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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네크론 단편] 16억, 백만, 그리고 하나-01

고등어(115.23) 2016.10.05 22:23:00
조회 6013 추천 70 댓글 16

행성 세박타니-3

하이브 월드->무덤행성

인구수-200,000,000(전쟁 전)

십일조 등급: 없음

등급: EW120-X003


갱신된 현 상황(776.M32)

행성 내 성체 상태의 타이라니드: 16억 개체 이상(관측치)

행성 내 각성 상태의 네크론: 백만 이상(추정치) 

행성 내 생존 상태의 인류: 하나


***


멀고 먼 테라의 먼 과거, 처음으로 동굴 밖으로 기어 나온, 혹은 나무에서 내려온 원시인류는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육식동물에게 물려죽거나, 굶어죽거나, 얼어 죽거나 살해당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이 만들어졌다. 농장이 만들어졌다. 옷과 집이 만들어졌다. 문명이 만들어졌다. 죽기 싫다는 생각은 인류의 근원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동굴에서 나온 인류가 테라를 개척하고 우주로 뻗어나가, 제국을 세울 수 있게한 원동력. 


소녀는, 그래서 죽기 싫었다. 소녀는 인류였고, 아직 살아있었고, 세박타니의 마지막 생존자였으니까.


달린다. 징그럽게 부풀어 오른 식물뿌리를 넘어 달린다. 가우스빔에 맞아 깔끔하게 원형으로 도려내진 전차를 몸을 숙여 통과한다. 숨이 턱에 차도, 다리의 근육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품 안에서는 행성 세박타니의 마지막 남은 레이션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껍질이 온통 벗겨진 가드맨의 군장에서 빼온 것이었다.


소녀의 등 뒤를 악몽같이 생긴 생명체가 추적했다. 오르도 제노스에서는 그 혐오스런 존재에게 릭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근처럼 둥글게 생긴 머리, 넷 달린 팔들은 다른 동족과 어느 정도 닮아있었지만,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듯했다. 보통은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어야할 입의 위치에는 꿈틀거리는 촉수가 가득했고, 무엇보다 그 피부는 외부환경에 맞추어 시시각각 색을 바꾸어 거의 투명해보일 지경이었으니까.


릭터가 크게 도약해, 한 때 가로등이었던 막대 위에 가볍게 착지하더니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달아나는 소녀를 조준했다. 피슝! 가슴팍에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긴 촉수형태의 공생체가 매섭게 튀어나갔다. 그대로 달려나갔으면 소녀의 폐와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을 그 촉수는, 어째서일까, 그녀를 지나쳐 락크리트 도로에 구멍을 뚫어놓는 수준에 그친다. 명중 직전 기적적으로 소녀의 발이 꼬여 속도가 늦춰진 탓이었다. 소녀는 레이션 하나를 놓치지만, 다시 자세를 잡아 달리기 시작했다. 릭터는 흉곽 안으로 촉수를 회수하고 다시 추적할 준비를 갖췄을 때 소녀는 하수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릭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라 한들, 자기의 얼굴도 들어가지 못할 좁은 통로에서도 추격을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참동안 끈적거리는 점액이 흐르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던 릭터는, 촉수를 몇 번 꿈틀거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타이라니드의 산성액체가 섞여 따끔거리는 하수구 오물에 발을 담근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웅크리고 앉았다.

소녀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행성 세박타니는 황제의 자손이 여기 있었다는 자격을 하루 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인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수구 너머에서 녹색 불빛이 점멸하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덮쳐왔다. 네크론 워리어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하수구 너머를 가득 매우며 걸어오기 시작했을 때, 소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보고한다, 인퀴지터 라엘.

행성 세박타니-3는 현재 두 제노스의 각축장이 된 상태다. 생존자는 없거나 의미없는 수준이다. 신속한 행성정화가 필요하다. 보고 끝.

…더 자세한 설명? 인퀴지터 라엘, 뭘 원하는건가? 저 저주받을 행성의 북반구를 봐라. 궤도 위치까지 솟아오른 역겨운 기둥들이 보이나? 그래, 가시달리고 촉수로 엉킨 저것들 말이다. 저건 타이라니드들이 행성을 소화하기 시작했을 때 만들어지는 구조물이다. 세박타니의 절반은 이미 타이라니드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란 말이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겠군. 아마 거기 함선에서도 보일테니. 북반구를 가로지르는 갈색 구름들이 보이나? 그건 구름이 아니다, 인퀴지터. 궤도 상에서도 보일 정도로 제노스 병력이 이동하는 것뿐이지.

남반구는 어떠냐고? 차라리 북반구에 떨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지층들이 초록빛으로 빛나면서 갈라진 것이 보이나? 그래, 보이는군. 안심했네, 당신 눈은 정상인 모양이라. 머리도 좀 그렇게 정상이었으면 좋겠군. 저건 네크론 왕조가 바깥으로 기어 나온 흔적이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도 눈으로 관측될 정도면 그 규모는 짐작이 가겠지. 좀 더 확대해보면 남반구를 벌때처럼 뒤덮고 있는 놈들의 이동요새도 보일거다. 그것들이 지금 저 행성의 절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단 말이다. 

세박타니는 끝났다, 인퀴지터. 보고 끝마친다. 이상, 데스워치 세마일.


***


위대한 마구스를 모시는 개종혼종 칼-마이소는 세 번째 팔을 들어 매끈한 머리를 긁적였다. 불신자들과 다르게 신성한 교단의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세 번째 팔에 언제나 칼은 고마움을 품고있었다. 총을 들고 하수구 사이를 거니는 와중에도 머리를 긁을 수 있으니까. 승천의 전쟁이 오기 전에는 늘 옷 속에 감추고 다녔던 팔이지만 지금은 사용이 자유로워, 칼에게 전쟁이 시작된 후 몇안되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공기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기이한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와, 칼은 고개를 움츠렸다. 불신자! 불신자들의 무기였다. 칼은 이빨을 드러내고 쉿쉿거렸다. 이윽고 그의 주변으로 굴착기와 오토건으로 무장한 형제들이 모였다.


“기계불신자다! 놈들이 이곳에 들어왔어!”


***


그 강철로 된 악몽들은 교단의 지하왕국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 다른 어디도 아니고 그들의 발밑에서 나타났다. 위대한 마구스가 대승천이 머지않았노라고 감격에 찬 연설을 하고 있을 때, 홀연히 발밑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것들의 몸에는 살점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은 밝은 초록빛으로 타직거리는 기이한 무기와, 무기질적인 금속빛으로 빛나는 금속해골들 뿐이었다. 수백년이 지나도록 지상의 나약한 인간 불신자들은 낌세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지하왕국에 그리도 쉽게 침입자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마구스가 날카롭게 침입자를 배제하라고 외치자마자 그 기계해골들은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수많은 형제들이 도살당했다. 승천을 위해 위대한 전투를 준비하던 형제들이! 그 덧없는 죽음에 분노해 교단의 모두가 들고 일어나 지하전쟁을 시작했다. 칼-마이소의 사랑스런 네팔달린 아들은 그 전투에서 첫 번째로 희생된 전사였다. 그 아이는 마구스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빔을 가로막곤 죽었다. 그 가엾은 아들을 껴안고 오열하는 칼은 마구스의 재촉을 받아 다시 격렬하게 싸웠었다. 일어나라, 너의 아들은 이미 승천에 들어섰으니. 지금은 저 불신자들을 몰아내야 할 시간이다!

기계불신자 스물 정도를 해치우는데 교단의 형제들은 백명이 넘게 쓰러져야했다. 놈들의 무기 앞에서 광산 보호복 따위는 종잇장만도 못했고, 강인한 이상변종형제들이 힘껏 내리친 곡괭이도 놈들의 금속피부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공포스런 불신자들을 처리한 것은 결국 위대한 페트리아크의 강림이었다. 순수한, 그 분의 가장 순수한 핏줄을 타고난 전사들과 함께 나타난 페트리아크가 나타나 4개의 팔을 휘둘렀을 때, 기계불신자들은 사지가 동강나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어찌나 위대해보였는지, 칼을 포함한 형제들은 즉시 바닥에 무릎꿇고 찬송가를 불렀었다.


그러나 그건 전쟁의 전초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규모였다. 신성한 별들의 포식자에게 먹여야 할 행성에서, 일제히 과거의 유령들이 일어서기 시작하자 교단뿐만 아니라 지상의 도시들도 끔찍한 전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유령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별에 있던 것일까? 저 페트리아크께서 이 곳에 내려오시기 전부터 묻혀있던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마구스께서는 전쟁을 선포하셨다. 행성 곳곳에 있는 교단의 형제들이 속속 결집해 지하에서 기계유령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많았다. 교단의 형제들보다도 더, 더욱 많았다. 교단은 치열하게 싸웠다. 지상의 도시들이 모조리 무너져 불타고, 마지막 행성방위군이 가죽이 벗겨진 시체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교단은 싸우고 있었다. 위대한 페트리아크는 순수혈족들과 함께 용맹히 싸우다 전사하셨고, 그때 마구스님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의 뇌에는 찌르는듯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절망에 흐느끼던 교단의 형제들은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예배당에 모였다. 교단이 시작된 곳, 위대한 별들의 포식자에게 스스로를 바치기 위해 기도를 올리던 신실한 땅…. 이미 그곳에서도 기계불신자들의 기이한 모터음이 가까이 들릴 정도였다. 마구스는 무릎 꿇은 형제 하나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이 가까웠노라고 읆조렸다. 기도를 마친 형제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을 때, 마구스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은 증명되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을 감싼 근육과 살점덩어리가 마찰열에 불타며 마치 긴 꼬리를 뒤에 단 날개처럼 길게 흩날렸다. 별들의 포식자들이 교단의 기도를 듣고 마침내 이 저주받은 행성에 강림한 것이다!


선조들이여! 위대한 선조들이여!


목놓아 울며, 눈물 흘리며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마고스가 당황한 듯 움직이지 않는 기계불신자들에게 돌격했다. 그 뒤를 마지막 남은 형제들이 따랐다. 기계해골들을 으깨고, 발없는 해골들을 땅바닥에 처박아버리고, 거미처럼 생긴 기계에 폭약을 던져 부수고 나온 지상은 마구스가 그토록 바라던 풍경이었다. 별의 자손들이 대지를 뒤엎고 천국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은 위대한 아가리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 별들조차 가리고 있었고, 그것들은 지평선이 새까매지도록 별의 자식들을 가득 낳아 대지에 쏟아붓고 있었다.

승천의 때가 온 것이다. 칼-마이소는 울며 하늘을 향해 찬양을 내뱉었다.


그러나 승천을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싸워야 할 터였다. 사실, 전쟁은 이제야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별의 포식자들은 세박타니의 절반을 차지하곤 거기있는 모든 불신자들을 빨아들여 세 자손들을 창조해 내려 보냈고, 숫자는 적어졌지만 교단들은 열성적으로 그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며 기계불신자들과 싸웠다. 별의 자손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지만, 기계유령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북반구와 남반구가 만나는 지역에서 그들은 매일 목숨을 걸고 싸웠다. 살과 금속이 뒤엉켰다. 이빨달린 포탄-딱정벌레와 기이한 가우스레이저가 서로의 몸을 파고들려 허공을 무수히 갈랐다. 칼-마이소는 4층건물만하고 코뿔소같은 뿔을 가진 별의 자손이 땅을 울리게하는 고함을 지르며 흑요석빛깔의 기계유령 전쟁기계를 들이받아 뒤엎는 것을 보았다. 땅 속에서 뱀처럼 긴 몸의 별의 자손이 거미처럼 생긴 전쟁기계 수십마리와 싸우다 갈가리 찢기는 것을 보았다. 숫자가 많은 별의 자손들이 걸어다니는 기계유령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싸움의 일부였고, 칼은 자신이 그 일부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


칼과 형제들은 민첩하게 하수도를 달리면서 무기를 점검했다. 그들이 가진 고체탄환은 걸어다니는 기계불신자들 제압하기에 충분히 강력하진 않았지만, 덩치 큰 형제들이 들고 있는 광산용 레이저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기습할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었다. 그들은 기이한 모터음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지점을 찾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웅크렸다. 별들의 자손을 위한 또 하나의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칼은 찰박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상했다. 그 소리는 너무 작고, 또 간격이 빨랐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기계불신자들은 그런 소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당황한 형제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무기를 슬며시 앞으로 내민 칼의 코 앞에 무언가가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했다.


“어? 사…람? 사람이에요?”


소리를 만들어낸 것은 자그마한 소녀였다. 칼과 교단의 형제들은 당황했고, 소녀는 그 이상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는 무언가를 잔뜩 쥐고 뒷걸음을 쳤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두 눈동자는 이윽고 형제들의 세 번째, 네 번째 손에 이르렀다. 소녀의 입이 비명이라도 지를 듯 커진 순간, 칼은 그 입을 막기 위해 총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순간, 천장이 무너지며 강철로 만들어진 유령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칼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외쳤다.


“돌격! 형제들이여, 불신자를 찢어죽여라!”








니드랑 네크론이 싸우는 광경 한번 묘사해보고 싶어서 써봤음.

뒷부분은 나중에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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