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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훈 에세이] 만신창이가 된 서울

운영자 2006.02.02 11:17:26
조회 2677 추천 0 댓글 3

  4. 도시 계획 전문가, 세계로 향하다

  
만신창이가 된 서울

  1976년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서울시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이미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는 세 살 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종로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서울이야말로 내 배움의 원조 터였다. 또 안국동, 관훈동, 견지동, 낙원동, 명륜동, 계동, 화동, 수송동, 장충동, 삼청동, 남산동, 필동, 신당동, 남대문, 동대문, 용산, 이태원, 마포, 원효로, 이런 동네들이 나의 삶터이자 성장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나와 서울과의 인연은 이런 지연(地緣)에 얽힌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은 거듭 발전하여 한국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곳이고, 동북아의 중경(中京)이며 지구촌의 혼(Soul)을 뿜어내야 하는 곳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내가 건축과 도시 설계, 국가 발전 정책과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상 그 배움을 실천할 곳들은 백두대간이었다. 그래서 속초, 강릉, 춘천, 철원, 원주, 충주, 수안보, 청주, 경주, 대구, 울산, 포항, 부산, 창원, 여수, 여천, 광양, 목포, 나주, 광주, 전주, 군산, 예산, 대천, 홍성, 부여, 공주, 대전, 계룡, 대덕, 청양, 화성, 안양, 성남, 파주, 판문점, 일산, 영종, 인천 등은 내 꿈을 그릴 나의 화폭이었다. 북한의 평양, 나진, 청진, 신의주, 원산 등도 화폭의 반을 차지하고 앞으로 그려 나갈 부분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터전이 서울이었다.

  80년대 초반에 서울시는 20년 앞을 내다보는 도시 기본 계획을 ‘사람과 환경그룹’과 선진 엔지니어링에 맡겼다. 1934년 조선 시가지 계획령에 준거한 4대문 안의 계획이 4대문 안을 넘어서 600㎢의 서울 면적을 모두 들여다본 것이다.서울에서의 첫 작품이었던 문화 예술의 거리 대학로, 서울의 꿈이 싹트기 시작한 동서 녹지축 공간 한강 개발, 서울의 동맥이 된 2호선 순환 지하철, 세계의 이목을 서울로 끌어들인 올림픽 스타디움과 올림픽 공원, 그리고 도심과 강남을 연결하여 서울의 숨통을 트게 한 마포 대로, 성곽 되찾기, 산과 내 살리기 ……, 이런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나는 서울을, 서울은 나를 신뢰하며 함께 미래를 꿈꾸는 각별한 인연이 되어 갔다.

  나는 서울에서의 이런 작업들을 결코 순간적인 발상이나 일회성의 프로젝트로 여기지 않았다. 600년을 넘어선 서울 정도(定都)의 역사가 소중하듯이, 나 또한 50년, 100년, 나아가 다시 600년 후의 전체적인 서울의 모습을, ‘메타폴리스, 중경(Metapolis, 中京)’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그 소중한 작업들을 하나씩 해 왔다. 그러나 서울은 안타깝게도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고질병에 걸려 있었다. 서울은 전 국토의 0.7%에 불과한 면적 속에 전국 인구의 4분의 1이 살고 있는 초고밀도의 도시, 정말이지 제대로 숨을 쉬고 살 공간조차 부족한 ‘도떼기 시장’인 셈이다. 몇 년 전 통계를 보면 실제로 1년 동안 20억 톤에 가까운 용수와 300만 톤에 이르는 식량이 소비되면서 동시에 7,000만 톤의 폐수, 400만 톤의 분뇨, 450만 톤의 생활 쓰레기, 30만 톤의 유해 폐기물, 90만 톤의 대기오염 물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서울시의 기반 구조가 이처럼 막대한 Input과 Output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하는 사람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체를 볼 겨를 없이 그저 장사가 되는 곳이라면 여지없이 그 빈 곳을 채워 가는 ‘빨리빨리’식의 인식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도시의 공간 구조는 누더기화되고, 도시의 동선 체계 또한 엉망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즉 피가 제대로 흐를 수 없는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었다. 도시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과도한 인구 집중 속에서 도심과 도시 진입부의 교통 혼잡과 소음, 먼지, 시각 환경적 공해 등이 이미 한계치에 이르고 있었다. 병풍식으로 획일화된 고층 아파트의 콘크리트 숲 속에서 도시 경관과 자연은 파괴될 대로 파괴되었으며, 600년 도읍지의 전통과 현대가 단절된 부조화 속에서 문화 실종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이 속에서 사는 어린이들이 그 모습을 닮아갈까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당초 아름다운 산들과 강을 낀 명도읍지 서울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간략하게 그 핵심 원인을 꼽자면 제대로 된 정책의 부재와, 정치·경제와 도구화된 전문 분야가 유착되어 남발한 정책이 문제였다. 인구 유입을 막겠다면서 아파트를 지어 놓으면 어떻게 한국 경제의 대부분을 주도하는 서울에 사람들이 유인되지 않겠는가? 특히 농어촌의 교육 문제가 낙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행렬은 이미 일방통행식으로 조장되어 있는 셈이었다. 특히 이런 일들이 학문을 한다거나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시 계획위원회도 원칙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서울이 조선 왕조의 도읍으로 정해진 것은 1394년이었는데, 이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은 인구 10만 명의 성곽 도시였다. 1910년 일본의 강제 점령 하에 경성으로 이름이 바뀐 서울의 인구는 23만 명이었는데, 이때 런던의 인구는 700만, 뉴욕은 450만, 파리는 300만, 동경은 290만 명이었다. 외국의 주요 수도들이 20세기 초에 인구면에서 이미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데 비해, 서울은 1960년대 이후 30여 년 만에 인구가 1,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멕시코시티, 쌍파울로, 카이로 같은 도시들과 비슷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였다.이런 상황 속에서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 역할을 다해야 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여 일감 얻는 데만 열중하였다. 특히 도시 전체를 보고 앞뒤를 가리면서 삶터의 질을 생각하지 않았고, 또 그것이 다음 세대에 남길 유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저 토목공학적 수법 일변도의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시민 생활의 사회적·심리적·시각적 의미와 가치는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의 도시 개발이 진행되었다. 도시의 공공 공간이 적절히 확보되지 못했고 건물의 조화, 건축의 아름다움, 교통의 흐름과 주거지와의 관계 등은 뒷전으로 밀려 있거나 아예 그 개념조차 없었다. 아파트는 있어도 집은 없고, 건물은 있어도 건축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토목공학적 접근 이후에 도시 계획 분야의 전문가들이 점차 늘어났으나 그들은 영국과 미국의 신도시 개발 이론과 실제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브라질리아와 챤디가에서 나타난 부적절한 도시 형태를 양산하는 데 기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서울이 그렇게 잘못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진정으로 가슴이 아팠다. 하루하루 누더기가 되고 만신창이로 변해 가는 서울, 할 수만 있다면 그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 자연이 살아 숨쉬고 개성 있는 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그리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인류 공동체를 화이부동(和而不同)하게 하는 철학이 태동되는 곳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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