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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Say You Love Me 24

버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20 03: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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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나는 멍 때리고 있는 일이 잦았다. 수업 시간에도 멍, 밥 먹을 때도 멍, 심지어 머리 좀 식히겠다고 빌려 탄 자전거에 앉아서까지 멍 때리다 나무에 처박혀 몇 바퀴를 굴러놓고도 무슨 일 있냐는 물음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말로 대충 무시했으니, 참다못한 라푼젤이 날 잡았다는 듯 안나의 머리통을 흔들며 집착 심문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근데 내 생각도 다 정리 못 하고 무슨 말을 해? 안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낑낑 소리만 냈고 아무리 흔들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라푼젤은 지원군까지 불렀다. 안나는 라푼젤과 제인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카페로 연행되고 말았다.



“쟤, 또 누굴 만나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정신 나갈 일이 있겠어?”


“무슨 소리야. 안나가 누구 만난다고 정줄 놓은 거 본 적 있어? 무슨 일만 있으면 종알종알 다 늘어놓던 애가 입 다문 거 보면 뭔가 잡혀갈 짓을 한 거겠지.”


“잡혀가다니..?”


“약을 팔았거나.. 사람을...”



안나를 앞에 앉혀두고 신나게 입을 털던 제인과 라푼젤은 침을 꼴깍이며 안나를 바라봤다.



“죽였다던가....”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안 죽였거든?”


“그런데 요즘 왜 그래?”



안나는 할 얘기가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안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만나는 상대의 장단점을 하나씩 꼽으며 친구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보고했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남자를 갈아치워 댔을 시절엔 친구들의 생각 따윈 신경 쓴 적도 없었다. 작작 좀 하란 소린 좀 듣긴 했지만 뭐라 한들 맞는 사람 찾아 헤매는 게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연애는 이상하게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만나게 된 계기는 둘째 치고 그렇게 남자 찾아다니다가 이젠 여자까지? 하다하다 안되니 성별 범위까지 넓혀버렸구나? 무슨 소리 들을지는 뻔했고 과거 전적을 봤을 땐 들어도 싼 말이었다. 여전히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리 들을 걸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 가볍고 한심하게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여자까지?’ 아무도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왜 혼자 그런 상황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쪽팔린지. 연애에 미친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또 영영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 떼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엘사와 자고 나선 이제 이 일은 영원히 혼자 묻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야, 그땐 헤어질 생각이었으니... 엘사와의 관계를 아는 건 한스 뿐이었고 얘기 상대도 그 뿐이라 한스는 한동안 안나에게 시달렸다. 그마저도 그놈의 고무장갑 첫날밤 이후론 어쩔 수 없이 입을 닫아버렸다. 오빠한테 그런 얘길 어떻게 해.. 그동안의 연애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수준으로 고민은 쌓여 가는데 얘기 상대는 없으니, 안나는 앓아누울 지경으로 속이 답답했다. 아, 나 이러다 죽겠어. 내가 왜 혼자 끙끙 앓아야 해? 갑자기 화가 불쑥 치밀었다. 여잔데 뭐 어쩌라고??? 죽을래?? 아직 입도 뻥긋 한 적 없는 제인과 라푼젤은 안나의 상상 속에서 싹싹 빌며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안나는 제 손목을 잡고 보채는 친구들을 노려보며 침을 꼴깍였다.



“...나 했어.”



그리곤 툭 내뱉었다. 손 놓고 바른 자세로 앉아 경청할 것을 예상했으나, 친구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잠시 굳더니 곧 꺅꺆꺅 온갖 호들갑을 떨며 안나의 팔을 앞뒤로 정신없이 당기고 돌리고 난리가 나버렸다.



“아, 우리 안나가 드디어..! 아!!!”


“나 울 것 같아. 봐봐, 눈물 보여? 보이지?”


“조용히 좀 해..!”



안나가 제 팔을 뽑을 듯 흔들어대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며 속삭였다.



“그래서, 누군데? 어땠는데?”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언제부터 만났어?”



안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친구들의 머리를 테이블 중앙으로 모아 그동안의 일들을 은밀하게 보고했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엘사가 어떤 사람이고 첫날밤이 어땠는지, 헤어지려고 했던 일과 요즘의 만남이 어땠는지까지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놨다. 제인과 라푼젤이 얘기 중간중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안나가 엄한 호통으로 말을 막았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 아니었고, 그런데 또 이상하게 자꾸 생각난다는 말까지 마치고서야 고개를 든 안나는 ‘어디, 이제 말 좀 해봐’ 표정을 짓고 친구들을 바라봤다. 여자까지? 이 말부터 나오면 죽빵이다. 굳은 표정으로 안나를 한참 바라보고만 있던 라푼젤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너 어디 문제 있어?”



여자 소리는 안 나왔는데... 이건 뭐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니... 다 이상하잖아. 만나자마자 사랑한댔다가 잠자리가 별로라 사랑이 아니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야?”



안나가 그렇게 걱정했던 성별 문제는 문제 축에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게 듣기 좋은 소리인 건 아니었다. 안나에게 사랑을 가르친 건 라푼젤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이해해줘야지!



“네가 그랬잖아. 사랑하면 같이 잘 때 불꽃이 튀고 음악이 흐른다고. 사랑... 아니잖아..?”



가만히 앉아만 있던 제인이 안나의 말을 듣자마자 라푼젤의 코를 후려쳤다.



“니가 애를 다 망쳐놨어!!”



얻어맞고도 할 말이 없는지 라푼젤은 코만 몇 번 문지르고 말았다. 씩씩거리는 제인을 겨우 진정시킨 라푼젤은 흔들리는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잘 들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노래가 어디서 갑자기 흐르겠어? 무슨 마법 세계도 아니고.. 너 어디 모자라? 이런 것까지 다 설명 안 해준 내 잘못? 죄책감 들려고 한다. 미칠 것 같아...”


“나도 알아! 내 머릿속이 그렇게까지 꽃밭인 줄 알아?”


“알면서 왜 그래?”


“그래도... 머릿속에선 흘러야 하는 거 아냐? 노래가 안 나와도 들리긴 해야 할 거 아니야.”


“꽃밭 맞고만.. 무슨 헛소리야 진짜.”



안나는 입술을 깨물고 라푼젤을 노려봤다. 안나도 알았다. 침대로 들어갔다고 갑자기 로맨틱한 음악이 흐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격하대도 불꽃이 튀고 침대가 무너질 리는 없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적어도 그런 ‘기분’은 들어야 했다. 이런 소리 해봤자 욕이나 한 바가지 들을 건 알았지만 반평생 그 일만을 보고 살아온 안나에겐 그 기분이란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엘사가 보고 싶고 계속 생각났지만 그걸 두고 사랑이란 생각을 하자니 그간 꿈 꿔온 게 다 헛짓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로맨틱한 음악과 불꽃과 장미가 가득했던 꿈속의 사랑이 양말과 고무장갑으로 바뀐다. 씨발, 장난해? 내 사랑이 그딴 꼴이라니. 문제는 침대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엘사와는 평소에도 그리 알콩달콩 달달한 사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입만 열면 투닥이는 편이었다. 안나는 사랑을 그런 모습으로 상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왜 계속 생각나는 건데?


아.. 머리 아파. 사랑이 대체...



“안나, 그 사람 되게 괜찮은 사람 같은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인이 입을 열었다. 안나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그럼 다시 해보지 그래?”


“다시 했는데 또 별로면 어떡해?”


“그럼 또 해”


“장난하냐? 아주 죽음의 트라우마를 남겨주려 하는 구나.”



안나는 처참하게 망해 버린 지난 일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야, 얘 말은 다 잊어.” 제인은 라푼젤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 말했다. “하면서 맞춰가는 거지 어떻게 처음부터 잘 맞아? 불꽃 같은 소리하네.. 헛소리 말고 그냥 다시 자 봐. 헛생각하니까 별로였던 거지 머리 비우고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좀 더 지나면... 그래, 그놈의 불꽃 터지는 기분 들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아니면?



“...또 별로면 진짜, 진짜로 사랑이 아닌 거잖아? 난... 헤어지기 싫은데.”



생각 회로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게 분명한데 뿌리부터 잘못된 탓에 콕 집어 지적해주기도 어렵다. 그래서 제인과 라푼젤은 그냥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계속 만나면 되잖아.”


“사랑이 아닌데 어떻게 계속 만나?”



어쩌라는 거지? 이건 뭐 돌림노래도 아니고. 라푼젤이 안나의 얼굴을 겨냥해 주먹을 쳐들었다. 진짜 개헛소리만 쳐하고 있어!



“참아, 참아.”



제인이 라푼젤의 팔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렸다.



“아, 개답답해!”



부들부들 떨며 등을 기대고 앉은 라푼젤은 가슴을 퍽퍽 치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섹스가 사랑이야? 얘기 들어보면 빠져도 벌써 푹 빠졌고만 그놈의 섹스, 섹스!!!”


“나야말로 개답답하거든?? 다 네가 알려준 건데!”


“내가 언제! 몇 시 몇 분 몇 초!”


“와... 애도 아니고.”


“애는 너지, 이 썩은 섹스 애새끼야!!”



안나와 라푼젤이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자 제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들 딴엔 소리 죽여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째 특정 단어를 말할 때만 힘이 들어간 탓에 무한 섹스 중얼거림을 주고받고 있는 걸로 보였다. 섹스섹스불꽃섹스사랑섹스.... 이게 성인들 대화냐? 너희 둘 다 참 애새끼다. 제인은 둘을 지켜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


안나가 원하는 것은 영화 같은 사랑이었다. 엘사로선 영화 같다는 말을 붙이지 않고 안나가 원하는 사랑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빗속에서의 키스, 웃으며 꽃밭을 뒹구는 연인, 침대가 부서져라 사랑하는 두 사람.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비 맞으면 젖어서 추운 몸이 아프다. 생각 없이 꽃밭 뒹굴다간 흡혈 진드기한테 잘못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엔 저지른 일의 후폭풍이 나오지 않는다. 가끔은 재미 삼아 해볼 수도 있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 일을 늘 벌일 수는 없었다.


안나는 제가 꿈꾸는 사랑을 맛보려면 먼저 평범하고 지루한, 가끔은 잔뜩 화도 낼 길을 함께 걸어야만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사랑이 좋기만 하다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하며 구린 기억을 지워버린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사랑.. 좋지. 하지만 얼마나 좋은지 알면서도 그저 좋기만 하다는 헛소리는 못 하겠다. 그런 꿈만 꾸다가는 현실의 사소한 갈등과 다툼에도 발에 치인 개처럼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든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함께하는 길이니 당연한 과정이건만 환상에 젖어 있으면 그조차도 알고 있던 세상이 뒤집힌 듯 버거워한다. 머리와 마음이 뒤집히기도 한다. 내가 꿈꾸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헛소리하네. 직접 빚어 만들지 않은 이상 꿈속의 상대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다툰다고 사랑이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영화처럼 멋지지 않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그동안 꿔 온 꿈을 박살내는 것보다야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쉽겠지만, 이런 게 바로 사랑인 걸 어쩌겠는가? 사랑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다투고 껴안고, 꼬집고 위해주고. 진흙탕을 뒹굴며 싸우다가도 상대가 울면 아픈 가슴 부여잡고 눈물 닦아주는 게 사랑이다. 초라한 현실에 실망할지라도, 안나는 영화 같은 사랑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이젠 알아야 한다.


엘사는 침대에 앉은 채로 창밖을 봤다. 아쉽게도 날이 맑았다. 데이나를 만난 날의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영화처럼 살 수는 없지만 영화 같은 일도 가끔 일어나긴 한다. 우산 버려두고 비 맞기라. 미친 짓이란 생각은 여전했지만 솔직히 썩 괜찮은 경험이었다. 침대에 들어와선 미친 듯이 코를 훌쩍이긴 했다. 비에 젖어버린 일 자체는 축축하고 불쾌했다. 하지만 그리도 끔찍이 여기며 이해 못 하던 일에 안나를 위한 생각으로 뛰어들었단 사실이 엘사의 가슴을 묘한 설렘과 뿌듯함으로 가득 채웠다. 안나는 엘사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비를 맞고 있으니 그런 종류의 영화가 조금은 이해됐다. 비는 와플 사이의 시럽처럼 두 사람이 조금 더 뜨겁고 끈적하게 들러붙는 것을 도와줬다. 달콤함은 덤이었다.


엘사는 그날 안나가 한 말을 생각했다. 너도 그렇게 짜증 났냐고? 그 말을 하는 안나의 표정을 본 엘사에게 작은 확신이 생겼다. 안나와 약속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는 더 이상 저와 헤어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왜 그런 말을 그런 표정으로 하며 우울해했겠어. 엘사는 내심 안도했지만 그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안나가 그런 생각을 한 게 속상했다. 짜증 나는 거야 사실이지만 안나는 그동안 함께 온 길은 생각도 않고 데이나와 제 처지를 동일시하며 엘사의 마음을 책임감으로 치부해버렸다. 처음에야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어떻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엘사는 정말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안나는 제 속도 모르고 헛생각하며 침울해했다. 안나가 그런 이유가 뭐겠어? 안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침울해하고 엘사가 그런 안나를 보며 속상해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안나는 데이나가 아니었지만, 엘사는 안나에게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랑을 표현한 적 없었다. 없던 걸 무슨 수로 표현했겠냐마는, 엘사는 그동안 물주며 키워온 싹에 꽃이 폈음을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널 보고 왜 그렇게 속상해했겠어? 안나는 이해 못 하겠지만 엘사가 아는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엘사는 안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엘사는 저도 모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가 좋아하는 영화처럼 뜨겁진 않지만 이런 게 사랑인 걸 어쩌겠니. 엘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못 할 영화 속 요란 법석한 고백을 생각하며 안나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가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젠 말해줘야지. 살면서 그 말을 소리 내 꺼내 본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에 인색한 엘사였지만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으니 별수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엘사는 낯간지러운 상황을 상상하며 얼굴을 붉혔다.




*


한스가 집을 비워줬다. 언제 번호까지 교환한 건지 한스는 엘사에게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까지 했다. 말로는 엘사와 저를 위해 비워주는 거라고 했지만 여자 만나러 가는 게 뻔해 보여 안나는 투덜거렸다. 사실 별로 투덜댈 이유는 없었다. 말과 다르게 하는 짓은 솔직했다. 안나는 엘사와 함께 볼 영화와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함께 덮을 담요까지 준비해 놨다. 엘사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안나는 들떠있었고, 동시에 가라앉아있기도 했다. 친구들은 안나를 붙잡고 사랑에 대해 한참 설교했다. 그 순간에는 그 말들이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란히 앉아 사랑 타령하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 도리 없이 가슴이 뛰는 동시에 속이 쓰렸다. 내가 미쳤지. 왜 골라도 저렇게 요란하게 사랑하는 영화를 골랐지? 안나가 엘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사는 영화를 별로 재밌게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의외로 별말은 없었다. 팝콘 하나를 집어 입 앞에 갖다주니, 엘사가 자연스레 받아먹고는 안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런 것도 좋긴 한데... 안나는 티비를 보며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말 그대로 불꽃 속에서 돌고 춤추며 사랑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참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건가 싶은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도 알아.. 근데 저런 멋짐이 없다면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인데? 침대가 부서지지 않을 거면 섹스가 자위보다 나을 게 뭔데? 엘사에게 안긴 채로 포근함을 느끼는 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으니, 충돌하는 온갖 감정에 머리가 아파왔다. 안나는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제가 점점 더 엘사의 품을 파고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땠어요?”



안나가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며 생각 없이 물었다. 끝내주게 멋지긴 하지만 내가 봐도 어이없는데, 당연히 별로라고 하겠지. 그런데 엘사는 감싸 안고 있던 안나의 어깨를 몇 번 쓸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좋은 영화네”


“진짜?”



안나가 엉덩이를 슬금슬금 옆으로 무르며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얼굴을 마주 보니 엘사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안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답지 않게 왜 그래요? 솔직히 별로잖아요.”


“아니.. 정말 괜찮았어.”



엘사가 안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쩐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거슬리는 부분이 있긴 해”


“뭔데요?”



엘사는 안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넌 어땠어? 좋았지?”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길 망설이는가 싶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다음 주면 우리 약속한 시간 끝나는 거 알아?”



안나는 깜짝 놀랐다. 벌써 그렇게 됐나? 그동안 날을 세 볼 생각도 않았다. 안나는 이제야 엘사와 내기 비슷한 약속을 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난 저 남자처럼 노래 못 불러” 안나와 눈을 맞춘 엘사가 조용히, 느릿하게 말했다. “춤도 안 춰. 네가 저 영화를 좋아하는 게, 그게 거슬렸어. 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안나는 숨을 참은 채로 침을 꼴깍였다.



“에, 엘사-”



엘사가 기다리라는 듯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저렇게 멋지게는 말 못 하겠어. 그게 아니라, 난, 원래 이런 말 잘 안 해. 기다리라고 해서.. 미안해.”



엘사는 안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듯 사과했다. 안나는 안나의 마음이 뜬 날 밤 엘사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답 들으려면.. 기다려야 할 거라고... 목구멍이 턱 막혔다. 난 그 뒤에 바로 헤어지자고 했는데, 내가 대답을 기다린 게 맞나? 이젠 날 사랑한다는 거야? 난 엘사를 사랑하는 건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다 내 착각이었고, 그런데 또 그게 착각이 아니었고 사실 사랑이 맞단 소리야? 사랑이 뭔데? 생각에 잠긴 안나의 눈에 힘이 들어가 이젠 엘사를 거의 노려보다시피하고 있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고개를 살짝 틀고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안나, 난 널 사... 사랑..-” 엘사는 말하기 힘든 듯 여러 번 숨을 들이쉬더니 안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봐, 난 저 남자처럼 못한다니까”



엘사는 괜히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떨더니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맞잡은 손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잖아. 사랑해. 안나, 이번 주가 지나도, 다음 주가 지나도, 널 계속 보고 싶어. 시간 다 됐으니 헤어지잔 소린 듣기 싫어. 그러니까.. 너도 날 사랑한다고 해.”


사랑... 사랑!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엘사가 제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데도 끌어안아 줄 수조차 없었다. 사랑에 인색한 쪽은 언제나 엘사였는데 언제 입장이 이렇게 바뀌어 버린 건지, 그렇게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던 안나였지만 가볍게 뱉을 말이 아님을 안 지금은 붙어버린 입이 야속하리만치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엘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다린 적 없구나”



엘사는 안나와 잡고 있는 손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우는 것 같진 않았지만, 어쩐지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안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엘사!”



엘사가 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안나는 반사적으로 엘사의 손을 붙잡았다. 엘사가 움직임을 멈추고 말을 기다리듯 안나를 바라봤다.



“가지 마요..”


“왜?”



엘사의 눈썹이 작게 일렁였다. 안나가 대답 없이 고개만 젓자 엘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안나를 달래듯 잡은 손을 토닥여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달래주던 손을 안나의 무릎 위로 떼어 놓고 말았다. 안나는 이제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울지 마, 제발.”



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나, 나 억지 부리는 거 아니야. 너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내가 졌잖아. 내가 여기 남아서 뭘 더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을 더하겠어? 이번 판은 무효라고 해? 난 못 해. 이제 못 해” 엘사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했다. “네가 이겼어”



엘사가 떠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잡을 방법을 아는데도, 안나는 문이 닫히는 걸 끝내 보고만 있었다. 왜?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건데? 왜 내가 무슨 생각 하는 건지 나도 모르는 건데?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울먹이던 안나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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