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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아렌델 성 안나의 방 - 1886년 1월 11일 / 현재 – 1973년
나는 안나가 준 마지막 선물의 포장지를 뜯었다. 안나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찾아냈다. 이제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건 안나가 해줄 수 있었다. 1842년에 있었던 그 사건과도 같이. 고독한 얼음 마녀를 녹이기 위해서는 엘사와 안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두 자매가 함께해야 했다. 왜곡된 역사, 잘못된 진실을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쉽게 생각해낼 수 없던 것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기억을 지울 만큼 괴로웠기에 그토록 많은 시간대를 방문했으면서 내게 기억이 쌓이기 시작했던 이후의 시간대로는 오지 않았다. 안나는 죽었고 나는 지금까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안나가 정말로 사라진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은 것 같다. 안나는 아토할란의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아토할란에는 살아있는 안나가 있었다. 나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안나가 있었으니까. 이제 나는 똑바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안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토할란에 얼어붙은 나를 구해주는 건 또다시 안나였다. 그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연하기도 했고.
나는 안나의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올라프와 깊은 포옹을 나눴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올라프와도 헤어지게 된다. 올라프는 이곳에서 마법으로 만든 존재였으니까. 길고도 긴 그 모험을 함께 한 내 유일한 친구를 놔두고 가는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 올라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날 위로하며 뭐라고 했더라. 그래. ‘어떤 사람을 위해선 기억 속에 남아도 좋다.’고 했다. 그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안나를 향한 말이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올라프는 언제든 이곳에 오면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렌델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안나가 눈 오는 날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없더라도 내가 아렌델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눈의 여왕이었으니까. 그리고 안나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눈의 여왕을 언니로 둔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나는 올라프의 손을 잡고 안나의 방문을 통과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이었지만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은 열린 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나의 방에는 이미 이렌느와 크리스토프가 안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 안나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20년의 연극은 끝났다. 안나에게 남은 건 이제 연극이 아니었다. 나는 안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늙고 주름투성이의 그 손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내게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안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눈이 오네…”
“그래 눈이 오고 있어. 안나. 눈의 여왕이 널 위해 찾아왔어. 네 죽음을 똑똑히 보기 위해서.”
내가 대답했다. 이렌느는 안나의 장례식 때 안나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서거했다고 했다. 당연히 알 수 없었겠지. 안나는 삶의 마지막까지 비밀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까. 두 자매만이 공유했던 웃기고도 가슴 아픈 연극이었으니까. 내가 반드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다행이야. 날 보러 와 줘서.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 눈 때문에 그러세요? 선왕님은 이제…”
이렌느가 말했다. 안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오, 이렌느. 네게 할 말은 다 끝냈어. 크리스토프, 네게 할 말도.”
안나는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말은 힘겹고 띄엄띄엄 떨어져서 금방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는 언제든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안나의 진짜 죽음을 보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다 알고 있었어. 재미있었으면 됐어. 그렇지?”
그리고 안나는 다시 한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늙고 힘 빠진 눈이었지만 그 빛만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 나는 안나가 지금 죽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나의 눈에서 점차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양과도 같이 불타오르던 눈에 어둠이 잠식하고 있었다. 아토할란의 어둠에서 헤매고 있는 나처럼.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안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안나는 보이지도 않는 나를 확신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안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고 있었다.
“즐거웠어… 그동안.”
그리고 안나의 손이 이렌느의 손을 떠나갔다. 이렌느는 툭 하고 떨어지는 그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크리스토프도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안나의 이름을 되뇌었다.
나는 이제 저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지금은 죽은 크리스토프도, 이렌느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저 말은 나를 위한 말이었으니까. 20년간 즐거운 연극을 펼쳤던 내 동생이 진심으로 즐거웠다고 하는 말이었으니까. 안나는 내 기억을 지웠지만, 안나에게 내 존재는 언제나 함께였다. 다섯 번째 정령이 되어 아렌델을 떠난 그 순간에도 나는 안나와 함께였다. 내 생일에도, 기억을 지운 날 새벽에도, 앞으로 안나가 알려주는 날짜를 방문하는 날에도, 나는 언제나 안나와 함께일 것이고 안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안나가 했던 연극은 연극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나와 함께 있었기에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안나만의 행동이었다.
나는 안나의 미소를 보고 있었다. 아토할란에 얼어있던 내 몸이 녹아가는 걸 느꼈다. 나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았다. 안나의 죽음을 똑바로 보았고 마지막으로 내게 남겼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동생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기억을 지운다는 방법으로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잘못된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아토할란의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안나의 도움으로.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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