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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우승작] 얼어붙은 이방인 - 1

엘사v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0 00: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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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이방인


l'étranger gelé


1


00. -


오늘 안나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아렌델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안나 여왕 서거,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은 당연하게도 아렌델에서 치러진다. 마법의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녹크를 타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겠지. 그러면 거기서 밤을 지새우고 내일 점심 전에라도 돌아올 수 있다. 노덜드라의 문제들은 잠시 쉬기로 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꽤 많았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뭐 내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모레 상장을 달고 나타나면 그때 조의를 표하겠지. 아직 안나가 죽은 것 같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지만 장례를 치르고 나면 일이 정리될 테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여섯 시에 녹크를 탔다. 마법의 숲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항상 그랬듯이 춥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노덜드라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다. 다들 내 소식을 듣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는데.”

허니마린이 말했다. 떠날 때가 되자 모두 나를 숲 경계까지 배웅해줬다. 상복으로 맞추기 위해서 조언을 들었다. 허니마린의 집에 들렀을 때는 조금 정신이 멍했다. 허니마린은 몇 달 전 라이더를 잃었다.

아렌델 성의 광장은 성의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보인다.

엘사 선왕님이다!”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외침에 성문이 열렸다. 실로 오랜만에 아렌델의 땅을 밟았다. 손짓을 해서 녹크를 떨어지는 눈 사이로 날려 보냈다. 경비는 현 여왕인 이렌느부터 만나야 한다고 했다. 여왕에게로 전갈이 전해질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내내 경비가 위로 비슷한 말을 해주었고,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렌느와 만나게 됐다.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이렌느에게서 엄마인 안나와 똑 닮은 당찬 향취가 풍겨왔다. 집무실 소파에는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날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도 있었다. 한때 혹독한 겨울을 헤치며 얼음을 채취하던 그의 모습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췌하게 변해있었다. 세월이 지난 탓인지 영원할 것 같았던 동반자를 잃어서인지. 혹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한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렌느의 말에 무거워진 공기가 깨지면서 황량한 집무실에 잠시 생기가 도는 듯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즐거웠어. 그동안.’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내게 해명을 바라는 말투였기에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만둬. 이렌느.”

크리스토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엄마의 선택이었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렌느는 즉시 입을 다물고 따라오라고 했다. 어렸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나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변하지 않는 건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나는 마치 이곳에 처음 온 사람처럼 이렌느를 따라 걸었다. 집무실을 떠나 1층으로 내려오면 연회장, 그곳을 지나 정문을 넘어가면 멀리 성당이 보인다. 몇십 년 전 내 대관식이 있었던 그곳. 많은 기억이 바랬지만 몇몇 부분은 아주 또렷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렌느가 물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시도에 불과했기에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글쎄.’라는 말로 맞받아쳤다. 효과가 있었는지 이렌느는 나를 한번 슬쩍 보고는 이내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이 눈은

한참을 걷던 이렌느가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렌델에는 폭설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양의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 기분과 기상 현상의 관계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을 명분이 충분했다.

이건 나와 상관없는 눈이야.”

이렌느는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추워 보였기에 나는 이렌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추워? 원한다면 그치게 할 수 있어.”

아뇨. 괜찮아요.”

이렌느가 황급히 말했다. 정말 괜찮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성당의 문을 열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힘겹게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이 내 눈을 간질였다. 성당의 내부는 몇몇 낡은 기자재들을 교체한 것 빼고는 그때와 완전히 똑같은 구조였다. 성가대 대신 검은 천들이 높은 천정에서 내려와 있었고 검은 관을 수놓은 화환으로 그날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로 꽉 차 있던 곳은 반들반들 빛나는 공허함만이 자리 잡았다. 이렌느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안나가 누워있을 관으로 향했다. 카펫을 걸으며 의자를 쓸어보았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보고 싶으세요?”

이렌느가 관에 손을 얹었다. 나는 관 안에 있을 안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네모난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안나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노환이죠. 원체 건강하신 분이었지만. 세월에는

이렌느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잠깐 훑어보았다. 수없이 많이 받아본 시선이었기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렌느는 내 표정을 봤는지 작게 죄송해요.’라고 중얼거리고는 황급히 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관에 놓인 이렌느의 손에 내 손을 포개어 놓았다. 움찔하는 감각이 전해져 왔지만 이내 편안한 듯 조용한 고동 소리만이 들려왔다.

안 봐도 될 것 같아.”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이렌느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이렌느의 손에 갖다 대었다. 이렌느는 흐느끼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무래도 내 대답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게 네 어머니의 바람이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확히 적중했다는 것도. 성당에서의 만남은 짧았다. 나가기 직전, 나는 의미 없이 한 번 뒤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관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이렌느와 나는 다시 눈 내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손님용 방 대신 내가 예전부터 쓰던 방이 임시로 지급되었다. 하루 있다가 가는 것 치고는 꽤 신경을 쓴 조치였기에 그래도 아직은 날 생각하고 있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만 이렌느의 아이들이 쓰던 방이기도 했고 가구 배치가 모두 바뀌어 있었기에 추억에 젖을 곳은 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나 또한 안나 곁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사실 장례식 때도 부르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렌느가 이렇게 말하며 적극적으로 말렸고 나는 이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의 지시사항 중 유일하게 지켜지지 않은 것이 바로 내가 이 순간에 아렌델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흔히 말하는 아무리 그래도.’가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 의미 없는 문구를 처음 봤을 때 그냥 통보 목적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안나의 의도는 알겠지만 나 또한 아무리 그래도.’에 당한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고 아마도 다시는 아렌델에 발을 들일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아마 안나가 이걸 알았다면 정말 제멋대로인 언니라고 한소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면 훌륭한 편이다.

오랜만에 창으로 향해서 밖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두운 기가 걸려있었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듣기로 안나 여왕은 손에 꼽을 만큼 성군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니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했던 왕이었다고 했다. 한동안 아렌델은 슬픔에 잠겨 있겠지.

침대에 누웠다. 외로웠다. 이곳에선 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안나가 내게 주는 의미를 쫓아가 보았다. 답이 나오지 않은 물음만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몇 개 세어 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주무세요?”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들어와.’ 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렌느가 방문을 열었다.

아까는 죄송해요.”

대뜸 이렇게 말하는 통에 나는 의문이 들었다.

선왕님을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괜찮아.”

이렌느는 내 표정을 보았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뒤에 나올 말을 대충 예상했기에 나는 말을 끊어주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렌느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전 아직도 그게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어요. 평소의 선왕님이라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난 이미 평소의 내가 아닌걸. 네 어머니가 오랫동안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나는 잠시 천정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매달려 있던 질문들은 하나둘씩 터져서 사라지고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렌느의 반응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아.”

이렌느는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표정을 애써 숨기려는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일 뵐게요. 늦지 않게 와주세요.”

이렌느는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안나가 죽고 첫째 날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둘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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