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군복을 입은 쾌흥태가 소주 한 병과 마른 안주를 들고 산을 오른다.
그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무덤이다.
잠시 그 무덤을 응시하던 쾌흥태는 특유의 무표정이 풀어지더니 곧바로 옅은 미소로 변한다.
밝아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쾌흥태가 무덤을 향해 나지막히 말한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앞에 마른 안주를 놔두고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그 옆에 놔둔다.
쾌흥태는 양반다리를 하고 무덤과 마주 앉는다.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처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아버지처럼은 안되는 것 같습니다.."
쾌흥태가 어렸을 적 부터, 동네에서 검도장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 쾌남천은 주변에서도 알아주는 오지랖 넓은 인간이었다.
쾌남천은 정의로운 성격이었지만 한편으론 불같은 성질도 가지고 있어 불합리한 일을 보면 좀처럼 참지 못하는 성격에 상대방에게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주먹이 나갈 정도로 욱하는 성질도 지니고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에 꽤 얽히다 보니 상대방은 몰론 자신 또한 다치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왠 참견이냐며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다른 이를 괴롭히던 상대를 응징하다가 오히려 상대쪽에서 폭행으로 고소하여 곤욕을 치룬 적도 적잖게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쾌흥태는 자신의 아버지 쾌남천을 존경했다.
쓸데없는 오지랖과 참견으로 일을 더 키운다며 아버지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많았으며, 그 덕에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었다.
엊그제 통화했던 석진호 또한 학창시절, 방황하며 깡패 노릇을 하다 쾌남천에 의해 갱생한 청년들 중 한 명이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병으로 인해 돌아가시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었다는 것이 그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쾌흥태 또한 그런 자신의 아버지 쾌남천을 닮고자 했었지만, 자신은 아버지와 달리 미숙하고 대담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행했던 일들에는 자신의 지나친 행동들로 인해 '정의'보다는 '사고'가 부각되기 일쑤였고, 과격한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힌 적도 있었으며, 입대 전에는 석진호가 아니었다면 전과자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 탓에 해병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선을 정해놓고 가능한 조용히 행동하고자 했으나 이는 항상 빈틈을 만들었고 가장 골치아픈 선임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동기가 다치는 일도 생기고 말았다.
정면으로 맞서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방법만을 고수한다면 당장은 눈에 보이는 피해는 적겠지만,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길 것이고, 최악의 경우 나중에 후임층에서 변왕추같은 인물이 나타나거나 그보다 더한 인물이 나타날 수도 있다.
바뀌어야 한다면 지금뿐이다.
이젠 자신이 정했던 그 선을 넘어야 한다.
그게 옳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쓸데없는 영웅심리에 물든 자신의 아집일 뿐일까?
갑자기 돌풍이 분다.
그 돌풍에 쾌흥태가 잠시 움찔하는 사이 무덤앞에 놔둔 소주병이 갑자기 넘어진다.
돌풍이 멎어들자 쾌흥태의 눈에 들어온건 넘어진 소주병이었다.
그리고 그 소주병의 주둥이 부분은 자신을 향해 있다.
그제서야 쾌흥태는 깨닫는다.
지금의 이 모습은 속으로 망설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꾸짖음이라는 것을.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좇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것을.
쾌흥태는 그제서야 한층 밝아진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석진호가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
관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이젠 내가 뭘 해야할지 알 것 같아."
"하... 조용히 넘어가긴 틀렸구나.
이번엔 커버 못 쳐줘."
"걱정 마. 내가 알아서 책임 질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회는 한 번 줘 봐야지."
쾌흥태는 변왕추를 떠올리며 씩 웃는다.
그런 쾌흥태에게 석진호는 들고있던 서류봉투를 건내며 말한다.
"이건 변왕추라는 놈에 대한 기록이야.
그리고, 부탁한건 다 해놨어.
마갈곤이라는 그 놈, 곽말풍 중령 그 양반도 모를 정도로 생각보다 묻어버린 사건이 꽤 많은 모양이야.
대대 간부들도 빼돌린 운영비가 꽤 있는 모양에다, 네가 모아다 준 병사들의 소원수리도 강한 참고자료가 될 것 같고.
지금쯤이면 곽말풍 그 양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을거야."
"고마워 진호 형. 신세 많이 졌어."
"교도소 갈 정도로는 하지 마라..."
석진호의 당부 아닌 당부에 쾌흥태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집에다가 안부나 전해 줘."
"못된 놈, 집에는 안 들렀다 바로 가는거냐?"
쾌흥태가 손을 흔들며 산을 내려가고 석진호는 그런 쾌흥태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덤을 향해 돌아선다.
"역시, 관장님이라면 안 말릴 것 같았어요."
그러고선 쓰게 웃으며 넘어져 있던 소주병을 집어들고는 병 안에 남아있던 소주를 무덤에 붓는다.
얼마 뒤, 포항의 시내.
6974부대의 실세들이 고깃집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고성방가는 몰론이고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이 뒤섞인 상스러운 말들에 주변에선 불만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세상인양 행동하고 있었다.
"이모! 씨발 술 좀 더 갖다달라고!"
"거 쓰벌, 장사할 마음이 있능건가?!"
"이봐요, 해병 양반들! 여기 당신들만 있는거 아니잖아?!"
그런 그들의 모습에 몇몇 사람들이 따져도 보았지만,
"이 양반, 흘러빠진 민간인 주제에, 어디서 해병들에게 훈계질이야, 엉?!!!"
오히려 역정을 내고, 누군가가 군기순찰중이던 헌병들을 불러 그들을 제지해보려 했지만,
"어이, 헌병. 니 몇 기냐?"
"그... 1xxx기 입니다!"
"새끼... 한 잔 받어."
"하지만..."
"이 새끼가, 선임이 주는데..."
해병대 특유의 기수 문화로 헌병들을 눌러놓았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한바탕 고깃집을 휘저어놓고, 2차로 맥주집을 가기로 하면서 근처 거리에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거리에는 금연 표시가 떡하니 붙어있었지만, 변왕추 일행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고, 행인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렸지만,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아무도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변왕추가 그럴싸한 맥주집을 발견하고는 일행에게 말한다.
"어흐... 취하네.
야들아, 나는 말광이랑 돈 찾아서 따라갈테니까 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어.
말광아, 넌 나랑 은행에 좀 가자."
변왕추는 그렇게 박말광을 제외한 일행들을 보내고는 박말광을 데리고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 뒤, 변왕추와 박말광은 은행 앞의 편의점에 도착하고 변왕추는 박말광에게 돈을 찾아오라고 시킨 뒤, 자신은 편의점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태운다.
변왕추는 박말광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긴다.
입대 후에는 다소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과거 자신의 선임들이 그러했듯, 실세가 되고나서 부터는 자신의 세상이 도래했다.
왠 듣도보도 못한 아쎄이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해병 생활에 훼방을 놓기도 했지만, 이해 관계가 맞는 대대장을 이용해 그를 치워버리고 자신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오히려 그가 마갈곤 하사를 치워놓으면서, 그동안 그에게 상납하던 돈도 그대로 굳어 자신의 것이 되면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 전역때까지, 변왕추는 자신만의 천국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리라.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맞은편에 나타난다.
변왕추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한다.
"말광아, 이 씨밸럼아. 인기척 좀 내라.
형 놀랐잖아.
돈은 찾아 왔..."
박말광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왔다고 생각했던 변왕추는 맞은편의 인물을 보고 표정이 굳어진다.
"필승! 이병 쾌흥태. 변왕추 해병님을 뵙습니다.
설마 바깥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쾌흥태가 천연덕스럽게 변왕추의 맞은편에 그대로 앉는다.
"박말광 해병은 다른 일이 생겨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쾌흥태는 테이블에 무언가를 올려놓는다.
유리알이 깨지고, 테 곳곳이 부러졌으며, 군데군데 피가 묻은 안경이었다.
변왕추가 은행쪽을 살펴보니 어느 새 도착한 앰뷸런스 한 대가 해병대 전투복을 입고있는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를 황급히 싣고 있었다.
"저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봅니다."
쾌흥태는 태연하게 앰뷸런스쪽을 보며 말한다.
변왕추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쾌흥태에게 말한다.
"어... 흥태야, 니 휴가 아니었나? 근데 집에 안가고 아직도 포항에 있었네?"
"어쩌다 보니 여기서 할 일이 생겨서 남게 되었습니다."
변왕추가 조용히 쾌흥태를 노려본다.
"너는 어째 선임이 불편하지 않은가보네?"
"어떻게 감히 선임 해병님을 불편해 하겠습니까?
선임 해병님은 '불편한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아니겠습니까?"
"...넌 쒸불 그런 놈이..."
변왕추가 쾌흥태에게 무언가를 쏘아붙이려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쾌흥태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변왕추 해병님, 예전에 제가 드렸던 부탁 기억 하십니까?
변왕추 해병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가 전입 오기 훨씬 전, 이곳 6974부대에는 '불곰'이라고 불리우던 악질 선임 해병이 하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걸핏하면 후임들을 폭행하기 일쑤였다는데, 그들 중에서 특히 그 당시에 전입 온지 얼마 안된 한 아쎄이를 심하게 폭행하곤 했었다고 합니다.
얼굴과 눈가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길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변왕추의 얼굴에 나 있는 흉터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불곰'의 폭행이 유난히도 심했던 날, 갑자기 한 선임이 나타나 그를 제지했습니다.
'불곰'보다 한 기수 후임인 해병이었다고 합니다.
감히 선임을 건드리냐며 난리를 치던 '불곰'을 역으로 제압해 의병 제대를 시켜버리고 본인도 전출을 가게 되었지만, 그 아쎄이에겐 그의 모습이 세상 그 어느 해병들보다 존경스럽던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닮기 위해 끊임없이 힘을 기르고자 했었고 실제로 강해졌지만...
슬프게도, 어째선지 그는 존경했던 선임이 아닌 '불곰'의 모습을 더 닮아버리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쾌흥태가 말을 하는 내내 변왕추는 그저 일그러진 얼굴로 쾌흥태를 응시할 뿐이었다.
갑자기 변왕추의 전화기가 울린다.
전화기에 나온 발신자 정보를 살펴보니 대대장 곽말풍의 번호였다.
"필승, 병장 변왕추 전화 받..."
[변왕추 병장, 지금 부대 내부의 일이 다 위로 올라간 상태다.]
"...대대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너희들의 뒤를 봐줄 생각이 없다는거야.]
"..."
[이제부턴 알아서 해.]
전화는 그렇게 무심하게 끊어진다.
그 통화를 무심하게 지켜보던 쾌흥태는 넌지시 말한다.
"방금 대대장님 아니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신겁니까?"
쾌흥태는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왕추를 바라본다.
변왕추는 피가 거꾸로 솟는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한다.
"니가 꾸민거지...?"
잠시 표정을 굳히던 쾌흥태가 나지막히 말한다.
"변왕추 해병님.
제 바람은 말입니다...
그 해병이 부디 지금부터라도 '불곰'이 아닌 그 '전설'을 닮아가고자 하면 좋겠습니다.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필승!"
쾌흥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변왕추에게 경례를 한 뒤 자리를 떠나간다.
변왕추는 말없이 쾌흥태의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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