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무슨 술을 마셨고 또 무슨 안주를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술 한 잔에 수없이 많은 연애썰을 쏟아내던 A군을 기억한다.

남자들만 모인 자리라 여자이야기는 일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를 또렷히 기억하는 이유는 A군이 쏟아낸 

연애썰이 술맛이 가실 정도로 질척했기 때문이다.

새내기 첫 술은 약하게 해야하기 마련인데 동정들에게 그의 쑬은

너무 도수가 높았던 모양이다. 술과 연애이야기의 기가막힌 조합

이었음에도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에서 만화까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매체가

무지개색 낚시바늘로 꿈에 부푼 동정들을 낚아대던 시기였으니

동석한 친구들의 충격은 상당한 것이리라. 

하지만 A군은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며 그 분위기로 파장할 때까지 

입터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절구와 달토끼를 믿는 어린아이들에게 느닷없이 달의 뒷면

초근접사진을 들이대는 광기어린 천문학자의 느낌과도 같았다.

몇몇 동정친구들은 급기야 화를 내며 썰을 부정했고  

자기가 본 사랑은 역시 무지개핑크빛이 맞다며 파장 후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파장 후 인사하던 A군의 슬픈 얼굴과 

진한 쓴웃음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질척한 썰들은 계속 뇌리가 남았다가 

이런저런 일들이 지나가고 이윽고 기억이 풍화되면서 깜빡한 모양이다.

그 책을 읽고 그래 이런 이야기였었지 하고 되새겼던 걸 보면 말이다.

달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마주보고 있어서다.

서로 자신의 밝은 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쪽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문제는 둘 중 하나가 생각에 잠겨

상대방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볼 때다.

상대방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을 때가 어쩌면 연애의 

위기일 지도 모른다. 연애가 오래될 수록 서로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며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적나라한 부분은 요시노와 아키오가 나체로 100분토론을 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미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감추고 있던 온갖 치부마저 드러내고나니

그 곳에 남은 건 사랑스런 연인이 아닌 함께 할 이유마저 잃은 벌거벗은 타인이었다.

그것은 마치 지구표면에 달의 뒷면을 비벼대는 것같았다.

항상 마주보고 있기에 지구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상처 투성이인 그 곳.

인간의 감정이란 늘 본능과 이성 사이에 존재한다.

연애감정에도 본능과 이성이 섞여있기 때문에 이성만으로

연애감정을 설명하기 버거우며 본능 또한 마찬가지다.

요시노는 이성적인 연애를 하고자 하지만 첫 눈에 반한다는

본능이 그녀를 흔들고 만다. 

늘 본능적인 것처럼 보이는 아키오는 오히려 요시노의 사랑

을 냉정히 판단하려하며 다른 이성의 접근을 이성적으로

거부하려한다. 

연애감정이 상온의 물이라고 한다면

연애에서 발휘되는 이성과 본능은 각각 얼음과 수증기로

비유할 수 있다.

요시노와 아키오가 이성과 본능만으로 연애감정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연애감정이라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이성과도 다르며

끝없이 뜨거워지기만 하는 수증기와도 다르다.

때론 차가운 이성을 덥혀야 할 때도 있고 뜨거운 본능을 식혀

감정을 추스려야할 때도 있다.

그걸 몰랐던 요시노와 아키오는 타인과의 연애감정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쯤되니 몇 년 전 A군이 우리에게 한 썰들이

단지 동정을 상처주기 위한 괴롭힘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결말처럼 질척했지만 다시 만나 잘 되었다 정도

의 에필로그를 덧붙였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인가.

연애감정은 질척이는 파도와도 같으니 

그 흔들림을 잠재울 무게중심 또한 없다.

그대가 오랫동안 연애를 이어가고 싶다면

사랑을 정의내리고 그 중심을 찾아나기기 보다는 

매 순간 변화하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