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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대회 참가작]순록이름짓기 2

안나병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19 19: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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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https://gall.dcinside.com/frozen/4258594







5편. 엄마아빠


하루 종일 온 세상이 어두운 흑야 기간이 지나고 백야 기간이 다가왔다. 여름이다. 사람들이 활발하게 생활반경을 넓히는 시기다. 이런 시기일수록 채빙 작업은 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 그만큼 작업량이 늘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얼음을 싣고 어른들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최근 작은 빙수가게에서 얼음을 배달하고 있다.


“뭐하고 있니, 그거 이리로 좀 옮겨줘.”

“앗, 네네! 금방 갈게요.”

잇차. 아직은 상당히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다른 얼음장수 아저씨들처럼 번쩍번쩍 들 수 있겠지. 최근 크리스토프는 키가 부쩍 자랐다. 스벤은 선반 위에 올려둔 사탕을 한번 찾아보라며 그를 놀렸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아.’

자기 몸통만한 얼음을 상체에 조금 기대 두 손으로 껴안듯 들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게 안 쪽으로 들어간다. 얼음이 갈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달콤한 사과잼, 딸기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얼음이라니, 역시 정말 멋져.’


“엄마! 전 딸기 맛으로 먹을래요!”

아버지 등에 업혀서, 어머니와 손을 잡고 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빙수 위 토핑 같았다. 쉴 새 없이 높은 톤으로 재잘대며 우는 소리는 못이기는 척 하며 아이의 손에 달콤한 얼음조각을 들려주는 부모의 함박 웃음이 된다. 아이의 입 주변과 옷깃에는 얼음과 잼이 잔뜩 묻었다.

“오늘 먹고, 내일 또 오자.”

“정말요? 오늘 아빠 구두 닦아 드릴게요!”

크리스토프는 행복한 미소로 가게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안에서 무채색 옷을 입고 부모 없이 서 있는 아이는 크리스토프 뿐이다.

“저 아이는 누구에요?”

“채빙 길드에 항상 보이던 앤데, 우리 가게에 얼음을 대주고 있어.”

“저렇게 어린 애가?”

“저래 봬도 일은 꽤 잘해.”

“쟤 부모님은 왜 애한테 저런 걸 시킨대.”

“쉬잇-쟤 고아야. 부모가 없어.”

“정말? 불쌍하다...”

구석에서 얼음 조각들을 치우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떨궜다. 소리 나지 않게 가게 문을 조용히 닫고 거리로 나왔다.


엄마. 아빠.

크리스토프는 스벤이 만들어준 행운 부적 요르겐 인형을 주물럭거리며 웅얼거렸다. 나도 있어, 그런 거. 나한테는 스벤이 있다고. 아빠는 아니지만...

스벤은 언제나 크리스토프의 결정과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편이 돼 줬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친절을 베풀던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웠지만 스벤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부모님의 온기’가 궁금했다.

‘빨리 스벤을 보고 싶다.’

크리스토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주셔야지.”

“그 정도면 많이 드린 거에요.”

빙수 가게 뒤에서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스벤의 친구 제이콥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처음 채빙 길드에 왔을 때, 스벤은 그에게 크리스토프를 신경 써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도 부탁하기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긴 했지만 맨입으로는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는 돈이 필요했다.

“저런 조그만 애가 불쌍하지도 않소? 쟤를 봐서라도 좀 더 쓰시오.”

“돈을 그 애한테 주긴 주는 거죠?”

“주인장, 그렇게 말하면 순록의 신한테 벌 받아.”

제이콥은 비아냥대는 말투로 빙수가게 여주인을 쏘아봤다. 그의 손에 얼마간의 지폐가 더 얹어질 때까지. 그는 어차피 이 돈을 크리스토프에게 줄 생각이 없다.






6편. 공격


아렌델과 위즐턴 국경에 위치한 샤프미(사미족 마을)는 넓게 퍼져 있었다. 스벤은 이곳 마을에서 한 무리의 순록을 관리했고, 크리스토프는 마을 주민들의 순록농장에서 잔심부름을 하거나 채빙꾼들을 따라나서 주변 일을 도왔다. 스벤은 크리스토프가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길 바랐지만 크리스토프는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원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크리스토프의 밝은 모습을 본 스벤은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근 낯선 복장을 하고 칼을 찬 사내들이 국경 근처 샤프미를 들쑤신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윗 쪽 마을 주민들 몇을 강제로 끌고 갔다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 뒤 돌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많이 다치거나 불구가 된 채였다고.


“위즐턴 놈들이 위쪽 마을을 공격했다네.”

“우리도 위험한 것 아닌가요?”

“곧 순록 방목지를 이동해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여기에 좋은 이끼들이 많으니까 함부로 옮길 수는 없어. 곧 극야기간이 다가와.”

뒤숭숭한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일해야 했다.

“크리스토프, 오늘도 힘내라. 너무 무리 하진 말고.”

“아저씨, 오늘은 몇 시 쯤 와요? 오늘은 얼음장수 아저씨들이 오지 말래요. 마을 안에만 있을 거에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 아마 오후 5시쯤 일거야.”

순록 무리를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스벤에게 힘껏 손을 흔든 뒤 크리스토프는 그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온 세상의 빛이 어둠을 비집고 얼굴을 드러내는 사이로 서서히 스벤과 순록들이 멀어져 갔다.


“오늘은 헛간 청소부터 해줘-.”

“네!”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스벤은 크리스토프를 마을에 데려다 주고, 순록 방목지로 향했다. 순록몰이를 했고 순록들의 건강체크를 했다. 수의사에게 보낼 녀석과 고기와 가죽을 얻을 녀석을 골라냈다. 강을 따라 순록을 이끌었고 그들이 이끼와 풀을 뜯을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마구를 잡아 오른쪽으로 당기면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왼쪽으로 당기면 왼쪽으로 움직였다. 길을 잃은 순록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여느 때와 똑같은 날이었다. 강 건너편에 있던 위즐턴 국경 수비대들이 갑자기 그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록농장에서 여물을 쑤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일이 끝나는 대로 도구를 정리해 마차에 실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늦은 오후가 다가오자 샤프미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두들 어두운 표정으로 서둘러 움직인다.

“어...아저씨, 아저씨??”

크리스토프는 헛간에서 급히 장비를 챙겨 나가려는 남자의 바지를 잡았다. 그 덕분에 그의 손에 한아름 들려 있던 갈퀴가 딸그랑, 하고 떨어진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에요? 다들 왜 저래요?”

“순록치기가 습격을 받았다는구나.”

남자는 상체를 숙여 저만치 굴러간 물건을 집어 들었다. 키가 작은 크리스토프는 그의 얼굴을 보려 노력했지만 남자는 금세 몸을 일으켰다.

“..망할 위즐튼 놈들.. 대체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는 곧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토프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상대가 없었다. 우선 맡은 대로 완성한 음식을 순록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스벤이 걱정됐다.

‘이곳 마을에서 일하는 순록치기들이 한 둘은 아니니까, 스벤은 괜찮을거야.’

그는 애써 위안하며 식기구를 모으기 시작했다. 잔여 음식물이 없도록 잘 씻고 물기를 닦아 포대자루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빨리 끝내고 밖에 나가봐야겠다.’


애타게 스벤을 기다리던 크리스토프는 마을 밖에서 순록 떼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 틈을 헤쳐 돌아오는 무리들을 찾아 얼굴을 아는 순록치기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돌아온 사람들 틈에 스벤이 있었지만, 아침에 보았던 건강하고 밝은 미소의 스벤은 아니었다.


“스벤, 스벤, 정신 차려봐요.”

“...”

피투성이인 채로 썰매에 실려온 그는 마을 사람들이 한참을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자기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저씨...”

크리스토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걸어가 썰매 앞에 주저 앉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사람의 팔에 피가 뚝뚝, 떨어진다. 떨리는 손을 뻗어 손가락을 겨우 잡아본다. 움찔.

“아저씨????”

스벤은 눈을 떠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작고 따뜻한 손.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도 그는 크리스토프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오래 일한 스벤이 이렇게 되다니...”

“그놈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노리고 있어.”

“위즐튼과 서던 제국 놈들 말이야.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위협하고 있다고.”

“저 아래 숲 지대에 있는 마을은 무사하대요?”

“지금은 몰라도 안심하긴 이르지. 지금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그 난리를 떨고 있잖아.”

“우리도 이동해야 해.”

“이 땅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연이 주신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늘 있었던 일을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크리스토프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다. 어른들은 크리스토프를 고아티(사미족의 전통가옥)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밖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는 스벤을 기다리며 쪼그려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온통 피 칠갑인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7편. 지켜야 해


스벤은 한 쪽 다리를 잃었다. 오른쪽 대퇴부 골절과 인대손상으로 더 이상 순록치기 일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했지만 예전의 그에 비해 급속도로 침울해졌다. 한동안 그를 보살피던 크리스토프는 스벤이 어느 정도 혼자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신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 챙겨주었던 음식과 스벤이 먹어야 할 약이 떨어져 가고 있다.


“아저씨,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얼음을 캔대요.”

“...”

“며칠 걸린다는데...그래도 다녀올게요.”

적지만 약값에 보탤 수는 있을 거에요. 크리스토프는 속으로 나머지 말을 이었다. 스벤은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채로 미동이 없다. 점점 약해져 가는 스벤을 지켜보는 크리스토프의 마음은 아려왔다.

‘이제 내가 스벤을 지켜야 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동안 스벤과 크리스토프가 일을 받아 했던 사미 마을은 폭풍 전야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삶의 터전을 옮길 준비를 했다. 불안한 상황 때문에 그동안 해 왔던 일을 못하는 대신 얼음채취 일은 이어갈 수 있었다. 채빙 장소는 현재 문제가 생긴 방향과 다른 북쪽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얼음장수들이 조각낸 작은 얼음상품들을 들어 나르고 작업복을 세탁하는 것이 크리스토프의 주된 업무였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꽤 쓸모가 많은 크리스토프는 얼음장수들 사이에서 평이 나쁘지 않았다. 악착같이 일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런 크리스토프가 아망을 떤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열심히 부려먹었다. 다른 소소한 일보다는 아이의 벌이 치고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 진행되는 작업이라 평소보다 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스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얼음장수들이 돌아가며 머무는 숙소는 얇은 판자로 이루어진 롯지였다. 바람이 불면 지나는 소리가 그대로 귀에 들릴 정도로 상당히 허술하게 지어진 간이 숙박소. 간신히 세 사람 정도는 몸을 뉘일 수 있다. 그나마 한 개 있는 나무 침대는 삐걱거리고, 언제 빨았는지 모를 모포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썩은 치즈 냄새와 진한 알콜 냄새, 먹다 남은 음식물들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크리스토프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서 쪽잠을 잤다.


크리스토프는 얼음을 입에 물었다. 차갑고 딱딱한 조각은 체온으로 서서히 녹아 부드러워진다. 아침까지 기다리면 식사를 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배가 고플 때 얼음 작업 중 남은 조각을 입에 넣고 눈을 감으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다. 거짓말처럼 허기가 사라진다.

‘오늘도, 겨우 끝났네.’


쾅. 롯지 구석에서 모포를 덮고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는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매우 화가 난 상태로 들어온 제이콥. 익숙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제이콥의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너 지난번에 여기 있던 내 돈 훔쳤지?”

성인 남성의 힘에 어린 크리스토프는 여기저기 사정없이 굴렀다. 그의 몸은 린도야 고아원의 원장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파들파들 떨린다.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제이콥의 발이 크리스토프의 배에 더 빨리 날아왔다. 고통으로 상체를 숙이자 이제는 머리 쪽으로 충격이 가해진다.

“..아니에요...”

얼굴을 팔에 파 묻은 채로 겨우 소리 내어 간신히 말하자 제이콥이 히죽 웃는다.

“처음 볼 때부터 네가 맘에 안 들었어. 게다가 스벤 그놈이 요즘 돈도 주지 않는다구.”

제이콥은 크리스토프가 몸을 말고 있어 발길질이 잘 되지 않자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고개가 홱하고 뒤로 꺾어진 크리스토프의 뺨에 뜨거운 불 같은 것이 번쩍한다. 두껍고 큰 손바닥이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몇 번 세게 강타하자 여린 볼 살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크리스토프는 그가 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꼴에 금발머리를 달고 있네. 쓰레기 같은 놈이.”

그의 발에 채여 바닥을 구르다 벽에 부딪힌 크리스토프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새 눈이 부어올라 앞을 잘 볼 수가 없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얼음장수들의 성격이 모두 달랐다. 특히 제이콥은 스벤이 있을 때만 그에게 친절했다. 모두에게 따뜻한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롯지를 찾는 사람은 너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크리스토프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이 없었고, 삶에 지친 표정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오늘 밤과 같은 경우다. 술에 취해 이곳을 찾는 얼음 장수는 항상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이고 화가 나 있다. 이런 날은 롯지 안에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제이콥을 피해 밖으로 달려 나온 크리스토프는 롯지 구역 뒤쪽,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쪼그려 앉았다. 다행히 여기까지 쫒아오지는 않는다. 제이콥은 한참동안 욕지거리를 쏟아내다가 제풀에 못 이겨 잠이 들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의 동통을 겨우 참아냈다. 눈을 감으니 머리가 웅, 하고 울린다. 몸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이 어지럽다. 크리스토프는 양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크리스토프,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매일 있는 일도 아닌걸. 세상에 항상 좋은 사람만 있을 수는 없어.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스벤이 환하게 웃는 모습과 등 돌려 누운 모습이 동시에 스쳐 지났다. 크리스토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차가운 밤 바람이 퉁퉁 부은 그의 볼을 세차게 때린다.





8편. 나중에 봐


채빙은 꼬박 5일이 걸렸다. 많은 야크와 말, 채빙꾼들은 얼음을 수도 없이 아렌델로 실어 날랐다. 워낙 호수 크기가 커 얼음 양이 많았던지라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토프는 밤새 일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터라 연신 하품을 해 댔다. 이제 빈 썰매를 타고 베이스 캠프로 이동한다. 동북쪽에서 시작된 끊임없는 행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크리스토프는 근처 샤프란 근처까지 간다는 얼음장수가 있어 동행을 부탁했다. 피곤하고 땀에 찌든 그는 복슬복슬한 수염을 이리저리 실룩거렸다. 크리스토프를 슥 훑어보더니 비어있는 뒷 좌석을 향해 고갯짓을 한다.


‘스벤이 많이 기다리고 있겠지? 마을에서 먹을 것 좀 사갈까?’

“꼬마야.”

앞만 보고 조용히 야크를 몰던 남자가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자기에게 말을 걸 리 없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살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남자의 몸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였다.

“너 스벤이랑 같이 사는 애지?”

“네...네.”

잔뜩 겁을 먹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남자는 흥, 코웃음을 한번 웃더니 살짝 얼굴을 돌려 크리스토프와 눈을 맞췄다.

“닮았네. 스벤의 죽은 아들 말이야. 몰라?”

“네?”

“아, 아내도 있었지.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원래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 하늘이 질투해서 갈라놓는대. 사고로 죽었지. 시체도 못 찾았고.”

크리스토프는 스벤의 오두막에서 봤던 사진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조심했던 내용을 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충격 받았는지 사미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살더니. 어디서 애를 주워왔단 소리는 들었는데. 외롭긴 했나 보네. 생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애를.”

“...”

혼잣말 하듯 흘리는 남자의 말이 크리스토프의 귀에 선명하게 들린다.


덜컹 덜컹..

남자와 크리스토프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둘은 어색한 동행을 이어가고 있다. 북동쪽 방향으로 저 멀리 샤프란이 보인다.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남자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랴!”

짤막한 구령으로 남자가 야크를 몰고 지나간 자리에는 뿌연 먼지만 남았다. 크리스토프는 가죽보따리에 든 짐을 크로스로 멨다.

‘마을에 가서 혹시 남쪽으로 가는 마차나 순록치기가 있는지 알아 봐야겠다.’

스벤이 있는 오두막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니까. 아무도 없으면 그냥 걸어가야지 뭐. 터덜터덜 걷던 크리스토프는 마을 어귀에서 익숙한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순록과 함께 있는 스벤이었다.


“아저씨!!!”

크리스토프는 전속력으로 스벤에게 달려갔다. 다리를 다친 스벤이 크리스토프를 마중 나온 것은 처음이다. 여기까지 그가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크리스토프는 기쁨 반 감동 반으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스벤은 목발을 짚은 채로 크리스토프를 꽉 안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그 동안 힘들었지? 미안하다.”

스벤은 오늘따라 자기의 품을 파고들며 안기는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울먹울먹하는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는 크리스토프의 머리를 일부러 헝클어트리며 쓰다듬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순록 타고 집에 갈래?”

“순록을 탈 수 있어요?”

“순록치기는 이제 못하지만, 탈 수는 있지. 읏차.”

스벤은 크리스토프를 가뿐히 들어 순록 위에 앉혔다. 예전이라면 스벤도 한번에 훌쩍 타 올랐겠지만, 이번에는 목발로 바닥을 짚고 뛰어올라야 했다.

‘1년 새 키가 좀 컸네.’ 스벤은 크리스토프의 머리가 자신의 가슴 쪽으로 훌쩍 올라온 것을 봤다. 처음 크리스토프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방금 전 자신에게 달려와 안긴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엇갈린다. 위즐턴 군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다친 뒤로 자신을 위해 열심히 간호하고 뭐라도 해보겠다며 열심히 뛰어 다닌 아이. 무력감에 시달려 움직이는 것도 싫었지만, 스벤은 크리스토프가 없는 5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마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순록을 타고 이동했다. 저녁 노을에 휘날리는 크리스토프의 금발 머리가 반짝, 하고 빛난다. 스벤은 상체를 구부려 크리스토프를 살짝 안았다. 크리스토프의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아 간지럽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감상에 젖었다.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앉히고 아내가 있는 집을 향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무우—무우우우---”

“어? 순록이 왜 이러죠?”

갑작스럽게 멈춰 불안해 하는 순록을 보고 크리스토프가 놀란다. 스벤은 눈을 뜨고 정신을 집중해 방금 통과한 마을 어귀를 살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깃발이다. 위즐턴 군대의 깃발. 이어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개 짖는 소리. 스벤은 자신이 습격 받았던 순간이 생각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록을 타고 이대로 멀리 달아날까 생각하던 찰라, 언덕 위에도 같은 깃발이 보인다. 사람들의 소리는 소란스러움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외치는 한 단어만은 확실히 들렸다. ‘없애버려.’ 그는 온 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앞 뒤로 위즐튼 부대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순록을 타고 달리면 너무 눈에 띈다. 멀지 않은 곳에 숲이 보였다.


“크리스토프, 내려.”

“지금요?”

“시간 없어. 빨리.”

“아저씨...”

크리스토프가 우물쭈물하는 새 스벤은 거칠게 그를 밀어냈다. 스벤은 그에게 자신의 목발을 쥐어주었다.

“이걸 타고 내려야지.”

목발로 바닥을 짚어 훌쩍 뛰어 내린 크리스토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스벤을 바라봤다.

‘목발이 없어도 걸을 수 있나? 나한테 왜 이걸 주는 거지? 집에 가는 게 아닌가?’


“달려, 크리스토프. 뒤돌아보지 말고 집까지 달려.”“아저씨는요???”

“시간이 없어. 크리스토프. 오두막으로 가 있어. 이곳 상황을 정리하고 금방 갈게.”

“저 혼자요?”

스벤은 한층 가까이 다가온 부산스러운 소리에 마구를 더욱 힘껏 말아 쥐었다. 군인들의 구둣발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집이 부서지는 소리.

“이게 무슨 소리에요?”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지난번 스벤이 다쳐서 돌아왔을 때가 퍼뜩 떠올랐다.

“네가 알다시피 나한텐 저놈들은 한방이야.”

스벤의 허세는 들리지도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시야에 스벤의 움직이지 않는 오른발이 보인다.

“그래도 다리가-.”

스벤은 즉시 순록 머리를 마을 쪽으로 돌렸다. 햇빛을 등진 스벤의 그림자가 크리스토프를 내리눌렀다. 크리스토프는 한쪽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순록에 타 있는 스벤을 올려다 봤다.

“나중에 보자, 크리스토프.”

뭐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스벤은 순록 머리를 돌려 마을 쪽을 향했다. 크리스토프는 제복을 입은 많은 병사들이 이곳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정신없이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크리스토프의 귀에는 바람이 나무를 타고 흐르는 소리만 가득하다. 아무도 없는 라플랜드 숲 한 가운데서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스벤은 어떻게 됐을까? 그 군인들은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제까지 품에 꼭 안고 달린 스벤의 목발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크리스토프는 스벤을 기다렸다. 혼자 오두막으로 돌아가 스벤과 먹을 식사를 차렸다. 온기가 다 식도록 그는 오지 않았다. 해가 지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그는 오두막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크리스토프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어제 스벤과 헤어졌던 샤프란을 향했다. 가는 길은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 크리스토프는 탄 냄새와 함께 회색빛 연기에 휩싸인 마을을 봤다. 그가 일했던 헛간은 불에 타다 만 시커먼 나무 기둥 형체 뿐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주민 몇이 시체를 들고 울부짖거나 정신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사람과 순록 시체가 뒤섞인 속에서 낯익은 옷자락을 발견한 크리스토프는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온기를 허락했던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에필로그]


1년. 행복했다고 느꼈던 시간은 금세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크리스토프가 있는 오두막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며칠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울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조차 없다. 꺽꺽거리며 오열하는 공허한 소리는 오두막 전체를 한바퀴 휙, 훑더니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돌아와 부딪혔다. 언제나 혼자 생활하던 스벤의 공간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한참을 울다 보면 배가 너무 고팠다. 만든 지 며칠이나 지난 음식을 입에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 음식은 역겨웠고 곧이어 토악질이 나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내용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대로 주저앉아 입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을 손가락으로 모두 긁어냈다. 위에 남아있던 음식물들이 더, 쏟아져 나왔다.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러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크리스토프는 한참을 엎드린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삶은 계속됐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 죽고,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모든 것은 놀랍도록 제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울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살아가야 했다. 스벤이 소개해 주었던 얼음장수들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다른 방목지에서 순록치기를 하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일거리를 주긴 했지만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고아원에서 했던 경험이 있어서 적응이 빨랐다. 순록 농장 일에서 채빙현장 보조, 약초와 버섯 채집까지. 죽지 못해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보냈던 린도야의 경험이 크리스토프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어린 크리스토프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이겨냈다. 그래야 스벤이 자기를 구해준 보답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뭇잎이 떨어져 말라가고 바삭바삭한 소리를 내는 계절, 온 몸을 땀으로 목욕을 한 크리스토프는 터덜터덜 산길을 걷고 있다. 드디어 오늘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수고비로 받은 당근이나 양파, 감자 같은 것을 천 주머니에 대충 넣어 들고 흔들면서 걸었다.

‘오늘은 뭘 해먹고 자야 하나.’

그때, 크리스토프는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들었다. 산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몇 걸음 이동했을 때, 익숙한 동물의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플랜드 숲 한가운데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어린 순록이었다. 어미 순록에게서 독립해 살다가 화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토프는 순록 피가 옷에 잔뜩 스며드는 것도 모른 채 마구 달렸다. 작은 생명체는 몸을 떨고 있다. 순록치기 일을 하면서 몇 번 가봤던 순록의사의 집은 남쪽에 있는 사미족 마을 한가운데에 있었다. 늦은 밤이라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리스토프는 순록을 안고 마을 안을 해매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냄새 때문인지, 마구 달린 후라 심장이 뛰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방향이 헛갈렸지만, 이내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고아티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알콜 냄새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누구냐?”

문 밖에 서 있는 불청객을 향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최근 사방에서 사미족 마을을 공격하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모두 바짝 신경이 곤두서 있다. 크리스토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파요...”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여긴 왜 와.”

“순록이 아파요!!!”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볼 쪽으로 깊은 그림자가 진 남자가 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피투성이인 어린 아이와 축 늘어진 순록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한쪽 눈을 찌푸린다.

“아픈 건 못 먹어.”

크리스토프는 떨리는 팔에 걸려 있던 천 주머니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붉은 피로 흠뻑 젖어서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 없는 어떤 것. 남자는 순록을 다시 한번 곁눈질로 살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공짜로는 안 돼.”


수의사가 빌려준 수레에 다친 순록을 태우고 짙은 어둠 사이를 열심히 걸었다. 여기서 적어도 한 시간 반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 뒤를 돌아보니 순록의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보인다. 다행히 치료는 잘 됐다. 상처가 잘 아물어야 할 텐데. 혼자 길에 쓰러져 누워있는 저 동물은 크리스토프가 이 산에 처음 왔을 때와 참 닮았다.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작은 뿔,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따뜻한 피를 가진 생명. 크리스토프는 다리가 조금씩 저려왔지만 수레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데 힘을 쏟았다. 혹시나 상처가 벌어지면 괴로울 테니까.


“으으...”

크리스토프는 온 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어제 너무 무리해서 돌아다닌 탓이다. 일어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도 오랜만이다. 간신히 눈을 떠 보니 크리스토프 눈 바로 앞에 또 한 쌍의 까만 눈이 있다.

“악!”

놀라 몸을 일으키느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눈과 세게 부딪혔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어제 데리고 온 순록이다. 다행히 피는 멈췄다. 말똥말똥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보니 상태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오두막에 크리스토프가 아닌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동물이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훈훈해졌다. 어린 순록의 귀나 머리 뒤 혹은 등 쪽을 살펴봤지만 표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야생순록이 분명하다.


‘꼬르륵’

순록인지 크리스토프인지 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한 순간, 문 앞에 대충 던져 놓은 붉은 색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맞아, 너도 밥을 먹어야지?”

피에 젖어 말라 붙은 야채를 대충 물에 흔들어 씻었다. 감자, 양파, 당근. 순록은 작은 이끼인 야길을 먹지만 지금 이 녀석의 상태로는 스스로 뭔가를 찾기가 불가능하다.

“너 당근도 먹지?”

붉은 물이 뚝뚝 흐르는 당근에 시선을 둔 순록은 잠시 냄새를 맡는 듯 하더니 와작, 한 입, 또 다시 한 입. 맛깔나게 당근을 씹어 먹는 모습을 본 크리스토프는 이 당근이 특별히 맛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녀석이 당근을 좋아하는 것인지 헛갈렸다. 크리스토프는 맛을 보려고 순록이 먹던 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흐릿하게 단 맛이 느껴진다. 이미 거의 다 먹은 당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순록의 시선을 느낀 크리스토프는 남은 것을 모두 그에게 내밀었다. 순록은 손가락 끝을 간신히 피해 급히 당근을 입속으로 가져갔다. 손 끝에 살짝 닿은 순록의 입술과 혀는 아주 부드럽고 기분 좋았다.

순록은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순록, 꽤 표정이 다양한 것 같다. 내 민 손등을 말없이 핥는 순록.

“여기 주인 이름이 스벤이었어.”

크리스토프는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눈을 깜박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오늘 밤새도록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순록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부터 널 스벤이라고 부를게.”



-끝-


------------



++++문학대회 참가 소감++++



2차까지 오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마지막 다섯 작품에 속했다는 것은 제게 큰 의미입니다.

2차 심사 결과 글 보고 바로 소리 질렀어요. 정말입니다.

겨울왕국 갤러리에서 난생처음으로 팬픽을 쓰고, 만화를 그렸습니다.

이제까지 소소하게 문학을 올리면서 조횟수가 낮아 실망도 했지만, 부족한 글솜씨에 반응해주었던 수많은 프붕이들이 이 글을 만들었습니다!!

겨울왕국 갤러리에서 프로즌 덕질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완성했던 '어느 멋진날'이라는 삽화 문학이 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겨울왕국과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지요. 이후로 크리스토프의 감정과 상황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병풍 문학'을 써 왔습니다.


순록이름짓기는 크리스토프 서사중 첫 번째 시리즈였습니다.

소설의 전체 내용은 크리스토프가 부른 '순록이 사람보다 낫지'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그를 'curse, cheat, beat'했다는 가사를 에피소드와 상황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고아로 고달픈 삶을 살았던 그의 어린시절, 특히 스벤을 만나기 전, 최악의 상황이지만 따뜻한 심성을 가진 크리스토프를 표현하고 싶었고요.

크리스토프 팬으로서 그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찾아 내려 수많은 프로즌 책, 코믹스, 동화를 구입해 탐독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즌 유일 빌런인 한스 이야기(frozen heart)는 있어도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서적은 한 권도 없더군요. 그래서 직접 적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가급적 디즈니에서 공식 출판한 책 중에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다룬 파편들을 모으고, 빈 구멍은 제 상상력을 더했습니다. 크리스토프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림자의 숲 소설에 짧게 언급되는 부분이기도 해요.

내용 중 린도야는 실제 노르웨이의 섬 지역 지명이며, 린도야 고아원도 존재했던 곳입니다. 여기에 한국의 선감학원 사례를 접목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1800년대 아동노동의 착취현장에 대해 조사했으며, 노르웨이, 러시아에 걸쳐 라플랜드 숲에 살고 있는 사미족 자료를 모았습니다. 제가 알게 된 것들을 제대로 녹여내지는 못해 아쉽습니다.

어린 크리스토프를 담아낸 '순록이름짓기'를 계기로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크리스토프의 서사도 완성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격려와 지지 부탁드립니다.

좋은 대회 마련해주신 총대님, 세심한 심사평을 선물해주신 심사위원분들, 멋진 삽화를 그려주시는 삽화가 분들,

이글까지 읽어주신 모든 프붕이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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