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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어느 바랑인 노병의 이야기(5편)

파르바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26 20:39:03
조회 217 추천 22 댓글 14

1편  2편  3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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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엘사는 한동안 눈을 감고 안나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은은한 향기가 안나의 코를 간질이자, 안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헉.


안나가 휘청이자 엘사는 고개를 들어 몽롱한 눈빛으로 안나를 쳐다봤다.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뺨과 유난히 붉게 보이는 입술이 안나의 눈에 들어왔다.

시민들이 뿌린 꽃 때문일까? 사방에는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향기인지 엘사의 향기인지 모를 향기 때문에, 안나는 더 이상 서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안나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폐...하, 피곤해 보이시는데... 좀 쉬셔야..."

"응...? 응... 졸립구나..."



침소로 돌아온 엘사는 안나의 다리를 베고 누운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느니, 오딘 얘기를 해달라느니 하면서. 안나는 엘사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면서 조곤조곤 얘기를 해줬다.


"...그래서 오딘 님은 미미르가 지키던 지혜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스스로 한쪽 눈을 바쳤어요. 그 대가로 오딘 님은 무한한 지혜를 얻게 되었답니다."


"으엑... 무서워. 너희 신들 얘기는 왜 그렇게 무서운 거야? 신들의 황혼 얘기도 그렇고..."

"네에~? 폐하, 저도 요한묵시록은 읽어봤다고요? 그게 더 무섭던데요?"


"헤에... 그런가...? 그나저나 잠이 안 오네... 피곤해 죽겠는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셔서 그래요. 피곤하신데 정작 머리는 핑핑 도니까 잠이 안 오는거죠. 근데 그 전에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는데요?"

"으응... 그렇지, 내 잠옷 좀 가져다줄래?"

"어... 네? 그게 어디에..."


안나는 친위대원이지, 시녀는 아니었다. 엘사의 시중을 드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엘사는 마치 여동생에게 부탁하듯이 안나에게 응석을 부렸다.


"안나아... 이거 입는 것 좀 도와줘..."


진한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잠옷을 안나가 가져오자 엘사는 옷을 입혀달라며 팔을 쭉 폈다. 안나는 별 생각 없이 예복을 풀어내렸다가, 얼굴이 시뻘개졌다. 점점 드러나는 엘사의 뽀얀 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안나는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를 엘사가 들었을까, 소스라치게 놀란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엘사는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끈 끊어진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는 엘사의 손목을 잡아 잠옷 소매에 밀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안나는 엘사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붙들고는 겨우겨우 잠옷을 입혔다. 안나의 가슴이 엘사의 등에 눌려 이지러지자 엘사가 묘하게 가쁜 숨소리를 냈다.


"다... 됐어요, 폐하. 이제 주무셔야..."

"응... 나 계속 잠이 안 와... 잠들 때까지만 여기 있어줘..."


안나의 품을 파고드는 엘사의 목덜미가 유별나게 희게 빛났다. 안나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입맛을 다시며 엘사의 콧잔등을 새끼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그러자 엘사는 잠들기는커녕, 안나가 쓰다듬을 때마다 살짝살짝 몸을 떨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안나는 손을 멈추고 엘사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주무세요."

"알았어..."


말로는 알았다고 했지만,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배 위에 얹었다. 별 수 없이 안나는 엘사의 배를 살살 문질러줬다. 엘사는 한참 동안 투정을 부리다가, 안나에게 한소리 듣고 나서야 겨우겨우 잠들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안나는 눈을 떴다. 이미 사방이 환했다.

일어나려던 안나는 뭔가가 제 옷 속에 들어와있는 걸 깨닫고 황급히 내려다봤다. 엘사는 안나의 옷 속에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아, 폐하가 분명히 나보다 연상 아니셨나..."


어린아이같은 엘사의 모습을 보자 안나는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면서 깨우자, 엘사가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여전히 엘사는 투정을 부렸고, 안나는 엘사가 씻고 단장하는 동안 계속 시중을 들어야 했다. 엘사는 잠이 깬 것 같았지만, 거꾸로 안나는 몽롱해졌다.


'하아, 피곤해... 근데... 향기 좋다...'


전날 밤, 엘사에게서 나던 향기가 계속 안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는 뽀얀 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홀린 듯이 안나가 엘사를 쳐다보자 엘사는 배시시 웃었다. 



11

"폐하, 급보이옵니다. 베네치아와 시칠리아가 둘 다 군대를 동원하고 있사옵니다."


사색이 된 마티아스 장군이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하필 이런 때에...!"

엘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로마의 주력 부대는 아나톨리아로 나가 셀주크와 싸우고 있었다. 서방 원정군을 새로 편성하는 건 엄청난 부담이었다.


"폐하."

크리스토프도 황제 앞에 부복했다.

"불확실한 정보이오나, 배후에 바르바로사 왕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소신이 서방 길거리에 나붙고 있다는 벽보를 입수했사옵니다. 참람되기 그지없사오나... 보셔야만 하옵니다. 서방인들이 어찌나 로마를 욕보이는지...!"

크리스토프가 황제에게 너덜너덜한 양피지 조각을 내밀었다. 양피지에 씌인 글을 읽던 황제의 표정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게르만 참칭자들이 감히...!"


엘사는 양피지를 구겨버렸지만, 크리스토프는 재빠르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리스 참주를 응징하자'니, 이보다 불경할 수는 없사옵니다!"


"뭐, 뭐요!!!!!!"

끝내 카이 총대주교가 노성을 터뜨렸다. 총대주교마저 분노하는 마당에, 다른 로마인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문단의 서방인들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폐하, 이자들을 그냥 둬서는 아니되옵니다. 철저하게 응징해야만 하옵니다. 친위대를 보내서 로마의 힘을 보여줘야만 하옵니다!"

한스가 나아가 주청을 올렸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그 말에 동의했다.


"폐하, 수도 방위는 친위대가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옵니다. 오히려 곧바로 친위대를 동원해 서방놈들을 빠르게 분쇄하고, 아나톨리아에서 개선할 라스카리스 공을 예비대로 재편성, 서방에 투입해 친위대와 교대시켜야 하옵니다."


엘사는 이마를 짚었다. 당장 서방원정군을 편성하는 것은 어려웠다. 불가리아 군을 동원했다가 이들의 입김이 세지면 그것 또한 문제였다. 결국 엘사는 마티아스를 서방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그나르 이하 1만 바랑인 친위대를 안코나로 급파했다.


하지만 안나만큼은 예외였다. 전의에 불타오르던 안나였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엘사가 안나를 붙들자 도저히 출정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걱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엘사는 건드리면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보였다. 안나는 그저 엘사를 곁에서 붙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크리스토프는 킬킬대며 웃고 있었다.

한스도 씨익 웃고 있었다.

파비는 프랑스와의 국혼을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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