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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우승작] 얼어붙은 이방인 - 20

엘사v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0 0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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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토할란 - 1862/ 현재 1973


20년이 흘렀다. 평화의 시기였고 행복한 여왕과 행복한 정령은 자주 교류하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 노덜드라 쪽은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나는 주로 안나에게 붙어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모든 걸 놔 버리고 안나만 바라봐도 좋은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밖에서도 이곳에서도. 앞으로 24년 후에 안나가 죽는다면 이제 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아토할란의 기억 속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몇 번이라도 안나를 보러 다른 시간대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안나가 아니었고 무의미한, 똑같은 행동만을 반복하는 인형과도 같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히 살아간다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토할란의 기억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두는 그저 배우에 불과했다. 수많은 시간대를 여행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있고 말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모두 환상처럼 흩어졌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어느 시간대에서도 이방인일 뿐이고 기적적으로 이 심연에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 밖의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었지만 결국 한 시간대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아스라이 바스러질 것이다. 그건 안나와의 추억을 생각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되겠지.

새삼 안나의 혜안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결국엔 이 모든 일의 결말은 결국 내가 아토할란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모두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는 존재가 되는 것.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는 것. 다섯 번째 정령이 아니라 정령이 되는 것. 이 모든 게 나뿐만 아니라 과거의 수많은 누군가도 겪었던 과정에 불과한 거라면. 그리고 그 모든 정령이 이 아토할란을 이루고 있는 거라면. 그게 아토할란의 웃음이 의미하는 거라면.

내 고민에 따라 최근 들어 안나의 표정은 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언니를 만날 때는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언니가 떠난 직후에는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안나 나이 42. 자신은 변하고 있지만, 언니는 변하지 않는다. 거울을 보면 그 차이는 확실했다. 눈주름이 보이고 탱탱했던 얼굴은 점점 삭막해져 간다. 안나가 거울을 볼 때마다 나도 전신 거울을 하나 만들어 안나의 곁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서 있었지만, 도저히 자매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1862년의 나는 1842년의 나와 다른 게 없었고 1973년의 나와도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크리스토프.”

안나는 크리스토프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안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침실로 향했다. 내가 안나의 기억을 놓치지 않았다면 이 대화가 처음으로 엘사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 없이 안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날에도 역시 엘사가 왔다 갔다. 크리스토프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언니가 올 때마다 웃는 가면을 쓰고 행복한 여왕을 연기하던 안나를 계속해서 볼 수 있었으니까.

너도 알고 있지?”

그래.”

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은 안나의 장례식 때 나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하던 그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난 상상이 안 돼. 넌 상상할 수 있어?”

안나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산 것도 길게 느껴지는데 그런 걸 어떻게 상상하겠어?”

먼 미래에 언니가 우릴 기억할까?”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누워있던 안나가 자세를 고쳐 잡고 머리 쪽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무슨 뜻이야?”

그냥 오래 사는지, 아니면 죽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우리도 옛날 일은 잘 기억나지 않잖아.”

안나는 손가락 하나를 굽혀 입술에 갖다 대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생생한 기억들은 있지 않아? 난 너랑 결혼할 때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 같은데. 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그렇지?”

하고 안나가 배시시 웃었지만 나는 그 웃음에 담긴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안나가 뭘 할지 알 수 있었다. 엘사에게 대답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엘사가 다시 아렌델을 방문했을 때였다. 안나는 또다시 가면을 쓰고 엘사를 맞이했다.

자매의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바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마법을 조절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드디어 안나가 입을 열었다. 아토할란의 심연에 얼어있는 내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언니. 대관식 때 기억나? 그때 낙엽 밟고 미끄러진 사람이 있었잖아?”

안나는 차를 후룩 마시면서 틀린 기억을 유도했다. 나이가 들어서 기억하기가 힘들다면서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소리와 함께.

네 대관식 때? 음 그건 네 결혼식 때 아니었어?”

커다란 사건 위주로 말하던 안나는 계속해서 별 것 아닌 사소한 일로 엘사를 끌고 갔다. 엘사는 사소한 것들마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날짜, 장소, 시간. 마치 아토할란과도 같이. 차곡차곡 쌓이는 눈의 기억과도 같이. 엘사는 아토할란의 눈의 여왕이었으니까. 눈의 여왕은 아토할란과 닮아있었으니까. 아토할란 자체가 눈의 여왕이었는지도 모르지.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가능한 모든 미래와 과거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었던, 또 하나의 나처럼.

엘사가 말하는 수많은 날짜는 곧 안나를 마구 흔들어 댔지만, 안나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 대화를 받아치고 있었다. 오히려 신기하다면서 역시 우리 언니라며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 언니가 돌아가고 가면을 벗은 안나는 많이 울었다. 크리스토프는 감히 여왕의 눈물을 막지 않았다. 막을 수도 없었고. 그저 문을 닫고 복도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한 번 지었을 뿐이다. 이 순간이 바로 안나의 계획이 시작된 때였다. 이 순간, 안나만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나였고. 즐겁게 보낸 추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괴로움은 정확히 같은 양으로 증가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었기에.

하늘이 잠들고 있었다. 나는 올라프와 처음 만났던 아렌델 뒷문 쪽 바위에 앉아 이 귀여운 눈사람과 만났다. 올라프는 내가 안나의 곁에 있을 때 엘사 쪽을 담당했다. 이제 서로의 기억을 공유할 차례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엘사는 똑똑하다. 안나의 물밑작업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맞아. 엘사는 알고 있어. 바보가 아니니까. 그리고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걸 꽤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그동안 말은 한 번도 안 했지만.”

그래서 엘사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준비하고 있어. 기억이 지워진 이후를 대비하는 것 같아.”

나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낸 메시지를 생각했다. 40년 전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던 그건 생각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더 빠르게. 그리고 과감하게. 엘사는 미래의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안나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나는 이곳에 있다. 안나를 되찾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이. 아토할란의 기억 속에 표류하는 조난자와도 같이. 하지만 정말로 이대로 끝날까? 나는 생각했다. 내 기억이 지워지는 건 1870, 앞으로 8년 뒤다.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같은 걸 느끼고 있다. 8? 아니, 엘사는 벌써 100년 뒤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이대로 끝낼 리는 없어. 나는 생각했다. 틀림없이 이 기억의 강물 속에 무언가 있을 거야. 만약에 그렇다면 이곳을 탈출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아냐.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이토록 세세한 계획을 세운 엘사라면 탈출 방법도 생각하지 않고 안나의 요청을 수락할 리는 없어. 완전히 사라졌던 희망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붙잡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그냥 이대로 이 시간대를 살아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시간대로 가봐야 할까? 이 수많은 시간대 속, 수많은 장소 속에 어디를 가야 하는 거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준비했다면 오늘 이후가 될 거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가만히 복기해보았다. 예전 엘사와도 같이 나에게도 비상한 기억력이 있었다. 아토할란이 있었기에,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아토할란의 그것과도 같이 수많은 사건이 쏟아져 나왔다. 나라면 분명히 가까운 곳에 힌트를 남겨뒀을 거다.

안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내가 가보았던 미래의 일까지도. 별다른 특별한 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뭔가 거대한 힌트가 있었다면 내가 눈치를 챘겠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그냥 여기에 계속 있을 거야?

올라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방금 안나랑 있었던 일을 대부분 봤는데. 아무것도

나는 올라프를 바라보았다. 올라프는 흐흐흥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렌델에서 벌어졌던 모든 역사를 봤지만, 그 어디에도 올라프는 없었다. 고작해야 어릴 적 있었던 사고 직전에 만들었던 눈사람. 그것도 살아있는 게 아닌 말 그대로의 눈사람.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에 안나가 그려줬던 올라프. 그것만이 올라프라는 존재가 아토할란의 기억 속에 각인된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올라프는 아토할란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 알아보고 대화까지 할 수 있다. 마치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은 것처럼.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올라프. 너 누가 만들었다고 했지?”

엘사. 네가 만들었지.”

올라프는 당연한 건 물어본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

여기서아마 18701221일일 거야.”

내 생일 전날, 그리고 기억을 지우기 직전. 하지만 올라프는 아토할란의 기억이 아니다. 나와 같이 이곳에 속하지 못한 존재다. 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올라프는 그저 아토할란의 기억으로 남을 텐데? 대체 어떻게?

나는 올라프의 손을 잡았다. 갈 곳이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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