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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훈 에세이] 김대중 씨를 위한 장미 한 송이

운영자 2005.12.29 16:56:56
조회 2405 추천 3 댓글 6

 1. 삶터에 대한 관심과 배움의 길

  김대중 씨를 위한 장미 한 송이

  하버드 교육대학원을 끝으로 일단 공부를 마친 나는 1973년에 하버드 조경학과 출신들이 특히 가고 싶어한다는 SDDA(Sasaki Dawson Demay Associates Inc.)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미국 관련 업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회사로서, 실제로 종합 환경 설계 및 조경 분야에서는 1위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출근을 앞두고, 이제껏 내가 배운 것들을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회사 출근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 8일 평소 나를 동생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던 그레고리 핸더슨 교수가 연락도 없이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한국의 김대중 씨가 도쿄에서 납치됐는데 하버드대학교 총장과는 통화를 한 상태이며 그를 도와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핸더슨 교수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있었다. 한국 정치에 관한 『소용돌이 정치(Politics of Vortex)』라는 책을 써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워싱턴 정가와도 직·간접적으로 줄이 닿아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향후 미국의 대응 방안에 대해 급히 의논도 할 겸 내 의사를 타진하러 온 것이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구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그에게 하버드대학 총장 데렉 벅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당시 하버드대학의 총장은 마침 법대 학장을 지낼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총장실로 가기 전에 꽃가게에 들러 장미꽃 한 송이를 샀다. 그리고 데렉 벅 총장에게 장미 한 송이를 내밀며 말했다.

  “총장님, 라이샤워 교수와는 이미 통화를 하셨다구요? 김대중 씨는 반드시 구출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총장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제가 듣기로는 김대중 씨가 이번 여름 학기에 하버드에서 공부하기로 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서요?” “총장님께서 그 사실을 알리시고, 납치된 상태에서 풀리면 하버드 여름 학교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당장 관계 당국에 알리시지요.” 내 말에 벅 총장은 좋은 제안이라며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한편 나와 핸더슨 교수는 곧바로 여러 주요 인사들의 뜻을 모아 워싱턴 국무성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나는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신문에 ‘납치된 김대중 씨 사체로 발견’이라는 기사가 날 것 같은 조바심이 났다.

  마침내 8월 13일, 사건 발생 6일째, 김대중 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는 극적인 소식을 들었다. 나는 김대중 씨가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에, 또 나의 조국 한국이 최악의 반민주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만은 피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하던 SDDA로 출근을 시작했다. 조경과 건축, 도시 설계에 관련된 일을 하며 정식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취직 후 나는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저, 일본 쿠시마 리조트의 호텔과 콘도, 오클라호마 도시 중심의 플라자 도시 설계, 캘리포니아 내파밸리 도시 설계 등 큼직한 일에 조금씩 참여했다. 물론 경험이 많지 않은 터라 독자적으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서 한 일은 아니었고, 팀의 멤버로서 참여를 한 것이었다.

  비교적 내가 하는 일이 어설프지는 않았는지 회사의 일본계 보스인 마사오 키노시타 씨가 가끔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칭찬이 참으로 특이해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는 일을 마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미스터 곽, 당신의 어머니는 참 훌륭한 사람인 것 같소!”

  그 회사에 들어가서 성실하게 일한 것 뿐인데 그분은 나에게 왜 그런 칭찬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제일 존경하고 사랑한다. 어머니는 나의 분신이었고, 나는 어머니의 분신이었다.

  어머니는 조선시대에 나셔서 지금 93세시니까, 일본 강점 시기를 거치셨고, 해방과 6·25전쟁, 4·19혁명 등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두루 겪으면서 사신 역사의 증인이다. 어머니는 늘 나라사랑을 강조하셨다.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나에게도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당부하셨다. 늘 겸손할 것을, 남을 위해 살 것을, 매사에 신중할 것을 당부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은 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현현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사랑의 힘이란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연히 던져진 일본인 보스의 격려는 나의 결심을 점점 굳혀가게 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이제 지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실천할 곳은 어머니가 사시는, 바로 내 조국이 아닌가.

  김대중 납치 사건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 곳, 경제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곳, 그러나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곳.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씩 귀국 짐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10년 전에 떠나온 고국 땅에 헌화할 장미 한 송이도 함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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