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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Say You Love Me 23

버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8.24 12: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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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업 합 니 다








아침부터 세차게 비가 내렸다. 며칠 전부터 안나와 함께 놀이공원 방문할 계획을 세워뒀던 엘사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자마자 기운이 빠졌다. 야외 활동을 즐기지 않는 엘사로선 정말 큰 맘 먹고 세운 계획이었는데, 안나에겐 별다른 설명 없이 시간 비워두란 말만 해둔 게 조금 다행이다 싶었다. 미리 말해뒀으면 기대했을 거고 또 실망했겠지... 회전목마, 대관람차.. 내키진 않았지만 지난 며칠간 안나가 좋아할 법한 로맨스 영화들을 몇 편 찾아보고 분석한 결과론 안나를 방방 뛰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코스였다. 쪽팔린 짓이란 생각은 했지만 밤중의 대관람차 탑승은 절대 잊지 않도록 메모하고 별표까지 쳐뒀다. 엘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망할 일기예보. 맞은 적이 없어. 데리고 가면 좋아.. 했을 텐데. 엘사는 소풍 날 아침 빗방울을 발견한 꼬마처럼 침울해져 있는 자신을 느끼고 조금 놀랐다. 내키지 않았던 건 맞나? 엘사는 누구에게도 들킬 위험 없는 제 마음속 생각조차 인정 못 하고 자존심 상해하고 있다는 게 문득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엘사는 단순히 안나를 위해서 놀이 공원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안나를 제게 빠지게 할 계획도 어느 순간부턴 잊고 있었다. 엘사는 이젠 그저 안나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그냥... 보고 있으면 내 기분도 좋아지니까.



“다음에 가면 되지... 응?”



안나는 내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시간.. 많은 거 맞지? 엘사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나른히 한숨을 내쉬었다.





*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급하게 찾은 실내 식물원에서 안나와 후덥지근하고 싱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엘사는, 저녁을 먹으러 온 식당 앞에서 안나가 턴 우산에 물벼락을 맞고서야 오늘은 망한 날임을 느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망한 건 아닌... 데- 쟤가 왜 여기 있어? 엘사는 자리를 안내받던 중 몇 자리 건너 테이블의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라 안나 뒤로 숨었다. 여자도 엘사를 알아본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망한 날이구나.



“여기 별로다. 다른데 갈까?”


“왜요? 분위기 좋은데.”



안나가 콧방귀를 뀌고 자리에 앉자 엘사는 입술을 깨물며 맞은편에 앉았다. 억지로 끌고 나가며 소란을 피우기엔 식당 안이 너무 조용했다. 엘사가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여자를 향해 슬쩍 눈을 굴렸는데, 여자는 엘사와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눈을 뗀 적이 없는지 엘사가 흘긋이는 순간 바로 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여자가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에게 무어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엘사는 의자에 앉은 채로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엠마”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자 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 저를.. 아시나요?”



엘사가 밝은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자, 여자와 안나는 멍하니 엘사를 바라봤다. 잠시 굳어있던 엘사는 콧바람을 킁킁 불며 체념한 듯 말했다.



“장난이야. 티파니.. 오랜만이다.”


“데이나야.”


“응, 그것도 장난이야.”



장난이 아니었다. 이름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여자가 누구고 엘사를 어떻게 귀찮게 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데이나를 처음 만난 건 1년 전쯤이었다. 한창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닐 시기였고, 대놓고 하룻밤 만남 찾는단 티를 팍팍 내고 다녔기에 상대와 굳이 관계 정리를 해 두진 않았다. 이름도 가명만 대고 다녔는데 대부분의 상대는 그게 가명인 걸 아는 눈치였음에도 엘사와 비슷한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뒹굴어줬다. 하지만 안나도 그랬듯.. 가끔 이런 사람도 있었다. 데이나는 엘사가 바라는 것 이상을 기대하는 것 같은 눈치였던 탓에 엘사는 침대로 가기 전 미리 말해뒀다. 깊게 만날 생각 없으니 알아서 선택하라고. 데이나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알겠다고 했다. 망설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데이나와의 잠자리가 마음에 들었던 엘사는 그 날 이후로도 서너 번쯤 더 만남을 가졌는데, 데이나는 그걸 어떤 신호로 여겼는지 여자 친구 자리라도 꿰찬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주말에 어디 갈까? 아까 그 여자 누구야? 문자와 전화가 수십 통씩 쌓였고 엘사에겐 그런 짓을 견뎌 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첫 만남부터 2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엘사는 문자 한 통을 남기고 데이나를 차단했다.


엘사는 그렇게 데이나를 잊었다. 하지만 데이나는 엠마를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데이나는 말없이 엘사를 노려보고 있었고 슬슬 무슨 상황인지 알아챈 듯 보이는 안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엘사를 보고 있었다.


과거에 데이나와 어떤 합의하에 만났건, 그 합의에도 불구하고 데이나가 어떤 식으로 집착하며 엘사를 괴롭혔건, 데이나는 진심이었고 이를 무시한 엘사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엘사는 전혀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욕먹을 수도 있는 짓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정이 어찌 됐든 남들이 보기엔 진심을 무시한 쪽이 나쁜 사람이지. 진심인 여자 몇 번 데리고 놀다 차단에 잠수? 요약해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쓰레기의 전형이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쁜 사람으로 보든 말든, 이렇게 생겨 먹은 날 두고 쟤 혼자 난리 친 걸 어쩌란 말인데. 하지만 안나 앞에선? 엘사는 데이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과거를 좋게 포장할 생각은 없지만 안나 눈앞에서 까발려지는 꼴은 또 견딜 수 없었다. 죄책감? 그딴 거 알 게 뭐야. 엘사는 단지 안나가 제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 싫을 뿐이었다. 엘사는 데이나를 빨리 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엘사는 다시 한 번 특기인 덮어두고 미루기를 시전 하기로 했다. 엘사는 안나와 데이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일어났다.



“화장실 좀.”



정말 정신 나간 미친 스토커 아닌 이상 설마 안나 붙잡고 헛소리 지껄이진 않겠지. 갔다 오기 전까지 알아서 꺼져있어라. 엘사는 데이나인지 티파니인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자리를 떴다. 그렇게 화장실로 들어와 거울 보며 한숨 돌리자마자 데이나가 따라 들어왔다. 엘사는 가볍게 얼굴을 구겼다. 여기 있으면 안나 붙잡고 헛소리는 안 할 테니 그나마 다행... 은 뭐가 다행이야?! 바로 따라 들어온 거 보고 안나가 무슨 생각 하겠어? 좀 멍청하다지만 걔도 눈치가 있는데. 엘사는 잔뜩 얼굴을 구겼다. 엘사는 데이나를 한 번 노려봐주곤 거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곤 괜히 머리를 정돈하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마.”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처럼 굴어놓고 잘도 뻔뻔하게 나오네.”



엘사는 코웃음을 치고 데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번 잔 걸로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됐던 것처럼 구는데...”


“그런 말이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우리 같이 영화 본 적 있어?”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


“같이 저녁 먹은 적은? 뭐, 한두 번?”



데이나는 대답 없이 얼굴만 찌푸렸다.



“내 침대에서 일어난 적은? 없지? 애초에 내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잖아?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거, 맞네.”


“그렇다고 그렇게 잠수 타는 게 맞아?”


“잠수? 난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히 말했어. 깊게 만날 생각 없고 이제 연락 안 할 거라고. 네가 그렇게 귀찮게 구는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해줬어야 해? 잘 대해주길 원했으면 미친 사람처럼 굴지를 말았어야지.”


“어이가 없어서..”



데이나는 기가 찬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쟤는 뭐니? 어린 애 데리고 노는 꼴을 내가 봐야겠어? 싫증 나면 또 문자 남기고 잠수 탈거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애 같은데.. 정말, 가슴이 아프다.”



엘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솔직히 말해서 안나가 하던 짓은 데이나가 하던 짓과 비슷했고 머릿속에선 어렴풋이 그들 모습이 겹쳐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나는 데이나가 아니었다. 데이나 대하듯 안나를 모질게 내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엘사는 안나에게 매정히 굴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안나는 머릿속이 궁금할 만큼 해맑고 순수했고 성격 탓에 티는 못 냈지만 엘사의 잠재된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엘사는 안나를 돌봐주고 싶었다. 걔한테 상처 주느니 내가 상처받는 게 낫지.. 안나와의 일로 상황을 상상해보니 갑자기 데이나에게 못 할 짓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차단 통보 문자를 받고 우는 안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얘도 내 문자 받고 울었을까? 울고 있는 안나 모습에 겹친 데이나도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부 엘사의 생각 일 뿐이었다. 안나는 이제 제게 매달리지 않았다. 매정히 군다고 안나가 상처받을까? 아직도 나랑 헤어지고 싶어 하느라, 오히려 좋아하는 건 아니고?


짜증이 난다. 저녁 먹으러 와서 이게 뭐야? 네가 쓸데없는 생각 하게 만들어서 기분 다 잡쳤잖아. 복잡한 생각 할 필요 없었다. 엘사는 데이나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고 데이나는 안나가 아니었다. 네가 뭔데 멋대로 안나를 데리고 놀다 버릴 거라고 생각해? 말도 못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 가정엔 유독 죄책감이 들었다. 남들 눈에만 그리 보일 게 아니라 정말 쓰레기가 된 기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 데이나에겐 매정한 태도를 보이는 게 마땅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네 상대나 걱정해. 버려두고 와서 다른 사람한테 질척대고, 참 예의도 없다.” 엘사는 데이나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밀었다.


“할 말 다했으면 빨리 나가. 난 일 좀 봐야겠으니까.”



데이나는 엘사를 노려보며 잠시 바들바들 떨더니 쿵쾅 이며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이 정도 했으면 쪽팔려서라도 식당 뜨겠지. 데이나를 다시 보기 싫었던 엘사는 다시 거울을 보며 잠시 시간을 죽이다 나가기로 했다.





한편, 메뉴판을 두드리며 엘사를 기다리고 있던 안나는 딱 봐도 억지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온 데이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곧바로 엘사를 따라갔을 때부터 언짢았는데 혼자 나와서 또 제게 다가오니, 안나는 억지로라도 웃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엘..- 엠마.. 는요?”


“큰일 보고 있어.”


“뭔...”



안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데이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티는 안 냈지만 안나도 눈치는 있었다. 사실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는 알아챌 것이다. 이름도 잘못 알고 있는데다가 둘 사이 짧게 오간 대화, 묘한 공기.. 그냥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안나는 엘사와 만나자마자 침대로 간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놀았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과거의 부산물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마주친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데이나가 무슨 속셈인지 계속해서 생글거리며 눈을 맞추려 하자 안나는 데이나의 눈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을 만큼 기분이 나빠졌다. 데이나는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는 둥 어색한 첫 만남의 정석 대사를 줄줄 늘어놨고 안나는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내며 대답 없이 데이나를 노려봤다. 비 오는데 어쩌라고? 데이나는 안나가 시종일관 입을 꾹 닫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었고, 곧 한 술 더 떠 아예 엘사 자리의 의자를 빼고 털썩 앉아버렸다.



“왜 앉아요?”



데이나는 잠시 안나의 얼굴을 살피듯 훑어보더니 안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너, 엠마랑 무슨 사이니?”


“무슨 상관이야.”



안나는 테이블 중앙까지 기어 나온 데이나의 머리통을 물 잔으로 슬쩍 치며 사납게 말했다. 실수인 척 치려고는 했지만, 누가 봐도 고의였다. 데이나가 당황한 듯 고개를 들고 물러나자 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엄청 까칠하네.” 데이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냥 네가 걱정 돼서 이러는 거야.”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요.”


“넌 쟤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앤지 몰라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이번엔 안나가 데이나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쓰레기라니? 데이나와 엘사 사이의 일이 대충 짐작되긴 했지만 안나가 아는 바론, 엘사는 조금 나사가 빠졌을진 몰라도 쓰레기 소리 들을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쪽이 뭘 잘못했겠지!



“지금 이러는 건 뭐 예쁜 쓰레기 짓? 차이고 질척대는 거 진짜 쪽-팔-려- 우에에에엑-”



안나는 손가락으로 눈 밑을 뒤집어 까며 혀를 내밀었다. 좀 유치했나? 그래도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안나의 기습에 데이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데이나는 아랫입술을 이리저리 깨물어대더니 얼굴에 손부채 질을 했다.



“몇 살이니? 12살? 너나 쟤나 쌍으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잘 어울리네.”


“응, 그쪽보단 훨씬 잘 어울리니까 괜한 걱정 말고 빨리 가요. 물 쳐맞기 싫으면.”


“뭐? 해 볼 테면 해봐.”


“진짜?”



안나는 물 잔을 손에 쥐고 몸을 움찔거렸다. 그냥 한 말인데.. 진짜 해도 되나?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드라마에 맨날 나오잖아.



“해 봐. 내가 너 가만두나 보-”


“한다? 진짜 뿌린다?”




이쯤이면 갔겠지. 5분쯤 버티다가 화장실에서 나온 엘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리 잡았던 테이블로 고개를 돌린 순간, 무슨 일인지 안나가 마주 보고 앉은 데이나의 얼굴에 물을 끼얹는 광경을 목격했다. 쟤는 또 왜 저러고 있어?! 엘사는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물 맞은 데이나는 눈을 감은 채로 멈춰버렸고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나는 그렇게 한 5초를 멈춰있더니 야수처럼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엘사가 후다닥 달려갔지만 조금 늦었다. 데이나가 뜻을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안나에게 달려들자 안나는 데이나의 머리통을 손으로 밀며 씩씩거렸다.



“하라며! 니가 하라며!”


“안나!! 왜 이래!”



엘사가 안나의 허리춤을 끌어당기며 말려봤지만 제게 붙잡힌 안나가 힘 못 쓰고 데이나에게 한 대 얻어맞는 꼴을 보자마자 바로 손을 놔버렸다. 어차피 싸울 거면 이겨라.. 엘사가 손을 놓자 튕겨져나간 안나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위에 있던 식기가 와장창 떨어졌다. 뜬금없이 벌어진 일에 상황 파악 못 한 채로 다른 손님들과 함께 멍청히 보고 있기만 하던 웨이터들이 그제야 한꺼번에 몰려들어 둘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둘은 웨이터들에게 잡혀서도 팔다리를 막무가내로 휘저으며 꽥꽥 소리를 지르더니, 결국 출구까지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아니-, 저, 잠깐만요! 전 아무 짓도- 가방이랑 우산은..!”



안나 곁에 붙어 데이나에게 야유하던 엘사까지 끌려 나갔다. 난 응원만 했는데 왜 팔다리 다 잡고 끌고 나가? 식당 손님들의 시선이 온통 질질 끌려가는 제 모습에 박혀 있는 것을 느낀 엘사는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아 버렸다.


쫓겨나고서도 식당 입구 앞에서 소리 지르고 다투기를 몇 분, 뒤처리를 하고 온 듯한 데이나의 식사 상대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데이나를 데려가고서야 직원들은 쯧쯧거리며 손을 털고 물러났다. 엘사와 안나는 입구의 차양 밑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데이나가 떠나는 것을 보고도 한참을 씩씩대던 안나가 바닥에 우산을 내던지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엘사가 제 가슴팍을 손으로 짚은 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내가 할 말 아냐? 너야말로 왜 그런 건데?”


“저 여자가 시비 걸잖아요!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독을 품은 거냐고요!”


뭐라고 설명하지? 말하기 싫은데. 엘사는 대답 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같이 잤죠? 자고 찼죠?”



알고 있네.. 안나가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르르 떨자 엘사는 난잡했던 과거에 후회를 느꼈다. 어떻게 포장해서 말하든 좋은 일로 보이진 않을 테고 안나는 실망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실망할 거, 솔직하기라도 해야지. 엘사는 한숨을 내쉬고 데이나와의 일을 힘없이 읊었다. 성난 듯 솟아있던 안나의 눈썹은 엘사가 말을 할수록 축축 늘어지더니 말을 마치고 나선 어쩐지 울적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안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나빴어? 쓰레기 같아? 엘사는 우물쭈물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나- 난 미리 말 해뒀어. 근데도 짜증 나게 굴길래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안나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안나?”



엘사가 안나의 손목을 잡자 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엘사와 눈을 맞춰주진 않았다.



“..내..-”


“응?”


“내가 한 짓이랑 뭐가 달라요?” 안나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깔려있었다. “...나도 그렇게 짜증 났어요?”



안나는 왠지 모르게 울고 싶었다. 안나는 더 이상 전처럼 굴진 않았다. 엘사가 그렇게 짜증 난다고 하는 집착과 귀찮음 세례를 퍼붓는 짓을 관둔 건 꽤 지난 일이었다. 하지만 전에 했던 건, 저 여자가 했던 짓하고 별다를 게 없는데.. 그땐 날 두고도 짜증난다 생각했을까? 데이나와 저가 다른 점은 육체적 경험의 유무뿐인 듯했고 엘사가 당시의 제 행동을 동정심이나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참아왔을 거란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도 몹시 서글펐다. 거기다 앞으로는 어떤데? 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최근, 엘사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슬슬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다 심기 건드리면 나도 저 여자처럼...


엘사와 시간을 보낼 때, 안나의 가슴 속은 잠잠했다. 인상 깊게 본 연애 소설의 한 구절처럼 심장이 괴로울 지경으로 쿵쾅이는 일은 없었다. 안나가 ‘이런 게 사랑이지’하며 보고 읽어온 강렬함보단 일상 같은 잔잔함이 느껴졌다. 생략해도 사는데 문제없을 정도로 작고 잔잔하기만 했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초라한 느낌 아닌가? 그런데 왜 헤어지기 싫은지 모르겠다. 왜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엘사가 이런 생각까지 집착으로 여길 수 있겠다싶으니 도저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엘사가 안나의 턱을 잡고 눈을 맞췄다.



“무슨 당연한 소릴 하는 거야? 맨날 말했잖아. 너 짜증난다고.”



엘사가 말하자 안나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긴 했지...



“짜증 나는데 왜 계속 받아줬어요?”



경험도 없는 애 침대로 끌고 간 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책임져 줘야 할 것 같아서? 안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엘사는 벌컥 화를 냈다.



“차라리 더럽게 놀았다고 화를 내면 몰라... 왜 그런 생각을 해? 너랑 쟤가 같아? 내가 고작 책임감 때문에 네 난리 다 받아준 것 같아?”


“뭐.. 뭐가 다른데요...”


“뭐가 같은데? 같은 점이라곤 짜증난다는 것밖에 없고 짜증나기만 했으면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얼씨구나 보내줬지.” 엘사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왜 중요한 건 쏙 빼고 기억하는 거야? 내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엘사는 안나의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목과 어깨를 차례로 쓸어내리더니, 안나의 손을 잡고 가볍게 쥐었다.



“나, 사랑을 비를 타고 다시 봤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이해가 안 돼. 좋으면 좋은 거지 왜 비 맞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데? 우산이 없었으면 몰라. 멀쩡한 우산 들고 비 맞는 건 그냥 미친 사람이잖아.”


“...좀 미치면 어때요. 로맨틱하잖아요.”


“... 이해가 안 돼....”



엘사는 잠시 안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곤 갑자기 차양 밖으로 뒷걸음질치며 안나를 끌어당겼다. 굵은 빗줄기가 순식간에 둘의 온몸을 적셔버렸다.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힌 안나가 입을 뻐끔이자 입안으로 빗물이 줄줄 들어왔다. 안나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푸푸 소리를 내자 엘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엘사는 안나의 얼굴에 들러붙은 푹 젖은 머리칼들을 몇 번 쓸어 넘겨주며 안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책임?” 엘사가 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 좋으라고 비까지 맞아주는 사람 두고 왜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엘사가 이마를 맞대고 말하자 안나는 잠시 침을 꼴깍이더니 엘사의 등과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졌다. 빗속에서 저런 말 하는데 어떻게 참아? 안나가 반쯤 감은 눈으로 엘사를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틀으니 엘사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안나 것에 붙어왔다. 안나는 식사를 마친 식당 손님들이 몰려나와 웅성거리기 전까지 엘사와 빗속에서 한참 입을 맞췄고, 그날 밤, 질질 흐르는 콧물을 닦느라 잠을 설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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