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곧, 다시 내릴거야.
영원히 오지 않는 비 같은 건 없어.
스테디레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되뇌이게 되던 말.
스테디레인 막공이 끝난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후기를 끄적이는 게으름뱅이;;;
그래도 기억 보관용으로라도 남겨 두고 싶어서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스테디레인 후기를 찌끄리고 있음.
일단 나는 스테디 레인 A팀 두 배우가 애정배우이고,
김광보 연출도 최애 연출(그런게 있다면)중 한 명인지라
연초에 광보 연출 스케줄 떴을 때부터 꽤나 기대하고 있었던 작품이었어.
애정 배우에 최애 연출 같은 걸 뿌리나?!
그럼 염산처럼 내 통장에 구멍이 뚫리나?!
하면서 패키지 표도 잔뜩 사놓고,
기대하고 고대하다가 만난 스테디 레인의 첫인상은
솔직히 좀 미묘했음.
나쁜 것은 아닌데, 좀 고리타분하고
싫은 것은 아닌데, 좀 지루하고.
석댄은 생각보다 좋았고,
명행조이는 생각보다 별로였고.
화학조미료는 일체 쓰지 않습니다,스러운
광보 연출의 일견 담백해 보이지만 깊은 맛 나는 연출은 뭐 생각했던 거랑 비슷했고.
아무리 그래도 뚜껑도 안 열렸는데 너무 많이 잡았나;;;;싶었던 것도 사실.
다행스럽게도 재관람이 참 좋았어.
첫 관극 때는 배우들도 아직 대사봇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건지 애매한 부분도 있었는데
뭐 기대했던 것처럼 순조롭게 감정 로딩도 되고, 디테일도 메꿔가고.
하얀 캠퍼스에 대충 그은 연필선만 있던 공연이 꽤나 입체감도 나고,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걸 지켜보는게 기분 좋았던건
역시 내가 덕후이기 때문일까ㅠㅠ
이 극에서 가장 도드라지는건 대니와 조이의 대비겠지.
무대에서 오른쪽은 대니의 공간.
무대에서 왼쪽은 조이의 공간.
트유에서 달중쌤이 본하와 우빈의 공간을 그렇게 나눈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둘의 공간은 상수와 하수로, 그렇게 이질적으로 나뉘지.
객석에 감정적으로 강하게 호소하는 강렬한 상수의 대니와,
한 발 물러서 있는 그림자 같은 흐릿한 하수의 조이.
둘의 옷 스타일만큼이나
그 둘의 말투 또한 대비되는데,
대니는 시종일관 일상언어에 가까운 "풀어진" 말투를 유지하고,
조이는 마치 잘 쓰여진 희곡을 읽어 내려가듯이 나레이터처럼 대사를 전달해.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그죠? 하며 관객들의 동의를 구하는 듯,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하는 듯한 강압적인 말투에
반말도 아닌 존댓말도 아닌 반말에 존댓말 두 스푼 넣은 수준의
묘하게 친근한 말투의 대니와는 달리
(가끔 대니 롬바르도의 이야기쇼 같은 순간도 있지ㅋ)
코니가 말해요, 내가, 말하죠.
관객과는 한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병적일 만큼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조이의 말투.
그리고 또한 대비되는 두 배우의 연기.
한 배우는 드라마에서도 통용될만큼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사람이고,
또 한 배우는 자칫 과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정극, "연극" 연기를 하는 사람이지.
석준옵은 자기를 둘러싼 둥그런 블랙의 좌석을 의식이라도 한 듯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라도 거는 것처럼
이곳 저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명행배우는 꼿꼿히 서서 앞을 보면서
말 한마디, 대사 한 문장마다 연극스러운 손동작을 넣으며
낭랑하게 독백처럼 대사를 읊어.
대사의 강약 또한 석준옵은 일상생활에서 흥분해서 말할 때처럼
꽤나 강강강강 몰아 붙일 때가 많고,
명행배우는 중요한 부분을 끊거나, 강조해서 톤을 바꾸거나,
손동작을 통해서 시선을 분산시키지.
가끔 스타 강사로 보일 때가 있을 정도 ㅋㅋ
너무 그 느낌이 강렬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두 배우의 연기 특징까지 연출이 이용한 건 아닐까 싶기까지 했었어.
그래, 처음에는 이렇게나 둘의 "대비"가,
둘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보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혼란이 오더라.
"대비"가 뭐지?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대비"인가?
데깔꼬마니로 찍혀진 화려한 나비 날 개 한쌍은,
각각 "대비" 되던가?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상대방이 할 때,
초조한 얼굴로 옆의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는 두 사람.
자신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조이의 버릇과,
자신의 왼손의 새끼 손가락,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마도 코니의 입술을 찢어놨던
가짜 슈퍼볼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대니의 버릇.
얼굴을 긁는 타이밍,
서로를 바라보는 각도,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등과 등을 맞대고,
그렇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서로를 가장 챙기던 두 사람.
술에 빠져 제대로 근무조차 서지 않는 조이의 땜빵을 서는 대니와,
대니가 창녀나 술집 주인들 털고 다닐 때 뒤를 봐주는 조이.
아이를 안고 있는 론다에게 성녀를 대입시키며 아름다움에 도취되던 대니와,
아이를 안고 있는 코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그녀가 다른 그 누구보다 훌륭하다고 감동하던 조이.
...이런 걸 대비라고 하던가?
둘은 정말 대비 되는 상대인건가?
둘은 그냥 등과 등을 맞대고 하나가 되어
천천히 나선 모양을 그리며 자유 낙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천천히 등을 맞댄 채 돌아 가는 두 사람.
그래서 어느새 대니는 조이의 구역에,
조이는 대니의 구역에 들어오게 된거지.
가족도,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상실, 이라는 조이의 구역에 들어선 대니와
집착, 또는 족쇄와도 같은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대니의 구역에 들어선 조이.
조이는 정말 비가 그쳤다고 믿고 있구나.
...바보 같게도.
그런 생각이 든건,
너무나 슬픈 얼굴로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잃어야 하는게 있다니,
대니는 내 일부였는데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어요, 라고 말하던 조이를 본 순간.
그건 거짓말이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대니는 내 일부였는데,
이제는 내 전부가 되었어요, 가 맞겠지.
아니, 이제는 내가 대니의 전부가 되었어요, 가 더 진실에 가까운가?
아니면 이제는 내가 대니가 되었어요, 가 제일 알기 쉬운 표현이려나.
술에 취해, 자신의 총을 들고도 총구를 어디로 겨누어야 할지 모르던 조이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는 대니 덕분에 목숨을 건지지.
대니는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영역으로 조이를 거세게 끌어당겼어.
하지만 그 덕분에 빙글, 돌아 어느새 조이의 영역에 들어서 버린 대니 앞에,
대니가 들고 있는 총구 앞에 조이는 대니를 세워 놓지.
조이는 대니를 동경해.
하지만 대니가 조이를 사랑했듯 사랑하지는 않았겠지.
초반의 조이는 대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해.
웃기도 하고, 고개를 젓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그 시선의 끝은 모두 대니.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서 대니만 빠지면"
자신이 동경했던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위치까지
자신이 올라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조이는 대니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않아.
무서운 얼굴을 하고,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앞을 노려보고 있지.
론다의 죽음을 발견하고, 아이의 시체를 목격하고,
월터 로렌스를 사살해버리게 되는 대니의 처절한 이야기는
조이에겐 닿지 않아.
마지막에 대니가 조이에게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론다가 죽었어,라 칭얼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조차도,
조이는 정말 듣고는 있는 건지 알아, 알아, 건성으로 중얼거릴 뿐.
대니의 가족을 향한 들끓는 사랑은, 그 마음은
노엘에게도, 코니에게도, 조이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지.
받아 주는 사람이 없는 마음만큼 처절한게 또 있을까.
대니에게 조이는 가족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사랑해야"하고,
"당연히 지켜줘야"하고,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당연히 도와줘야"하는 존재.
그리고 또한, 그럼으로써 대니 자신이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그런 존재.
그 존재가 자신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어도,
자신의 숨통을 죄어와도, 자신의 족쇄가 되어도,
대니는 "가족"을 포기하지 못하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
그래서 결국 대니가 포기하는 건,
포기할 수 없는 가족 말고 다른 쪽에 있는 것,
바로 자기 자신.
꼭, 잘 지켜줘야 한다.
내, 전부야. 내가 가진, 전부야.
가족을 조이 손에 맡기면서 하는 대니의 말은,
그래서 사실이지.
대니는 조이까지도, 조이에게 맡겼어.
대니가 가졌던,
아니 가졌다고 생각했던 전부.
여기까지 보면,
최후의 승자는 조이.
마지막에 웃는자는, 조이.
이렇게 끝나면 이 이야기는 정말
대비되는 두 사람의, 대비되는 결말 이야기.
동경의 대상이던 한 사람은 몰락하고,
그를 동경하던 사람은 그의 모든 것을 손에 넣지.
하지만 마지막에,
둘은 함께 웃지.
서로 마주보며 킥킥킥킥,
얼굴에 하나가득 웃음을 담고, 웃어대는 둘.
등과 등을 맞대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둘은,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직은 대니의 가족을 창문너머 그림처럼 보고 있는 조이지만,
비는 다시 내릴거고,
가족을 위해서, 라는 변명하에 조이는 대니가 하던대로
창녀들과 술집주인들을 털 것이고,
어쩌면 손가락에 가짜 슈퍼볼 반지를 낄 것이고,
노엘이 말을 듣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 줄 것이고,
그리고 또 언젠가 코니의 입술을 찢어 놓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천천히 나선을 그리며 자유 낙하를 다시 시작하겠지.
Steady rain, 지긋지긋한 비는 계속 내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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