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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어느 바랑인 노병의 이야기(3편)

파르바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19 18:48:16
조회 236 추천 23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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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제가 블라케르네 궁으로 돌아오자 겔다가 저녁상을 내왔다. 마늘과 양파, 송로버섯으로 속을 채우고 가룸을 발라 구운 양고기, 짭짤한 페타 치즈, 장미수에 꿀을 탄 로도멜리, 우유에 꿀을 탄 멜리갈라가 차려졌다. 


'어...?'

저녁상을 본 안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나같이 안나가 몹시 좋아하는 음식들 뿐이었으니까.


"양고기 좋아한다고 했었지? 한번 먹어봐, 맛있을거야."

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음식을 권했지만, 안나는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그걸 언제 말씀드렸지...? 더구나 이걸... 나 때문에...?'


엘사를 바라보는 안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전에도 황제가 자신에게 속내를 드러내거나, 신경을 써준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유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는 질투를 살 수밖에 없으니까. 더구나 안나는 이방인인데다, 공녀였고, 결정적으로 이교도였다.


'마귀들린 외국 공녀가 황제를 홀렸다'


이런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안나뿐만이 아니라 엘사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사는 그저 멜리갈라를 홀짝일 뿐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지만, 이내 엘사가 말을 꺼냈다.


"...너는 내가 누구랑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안나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뭐라고 대답을 해보려고 했지만, 안나를 바라보는 엘사의 눈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황제의 얼굴을 보자, 안나는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당황한 안나는 결국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겨... 결혼을 하고 싶으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지, 라는 말이 안나의 얼굴에 씌인 듯했다. 엘사는 안나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든 엘사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싫어.

서방 야만인들도 싫고, 이리떼같은 로마 귀족들도 싫어.

근데 아무도 안 말리잖아...!"


안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말릴 수도, 권할 수도 없었으니까. 어느 새 안나는 엘사의 손을 붙들고 다독여주고 있었다. 무엄한 행동이었지만, 뜻밖에도 효과가 있었다. 덜덜 떨리던 황제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아.

폐하도 나처럼 고립된 신세구나.


어딘지 모르게 황제가 자신과 겹쳐보였다. 그 순간 안나는 이게 베르단디께서 정해준 운명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폐하의 창과 방패가 되어드려야겠구나.



6

"그래, 한스 공. 셀주크의 동향은 어떻소?"

"흠, 확실히 예전만 못합니다. 이 참에 이교도들을 아나톨리아에서 싹 쓸어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흐음... 그렇단 말씀이군..."


크리스토프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스의 말대로라면, 제국의 동쪽은 당분간 큰 걱정이 없을 테니까.


"미리오케팔론의 패배는 뼈아프지만, 그래도 그 이후 선제께서 다시 셀주크를 격파하셨으니, 당분간 저 이교도들도 날뛰지 못할 겁니다."


한스가 거들자,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오히려 심각해졌다.


"공의 말씀대로라면, 서방 야만인들은 더 설쳐대겠구만..."


한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문단원을 고깝게 보는 건 크리스토프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자문단은 대부분 서방인들이었고, 로마인 신하들은 평소에 무시하던 서방인들이 로마에 간섭하는 것을 엄청난 굴욕으로 생각했다.


"지난번에 파비가 지껄여댄 말이 현실이 되기라도 한다면, 로마는 끝장이오. 어디서 서방 야만인 따위가...!"

"크리스토프 공, 그건 막아야만 합니다. 어차피 명가는 로마에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명분은 있어야 하오. 혼사 정도야 총대주교님 말씀도 있으니 막기는 쉽겠지. 문제는 저 야만인들의 존재 그 자체요. 저놈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쓸어버리려면 명분이 필요해...!"


"그놈들은 어차피 황제폐하 외엔 믿을 구석이 없지 않습니까? 적당한 구실을 붙여 체포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너무 위험하오. 그랬다가 일이 틀어지면... 만약에 바랑인 친위대라도 출동해 보시오. 그러면 우린 전부 죽은 목숨이오."


"하아... 친위대를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지, 어떻게든 그들을 밖으로 내몰아야겠어.

한스 공... 미안하지만, 악역을 맡아줄 수 있겠소? 이것도 다 로마를 위하는 길이오."


*******************


"폐하, 더 이상 결단을 미루시면 아니되옵니다."

성경 강독을 마친 총대주교가 황제 앞에 꿇어앉아 또다시 주청을 올렸다. 주름진 총대주교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선제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소신께 온 힘을 다해서 폐하를 보필하라고 당부하셨사옵니다. 그리고... 제 명은 그다지 길게 남지 않았사옵니다. 저를 봐서라도...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소신 카이 그린, 폐하께 드리는 마지막 간청이옵니다."


부복한 총대주교를 황제가 직접 일으켰다. 충신의 간곡한 부탁을 엘사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세요, 총대주교님.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조만간 국혼을 추진할 겁니다."


비로소 총대주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황제도 미소로 화답했지만, 엘사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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