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당연히 이렇게 나오면 계속할 수가 없지."
안나는 거의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뾰족뾰족한 얼음칼날의 장벽이 그녀의 목소리를 앗아가버린 탓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저런 괴물일 줄이야!"
공작이 반은 화색이 돈, 반은 격분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화색이 돈 이유는 그의 짐작이 맞았던 탓이며, 격분한 이유는 그가 증오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이 벌인 일에 당황한 엘사의 귀에 들어온 것은 '괴물'이라는 단어 하나 뿐이었다.
'괴물이라고? 이제 와서? 이렇게 또 다시?"
제발, 꿈이길, 거짓말이길 바랐다. 대관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시점부터, 아니 그 전부터라도 좋으니 제발 거짓말이길 바랐다. 혹시 대관식 전날 너무 긴장해서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분명, 그래야만 하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엘사도 그 사실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이제 겁에 질리다 못해 눈앞이 흐려질 지경이었다. 비틀거리듯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을 제대로 가눌수조차 없었다.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던 그녀가 문에 부딪혀 등을 문에 기대었다.
"언니, 잠깐 진정하고 내 말 들어- 언니!"
안나가 마지막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은 엘사가 문을 열어젖히고 도망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한스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며 말했지만, 안나는 즉각 한스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허튼 소리, 그 칼 가지고 뭘 어쩌려고?"
"사람에게 쓰진 않을 겁니다."
한스가 칼을 크게 한 번 휘둘러 위험하게 솟아난 얼음 칼날들을 잘라내며 말했다. 공작도 환희와 분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다음 허리춤에서 본인의 칼을 뽑아들고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가 될 때까지 얼음 칼날을 베어낸 후 폴짝 뛰어넘었다. 한스와 안나도 지지 않고 공작을 따랐다.
세바스찬경은 어쩔 줄 모르는, 하지만 비교적 평온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초연함을 유지하고 있던 다니엘 경이 그런 세바스찬 경의 모습을 보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알고 계셨소?"
"장난하시오? 내가 저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럼 짐작은?"
세바스찬 경은 한쪽 눈을 치켜올리며 다니엘 경을 쳐다보았다.
"세상 천지에 '우리 여왕님은 아마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는 미친 신하도 있소?"
"저 공작은 짐작했다지 않소."
"저 공작은 우리 신하도 아니오."
이 말을 내뱉고 나서야 세바스찬 경은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던 집사 카이를 발견하고 붙잡아 명령했다.
"당장 섭정의 집무실로 가서 토마스 경과 사이먼 경을 이리로 데려오시오. 필요하다면 간단한 상활 설명까지 곁들여서!"
"알겠습니다, 세바스찬 경."
"저 집사도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군."
다니엘 경이 푸념하듯 말했다. 세바스찬 경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다니엘 경을 노려보았다.
"허튼소리는 그만두시오. 당신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상황을 살피지."
-같은 시각, 성문 안 광장
"다가오지 마세요! 물러서세요!"
"여왕 폐하, 어째서..."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은 분수대가 대신 해주었다. 뒷걸음질치던 여왕의 손이 닿자마자 분수대가 그 모양 그대로 얼어붙었으니까.
사람들은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두려운 기색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여왕을 가장 먼저 뒤쫒아온 공작과 그의 활잡이 두 명이 문을 박차고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괴물은 순순히 두 손을 들고 투항하라!"
공작이 칼날을 정면으로 여왕을 향한채 명령하듯 외쳤다. 엘사는 순간 더없이 두려운 눈빛으로 비틀거렸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되받아쳤다.
"내가 한 손만 들어올려도,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해보시게! 그게 당신이 괴물이란 것을 확실히 증명해 줄테니."
"내 추론이 틀리지 않다면, 방금 그 말은 당신은 우리의 여왕폐하가 괴물이란 것이 확실치 않으면서도 괴물이라 불렀단 이야기 아니오."
에드버드 경이었다. 에드버드 경은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 거리며 여왕과 공작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입증? 저 분수대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분수대 좀 얼렸기로서니, 그게 당신을 해하기라도 했단 말이오?"
"저 안에서는 저 괴물이 만든 얼음 칼날이 우리를 찌를 뻔했소!"
"그래서, 찔렀소?"
"제기랄!"
공작이 이성을 잃은 휼포한 눈동자를 빛내며 에드버드 경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경고하겠소. 당장 물러선다면 죄는 묻지 않겠소. 저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게 놔둔다면 당신 또한 괴물이오!"
"이곳이 당신 영지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군."
에드버드경이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나야 말로 경고하지. 이쯤에서 칼을 버리고 투항한다면 방금전까지 우리 왕실에 가한 모욕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고, 내 성심성의껏 변호해주리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하겠다면 국물도 없소."
그 순간,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한스와 안나가 튀어나왔다. 안나는 달려오다가 한 번 넘어졌는지 다리 한 쪽을 절뚝거리며 필사적으로 엘사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언니! 엘사 언니! 제발 좀 멈춰서..."
실날같은 기대를 걸고 에드버드 경과 위즐튼 공작의 논쟁을 지켜보던 여왕은 안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다시 뒤돌아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좀 비켜봐요, 언니!"
안나가 서로 첨예하게 노려보고 있던 공작과 에드버드 경을 각각 한 팔로 동시에 밀쳐내며 말했다. 얼떨결에 양쪽으로 밀려나버린 두 남자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허리춤에 칼을 집어넣었다.
"안나! 쫒지 말아요!"
그 뒤로 한스가 본인의 칼을 허리춤에 집어넣으며 안나를 뒤쫒았다. 안나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을 빠져나와 해협까지 그녀를 쫒았다. 이제 곧 도망칠 곳이 없을 것 같다 싶을 때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해협을... 뛰어서 건너고 있어?"
대체 저 아름답고도 막강한 마법은 뭐란 말인가. 해협을 얼려서 뛰어서 건널 수 있게 해주다니? 안나는 다리에 힘이 쭉 풀리는 것을 느끼며 철푸덕 쓰러져버렸다. 한스가 곧바로 뛰어나와 그녀를 일으켜 주었지만, 공주는 언니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뒤, 아렌델 성 문안 광장
"저런 괴물을 왕으로 섬기다니!"
"당신 사절 맞아요? 상황이 상황이기로서니, 어떻게 한 사람도 다치게 하지 않고 도망친 사람을 두고 괴물이란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그것도 이웃나라의 국왕인데?"
안나가 잔뜩 열받은 목소리로 공작에게 되받아쳤다. 하지만 공작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공주를 노려보았다.
"당신도 무슨 이상한 능력이라도 있소?"
"전혀요! 이중에서 가장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나 비난하고 보는 당신이겠지만."
"음,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소만. 아니, 후자 말고 전자 말하는 거요. 난 아무나 비난하고 보지 않소. 그런 고로, 방금전까지 내게 쏟아진 무례한 폭언에 대해서도 충격적인 상황에 따른 정상참작을 하여 당신에게도 맹목적인 비난은 쏟아내지 않을 거요."
안나는 거의 공작을 한 대 칠 기세로 다가가려 했지만, 한스가 그녀의 어께에 손을 올려 저지했다. 안나도 이번 만큼은 한스의 저지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저 공작의 얼굴을 갈겼다가는 자매가 쌍으로 괴물취급을 당하겠지.
"그래서, 아렌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폐하께서 도망가시니 말이오."
이중에선 가장 정신이 온전한 축에 드는 다니엘 경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3년전 일에 대한 위로의 인사를 전하는 겸 찾아왔는데, 다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다니요."
코로나 왕국의 부마라고 했던 잘생긴 사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옆에 있던 단발머리 미녀도 한 마디 덧붙였다.
"단순히 해협만 얼린 게 아니에요. 아렌델 전체가 얼어붙었죠. 이대로라면 외국의 사절들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빠져나갈 생각도 없소."
위즐튼의 공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괴물이 유럽의 무역로에 버티고 있다는 건 대륙 차원의 문제요. 가만 둘 일이 아니지."
"언니를 해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면!"
안나가 한스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려고 하며 외쳤지만, 한스가 가까스로 자신의 칼을 사수했다. 아무래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공주의 정신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모든 상황에 대한 결정권은...."
에드버드 경이 공작을 경멸의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눈빛을 바꿔 온화한 눈길로 안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에게 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왕위 계승권 1순위시니까요."
"그럼 토마스 경에게 맡겨요. 유감스럽겠지만 섭정 직무 연장이에요, 토마스 경."
공주가 간단하게 말했다. 하지만 토마스 경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에, 네?"
"유사시에는 한스 왕자에게도 권한의 일부를 넘기겠습니다. 외국 사절들까지 있어서, 일이 복잡할 테니까. 토마스 경이 바쁘거나 가신들이 각자 할 일이 많을 땐 한스 왕자가 다른 일들을 모두 총괄합니다. 일단 누가 뭐래도 언니가 결혼까지도 허락한 사이니까. 아렌델 왕족으로서 예비 생활 하는 겸 치면 되죠, 그렇죠 한스?"
"으음...그건 그렇습니다만..."
한스가 공주에게 완전히 말려버려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방금 전 공주의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말은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공주는 그 어느때보다도 온전하고 냉철한 정신을 가진 것 같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 이 공작나리는 가신들이 알아서 입닥치고 있게 하고. 그리고, 카이 내 말을 가져와요!"
"예?"
'공작을 입닥치게 하라'라는 명령과 '말을 가져오라'라는 명령 둘 다에 대한 반문이었다. 둘다 정상적인 명령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공주는 후자에 대한 반문으로만 이해했는지 카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니를 쫒아갈 거에요. 걸어가긴 좀 그래서. 괜찮죠?"
"아, 물론 괜찮습니다만."
카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한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괜찮을리가 없잖아요! 안나, 여왕은 해협을 건너 숲속으로 사라졌어요. 벌써 숲에는 눈이 가득 덮였고. 말을 타고 괜찮겠어요? 나와 시트론이라도 같이 간다면..."
"눈이 덮였기로서니 걷는 것보단 낫겠죠. 말을 탄 속도라면 그리 멀지 않아 언니를 붙잡을 수 있어요. 괜한 걱정은 말아요, 한스. 게다가 방금 내가 한 말 대충 들었죠? 당신 지금 이 성의 2인자에요, 책임감을 가져요."
곧 카이가 안나의 눈처럼 흰 백마를 끌고 돌아왔다. 추위를 막기 위한 망토를 어께에 두르며, 안나가 아직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한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쪽산을 올라갈 일만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거에요. 약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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