은 바위거인들은 엘사의 부름에 응해 다가오고선 예를 갖추었다. 고개숙인 바위거인들을 보면서 엘사는 울음을 참고 입을 열어 강하게 외쳤다. 첫번째 이유는 바위거인들의 어둡고 고지식한 귀에는 길고 큰 명령의 소리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고 두번째 이유는 당장 소리치지라도 않으면 슬픔 때문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다섯번째 정령이자 겨울의 정령, 자연과 인간을 잇는 다리의 한 쪽을 담당하는 존재이자 다리의 반대편인 아란델의 여왕 안나 아그나르스도티에의 언니, 그리고 그대들의 여왕인 나, 엘리사베트 아그나르스도티에 아프 아렌이 묻겠다! 그대들의 여왕은 홀로 존재하는 바람, 불, 그리고 물의 정령의 과거로부터 저주스러운 영원의 운명을 보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느낀 슬픔이 나를 잠식하기 전에 그대들에게 답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다! 영원을 외롭지 않게 보내는 방법, 아니 영원한 고독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아는 거인은 즉시 그 답을 말해라!"
엘사답지 않게 매우 형식적이고도 거센 명령의 소리였지만 이를 다 외치고도 거인들의 답이 없자 엘사는 끝내 눈물이 터져 절벽에 주저앉아 힘없이 울기 시작했다. 이제껏 담아온 모든 울분을 토해내는 듯한 서러운 여왕의 울음소리에 산과도 같은 바위거인들조차 숙연해졌다. 고요한 밤하늘을 겨울의 슬픈 울음이 메웠다.
-여왕이시여
굵고 낮게 울리는 울음이 대답하였다. 바위거인들 중 가장 거대하고 가장 오래된 거인이자 동시에 엘사가 사용하는 대리석 욕조를 깎아준 외눈의 거인이었다. 바위거인이 말하는 것을 처음 들어 놀란 엘사를 거인은 조심스레 자신의 손 위에 올리고서는 조곤조곤 얘기하기 시작했다.
"말... 할 수 있었어...요?"
-당연합니다. 단지 말을 아낄 뿐이죠. 그리고 소리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답니다. 단지 들을 자격이 있는 소리인지, 대답할 가치가 있는 말인지는 저희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과묵한 것이죠. 여왕님의 고민은 당연히 듣고 대답해드려야 하는 말이지만요.
엘사는 마치 산이 말하는 듯한 거인의 답변을 숨죽인 채 가만히 들었다.
-우리가 다른 정령들과 다르게 다수인 이유는... 우리 역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랍니다. 바람, 불, 물과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과 어리석음에 의해 잃었다는 것이죠.
그러고서 거인은 여왕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올려주고는 하나뿐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 땅 곳곳의 잊혀진 옛 신들이랍니다. 과거 이 추운 땅의 강인한 사람들이 바위를 깎아 형상을 만들고 섬기던 존재였죠. 허나 느린 저희는 생각이 변해가는 사람들을 따라잡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고 과거의 영광과 명성, 그리고 오만에 젖어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엘사는 조용히 거인이 읆는 말을 들었다.
-어리석고 고집세던 저희는 그 대가로 저희를 신으로서 섬기고 신으로 만들어주던 사랑하는 신도들의 믿음을 잃었고 스스로를 잊어 원래의 형상인 바위로 돌아왔습니다. 즉 저희 역시 바람, 불, 물처럼 소중한 이들을 잃어 다수지만 고독한 상태로 영원을 살아가는 운명의 존재들이죠.
그 말을 들은 엘사는 절망하였다.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땅의 정령들마저 답을 줄 수 없던 존재들이었으니. 맑던 밤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히기 시작했다.
-여왕님, 비통의 구름을 거두시지요. 아직 이 늙은이의 대답이 끝나지 않았답니다. 비록 바람, 불, 물, 땅은 고독한 영원에 갇혀있으나 단 한 존재로 넷 모두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답니다. 그리고 그 한 존재는 고독한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 존재는 무엇이죠?"
엘사가 힘없이 물었다.
-여왕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이미 여왕님의 질문 속에 있답니다.
엘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늙은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왕. 인연과 사랑으로 묶인 두 존재가 이루어내는 왕입니다.
늙은 거인이 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고선 해가 떠오르는 하늘 저편을 가리키며 엘사한테 말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순환 속에서 합쳐지는 하나랍니다. 그리고 순환으로 합쳐진 하나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저 밝아오는 해과 저무는 달은 떨어진 두 존재지만 그 둘은 하루라는 하나의 순환 내에서 합쳐져 있고 하늘, 별, 바다, 그리고 땅은 세계라는 존재 안에서 순환과 함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하나들을 전부 포용하여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는 거대한 순환이 있습니다. 바로 계절이라는 순환이죠.
그 말을 듣자 엘사의 눈물로 붉어졌던 눈이 다시금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질문에서 말씀하셨듯이 다리에는 두 끝이 있고 여왕님은 그중 한 끝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다리가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니죠. 계절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이곳에선 여름과 겨울, 또 어느 먼 곳에선 건기와 우기라는 이름으로 두 양극을 가졌지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죠. 여왕님과 작은 여왕님은 바로 그런 계절의 정령이랍니다.
바위 거인은 소복하게 쌓인 눈을 가리켰다.
-겨울의 정령인 여왕님과 여름의 정령인 작은 여왕님. 하나는 세상 밖에다 직접적이고 이성적인 냉기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속에다 간접적이고 감성적인 온기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두 존재는 같이 있든, 떨어져 있든 함께 있음으로서 계절이라는 아름다운 변화의 순환을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이 늙은이가 옛 신으로서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자연에 젖은 채 겸손하게 세월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얕은 진리랍니다.
그러고서 거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엘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금 희망으로 찬 여왕의 눈을 보면서 거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저희 네 정령들이 섬기는 왕이 바로 그 계절의 왕입니다. 바로 여왕님과 작은 여왕님이 이루고 있고, 이루어 왔고, 이루게 될 존재죠. 인간들의 왕은 모르겠지만 정령들이 섬기는 왕은 비범함을 타고 납니다. 그 비범함은 바로 둘로서 존재하여 고독의 운명을 끊는다는 것에 있죠. 기억 하십니까? 여왕님과 작은 여왕님께서는 한때 고독하였고 헤어졌고 서로를 잃을 뻔 했으나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그 운명을 끊으셨죠. 그 운명의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서 우리 모두 깨달았답니다. 어딘가에서 우리들의 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말이죠.
엘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허나 이번엔 분노, 슬픔, 후회, 증오, 그리고 혼란의 눈물이 아니었다. 행복, 기쁨, 추억, 희망, 그리고 안정의 감정이 고루 섞인 아름다운 눈물이었다.
-그러니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왕이시여. 여왕님과 작은 여왕님은 고독의 사슬을 끊고 인연과 사랑의 실을 엮어낸 왕이니까요. 영원한 고독의 운명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는 인연을 만들어낸 존재,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니까요. 극복 불가능한 줄 알았던 죽음과 운명마저 이미 한 번씩 극복하신 분들이니까요. 그러니 떠오르는 해를 보시며 슬픔을 거두시지요.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랍니다."
엘사는 나지막하고 행복하게 말했다.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에요. 기쁨의 눈물이에요."
-어이쿠 실수. 아직도 이 늙은이는 사람의 감정표현을 잘 모르는군요.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왕님께서 하시는 행동 중에 실례되는 일이란 것은 없답니다. 그나저나 이름이라...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지만, 제 옛 이름만은 여전히 또렷히 머리 속에서 들리는군요.
-이 늙은이의 옛 이름은... 오딘입니다.
외눈의 거인은 그렇게 말하고선 여왕은 녹크 곁에 내려놓아주었다. 눈구름은 사라졌고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엘사는 밝아진 표정으로 녹크를 타고선 얼음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게일과 브루니가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지만 밝다 못해 눈이 부시는 엘사의 모습을 보고선 걱정을 거두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엘사는 안나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나, 언니는 바쁘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단다. 마법의 숲은 여전히 아름답고 노덜드라 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지. 그나저나 부부가 떨어져있으면 쓰나. 조만간 방문해서 바쁜 크리스토프를 도와줘야겠네. 올라프가 점점 더 눈에 띄게 의젓해지고 똑똑해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좋네. 역시 우리 둘이 만든 존재답게 크면서 우리를 닮아가는구나. 아, 그리고 그거 아니 안나?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헤어진 것이 아니란다. 언니는 늘 너의 곁에 있고 너도 늘 나의 곁에 있어. 그리고 곧 너의 곁으로 직접 갈 거란다. 겨울의 일은 거의 다 끝나가니까 크리스마스 전에 깜짝방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꼭 소개시켜주고 싶은 정령이 있어. 네 말대로 게일, 브루니, 녹크 말고 바위 거인들 중 하나란다. 불안해하던 나한테 답을 알려준 지혜로운 오딘이라는 거인 할아버지야. 크리스마스 때 꼭 같이 갈게. 기대해도 좋아."
-안나를 영원히 사랑하는 언니, 엘사가
후우... 부족하고 길기만 한 글 읽어줘서 다들 고마움.
이번 글에선 4대 정령들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와 갓 정령이 된 여왕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써보고 싶었어. 그리고 떨어진 엘사와 안나가 헤어진 것이 아니라고 못 박고 싶어하는 생각도 넣어보고 싶었고. 근데 쓰면서 그게 잘 표현됬는지는 모르겠네. 쓰다보니 또 뇌절이 발동된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쓰인 정령들의 과거랑 엘사 안나의 정령성에 대한 해석은 모두 이 소설을 위한 뇌피셜이니 생각이 달라도 너무 뭐라 하지는 말아줘. 착한 프붕이들은 안 그럴거라고 이미 믿고 있지만.
그럼 이만. 늘 부족한 소설 잘 읽어줘서 고마워. 감성 벽갤 시간대니까 다들 읽어줬을거라고 믿어.
마지막으로...
정령 여왕 자매님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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